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12)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

 

‘탐심’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가톨릭의 십계명은 이웃의 아내에 대한 탐심과 소유물에 대한 탐심을 구별해서 각각 아홉 번째, 열 번째 계명으로 세고 개신교는 이웃의 둘을 하나로 묶어 열 번째 계명으로 셉니다. 이 글은 가톨릭 셈법에 따라 영화를 따라가므로 이 글에서는 이웃의 아내에 대한 탐심만 다룹니다.

 

탐심에 대한 계명이 맨 뒤에 나오므로 다른 계명보다 가볍게 여겨도 된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계명을 어기는 행위 밑바닥에는 ‘탐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맨 앞에는 야훼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야훼 유일주의 신앙을 배치하고 맨 뒤에는 죄악의 뿌리인 ‘탐심’을 배치함으로써 십계명은 하느님에서 시작한 영적 여행을 사람의 마음에서 마무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이 다른 계명들과 다른 점은 그것이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동기와 욕망에 대한 규정이란 데 있습니다. 십계명이 법정에서 통용되는 법률이 아님은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나쁜 생각이라도 마음속에 품고 있다고 처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행위로 실현되지 않고 마음으로만 갖고 있다면 그 어떤 악도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게 흔히 말하는 사법적인 범죄(crime)와 종교적인 죄(sin)의 차이입니다.

 

학자들은 마음에 품은 생각과 밖으로 드러난 행위를 구별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오랫동안 논란을 벌였습니다. 전자가 대체로 우세하지만 결국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둘을 엄밀히 구별할 수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습니다. 히브리어로 ‘탐내다’는 동사 ‘하마드’가 탐심을 품은 결과 남의 것을 소유하려는 행위까지 포함한다는 점도 후자의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구약성서 안에서 ‘하마드’의 용례를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 이 동사가 탐심에서 비롯된 행위까지를 포괄하지 않음이 확인됐습니다(신명기 7:25, 여호수아 7:21, 미가 2:2 등 참조). 물론 계명의 의미는 단어의 용법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뭔가를 마음에 품는 것과 그걸 행동에 옮기는 것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도 사실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탐심에 대한 경계는 성서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대 이집트의 지혜문서에도 탐심에 대한 경계가 자주 등장합니다. 피라미드 시대 문서인 <프타호텝의 교훈 The Instruction of the Vizier Ptahotep>에는 “남의 물건을 탐내지 말라. 네 몫이 아닌 것에 탐심을 품지 말라……. 아주 작은 탐심도 평온한 사람을 분쟁에 몰아넣기에 충분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원전 2천 년 경의 문서인 <메리카레 왕의 교훈 The Instruction of King Merikare>에서 왕은 후계자인 아들에게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에 탐심을 품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가르칩니다. 이집트 중왕국(Middle Kingdom) 시대의 한 지혜문서(The Tale of Eloquent Peasant)는 “위대한 사람이 탐심을 품고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예들을 보면 탐심에 대한 경계는 고대인에게 새롭지 않습니다. 이집트 지혜문서와 십계명은 공히 탐심을 품은 사람을 법에 따라서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도덕, 윤리, 종교의 문제이지 법률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남의 아내에 대한 탐욕이 낳은 비극적 사건

 

다윗은 구약성서에서 이웃의 아내를 탐낸 죄를 저지른 인물입니다. 그는 헷 족속 출신의 수하 장군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관능적인 장면을 우연인지 의도적인지 목격하고 탐욕이 일어나 그녀를 취했습니다(사무엘하 11장). 여기까지는 권력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숨기려 했는데 그러려면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밧세바가 덜컥 임신했습니다. 다윗은 간음의 죄를 감추려고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입니다. 그가 밧세바와 동침하기를 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충직한 우리야는 군인의 규율에 따라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근위병과 함께 밖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자 다윗은 더 큰 범죄를 계획합니다. 우리야를 죽이려 작정한 겁니다. 그는 군대 총사령관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그걸 우리야의 손에 들려 전쟁터로 돌려보냅니다. 편지는 그를 격전지로 보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를 죽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요압은 왕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우리야를 격전지로 보내 죽게 했습니다. 그 후 다윗은 밧세바를 왕비로 맞아들였고 그녀는 다윗에게 아들을 낳아줬습니다.

 

얘기가 이렇게 끝났다면 잠시 씁쓸해 하는 걸로 그쳤겠지만 남은 얘기가 더 있습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저지른 불륜의 결과로 태어난 아기는 곧 죽었습니다. 이름도 얻지 못한 채 말입니다.

 

이 사건을 알게 된 예언자 나단이 왕에게 나아와서 우화(寓話) 형식을 빌려 추상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당시에는 왕이 맘에 드는 여자를 취하는 일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탐심에서 비롯된 간음이 살인을 불렀고 다윗은 모든 일을 하느님이 없다는 듯이 해치웠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다윗의 행위를 하느님을 얕보고 저지른 짓으로 규정했습니다(사무엘하 12:10). 그래서 그는 나단에게 고백합니다.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13절) 그러자 나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훼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님은 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이번 일로 야훼의 원수들에게 우리를 비방할 빌미를 주셨으므로 밧세바와 임금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죽을 것입니다.”(13-14절)

 

아이가 병에 걸렸습니다. 다윗은 식음 전폐하고 베옷 걸치고 맨땅에 엎드려 밤새워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신하들은 임금의 정성에 감동했지만 엎드려 기도하는 다윗의 심정은 착잡했을 겁니다. 나단의 예언에 따르면 아기의 죽음은 하느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일은 은총이지만 그걸 아들의 죽음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면 그걸 은총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징벌을 이때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나단은 다윗이 야훼를 얕봤기 때문에 그의 집안에 칼부림이 그치지 않을 거라고 예언했는데(10절) 이게 그대로 이루어져서 아버지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아들들의 칼부림은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이 모든 비극은 다윗이 한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일어난 탐심을 다스리지 못해서 일어났습니다.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

 

영화 <십계명>의 다른 에피소드들처럼 이 계명에 대한 에피소드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도 계명과의 연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의사인 로만은 항공회사 직원인 아름다운 아내 항카와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둘 사이에 아이가 없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의사이자 친구에게 성불구 판정을 받습니다. 의사는 그가 치료될 가능성이 없다면서 이혼할 걸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항카는 사랑하는 사이에는 섹스보다 더 중요한 것도 많다면서 로만이 성불구라고 해도 문제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로만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항카에게 애인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자기에겐 문제없다면서 말입니다. 항카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하고 다시는 이 문제를 얘기하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항카에게는 이미 젊은 애인이 있었습니다. 로만은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고 아내의 자동차 안에서 마리우스라는 이름이 적힌 대학생의 노트를 발견합니다. 로만은 그때부터 아내를 의심해서 전화에 도청장치를 달아놓지요. 로만은 아내와 마리우스가 불륜관계임을 확인합니다.

 

한편 로만의 집도로 심장수술을 받을 젊고 매력적인 여자 가수가 있습니다. 노래를 계속 부르려면 심장수술이 필수적입니다. 그녀는 자기 얘기를 로만에게 접근하는데 로만 역시 그런 그녀가 싫지 않습니다.

 

항카와 마리우스의 관계를 로만의 추측과는 좀 달랐습니다. 항카는 마리우스와 관계를 끝내려 했지만 마리우스는 그녀와 결혼하자며 막무가내로 조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둘의 관계는 이미 끝났다며 그를 돌려보내고 집을 떠나려는 순간 누군가 숨어서 자기를 엿보고 있음을 느낍니다. 로만이 벽장에 숨어서 엿보고 있었던 겁니다. 한바탕 설전(舌戰)이 오간 후 둘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들 결혼생활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다가 아이를 입양해 키우기로 합의합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항카가 혼자 스키여행을 떠나는데 마리우스가 우연히 이를 알게 되어 그녀를 뒤따라갑니다. 항카는 이 사실을 몰랐는데 로만이 우연히 마리우스가 자동차에 스키를 싣고 어딘가로 가는 걸 목격하고 의심이 들어 확인해보니 그가 항카와 같은 스키장으로 간 게 아닙니까.

 

항카는 스키장에서 마리우스를 만납니다. 그녀는 놀라면서도 로만이 오해할 걸 걱정해서 집으로 전화하지만 로만은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갑니다. 로만은 항카를 오해해서 자살을 기도하지만 다행이 목숨을 건집니다. 집에 도착한 항카는 로만이 남겨놓은 편지를 읽고 그가 자살을 시도했음을 알고 망연자실합니다. 병원에서 깨어난 로만은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자기가 살아 있음을 항카에게 알립니다. 영화는 여기서 끝납니다.

 

탐욕을 버릴 수 있을까?

 

자기가 탐욕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남들 눈에는 탐욕스러워 보이는 사람도 스스로는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탐욕을 경계하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비유의 결론에서 예수께서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르셨기에 그 이름이 붙어 있지만 내용을 보면 ‘탐욕스러운 부자’라는 이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유산을 자기와 나누라고 형에게 말해달라는 어떤 사람의 요청에 대해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신 후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어느 해에 곳간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이에 그는 더 큰 곳간을 지어 곡식을 보관하기로 하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을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결론으로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느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21절).

 

예상보다 많은 소출을 거두어들였다면 누구나 이렇게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를 어리석거나 탐욕스럽다고 합니까? 소출이 많아져서 큰 곳간을 짓고 곡식을 거기 보관하려 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물건을 잔뜩 쌓아놓았으니 마음껏 먹고 마시고 놀기로 작정했기 때문일까요? 두 가지 모두 때문일까요? 답은 생각보다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많이 쌓아두었다고 모든 사람이 놀고먹진 않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쌓아둔 것도 없으면서 일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탐욕과는 거리가 멀까요? 질문에 대한 답은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욕망이 모든 악과 불행의 뿌리라고 보고 욕망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있지만 그리스도교는 그렇게까지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서는 욕망 그 자체가 악의 뿌리라고 말하지도 않고 그걸 완전히 없앨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서도 과도한 욕망이 악을 낳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제어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걸 뿌리째 없애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고요.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마태 5:27-30).

 

이 말씀의 의미를 파악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은 이미 간음한 것이니 간음죄는 극히 예외의 성자(聖者)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뜻일까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을 간음죄를 저지른 셈이니 모두 돌로 쳐 죽이라는 뜻일까요? 신체의 일부가 죄를 짓는다면 그 부분 없이 천국 가는 게 온전한 몸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나으니 그 부분을 가차 없이 잘라내라는 뜻일까요?

 

죄는 몸으로 실행하기 전에 마음으로 저지릅니다. 벌도 집을 짓고 사람도 집을 짓지만 둘의 차이는 사람은 집을 짓기 전에 마음으로 집을 지어놓는 데 있듯이 사람은 죄를 몸으로 짓지만 그 전에 이미 마음으로 죄를 짓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눈을 빼고 손을 자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여자를 보고 음욕이 일어날 때마다 몸을 학대하라는 뜻도, 간음죄는 누구도 피할 수 없으니 피하지 말고 적당히 지으면서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강조하는 바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과 몸으로 행동하는 것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가 저지르는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중대한지 잊지 말라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죄 짓는 일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몸의 한 부분이 죄를 지으면 그걸 잘라낼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그런다고 마음까지 정화되지는 않지만 회개하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죄를 회개하는 일은 눈을 빼고 손을 잘라내는 일처럼 치열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라는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처럼 죄를 회개할 때는 날카로운 하느님 말씀 앞에 마주서는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탐심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에게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을 갈망하고 채워지지 않는 것을 채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탐심이 결코 채워지지 않고 탐욕을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는 이유는 얻을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걸 탐내기 때문입니다. 밑 빠진 독처럼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이 때문입니다. 탐심은 놀라운 능력으로 사람을 속입니다. 매우 탐욕스런 사람도 자기가 탐욕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탐욕에는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탐욕에는 갖고 싶은 대상이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구약성서 전도서의 메시지는 평생 탐욕을 채우려고 쫓아다녔지만 종국에는 허무밖에 남은 게 없더라는 겁니다.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물음보다 앞서 물어야 할 물음은 ‘욕망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왜’ 욕망하는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욕망하게 만드는가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탐욕의 반대는 ‘절제’가 아니라 ‘만족’입니다. 일이든 소유든 인간관계든 하느님과의 관계든 은총이든 축복이든 뭐가 됐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려면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만족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마음의 ‘상태’나 밖에서 뭔가가 주어졌을 때 절로 생기는 정신적 ‘반응’이 아닙니다. 기계적인 반응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만족은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만족은 정적인 ‘정신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정신활동’입니다. 만족이라는 정신활동은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무관하진 않지만 거기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정신과 영혼이 주체적으로 활동한 결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밖으로부터 뭔가가 충분히 주어졌다고 해서 탐욕이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만족도 밖에서 주어진 것에 의해 채워지고 말고 하는 비주체적인 정신상태가 아닙니다. 만족은 나의 영혼활동이 만들어내는 그 무엇입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본래는 남자에게만 주어진 계명입니다. 여기서도 여자는 계명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정까지 오늘날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화의 초점이 남의 아내를 탐낸 마우리스에게 맞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초점은 로만과 항카 부부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영화와 계명의 관련성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영화는 남의 아내에 대한 탐심이 부부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둡니다.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불가능한 상황은 이 부부에게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습니다. 문제가 있는데 없는 척하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택한 해결방법이 무엇인가가 문제입니다. 상대방을 부정직하게 대함으로써 사태를 해결하려 했던 게 문제였습니다.

 

로만은 아내에게 애인을 만들라고 권했습니다. 이는 ‘쿨’하게 들릴 수도 있고 ‘설마 정말 그렇게 하랴?’라는 심정이었을 수도 있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정직하지도 않은 말이었고요. 그는 아내에게 애인이 있다는 의심이 생기자 전화를 도청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벗고 있어도 부끄러운 줄 몰랐는데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이를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서로 남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아담은 이를 ‘당신(하느님)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 하와의 탓으로 돌리면서 하느님을 끌고 들어왔고 하와 역시 ‘뱀에게 속아서’ 그랬다며 뱀 탓을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벌거벗고 다녀도 부끄러워하지 않던 사이가 가려야 하는 사이가 됐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이가 됐습니다. 로만과 항카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벌어진 원인은 로만이 성불구가 됐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불신하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로만과 항카는 서로 뭔가를 숨기고 숨겨진 사실을 밝혀내야 하는 사이가 됐습니다. 의심이란 걸 해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임을 압니다. 로만은 질투 때문에 아내를 미워하게 됐습니다. 둘 사이에 미움이 끼어든 겁니다. 그는 마리우스와 관계를 정리했다는 아내의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의심하고 미워하게 되니까 상대가 진실을 말해도 그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아내에 대한 오해를 풀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로만에게 심장수술을 받을 예정인 젊은 가수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둘 사이의 얘기는 더 진행되지 않습니다. 둘 사이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그녀를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상당히 무거워 보입니다. 그녀의 역할은 마리우스의 그것보다는 더 큽니다.

 

저는 그녀는 ‘욕망의 전염성’을 말한다고 봤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들 합니다. 사람은 남이 갖고 있는 걸 갖고 싶어 하고 그걸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안 되면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집니다. 로만과 젊은 가수의 관계는 로만에게 전염된 항카와 마리우스 관계입니다. 로만은 항카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 것입니다. 항카가 누리는 걸 자기도 누리고 싶은 것이지요. 로만은 스스로 초라해지고 싶지 않은 겁니다. 젊고 매력적인 가수는 항카의 욕망을 욕망하고 싶은 로만에게 잘 어울리는 대상입니다.

 

항카 역시 남편에게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애인이 있는데 애인을 가지라는 남편의 제안에 대해 ‘죽을 때까지 다시는 그 문제를 얘기하지 말자.’고 말하니 말입니다. 그녀가 남편을 속인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자기는 그런 생각을 조금도 안 해본 것처럼 죽을 때가지 거론하지 말자고 말한 겁니다. 게다가 그녀는 자기를 엿보다 들킨 로만에게 매우 당당합니다. 그 때 그녀가 마리우스에게 결별을 선언했기 때문일까요?

 

탐심도 고독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은 타인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기에 고독해지고 고독감을 메우기 위해 남의 것을 탐내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남의 배우자를 탐내는 사람도 자기 배우자와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독감을 메우기 위해 잘못된 방법을 선택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박사가 쓴 글을 소개합니다. 그 글은 우리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얘기는 아니지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집니다. 고아로 자란 사람들 중에는 미련할 정도로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 많답니다. 고아는 자기가 필요할 때 원하는 만큼의 물리적, 정서적 보살핌을 못 받기 때문에 참는 게 성격으로 굳어진다는 겁니다. 고아 출신의 한국인 부인과 살고 있는 어느 외국인은 결혼 직후 아내에게 펀치 볼을 사줬답니다. 아내가 너무 참는 게 많아 보여서 순간순간 펀치 볼에 풀라고 말입니다.

 

이 처방이 아내에게 도움이 됐답니다. 하지만 진정한 도움은 펀치 볼을 때리는 데서가 아니라 남편에게서 자길 진정으로 걱정해 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을 본 데서 왔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심리적 고아’로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 눈에는 그런 사람들이 더 눈에 잘 띠겠지요.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건 그를 인정해 주고 격려해 주는 ‘한 사람’이랍니다. 그 한 사람만 있으면 정신적 고아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그 ‘한 사람’이 되어주면 내게도 그런 사람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에 박수를 쳤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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