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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내쫓으란 말인가, 죽이란 말인가?

by 한종호 2016. 5. 9.

구약성서의 대량학살(4)

 

내쫓으란 말인가, 죽이란 말인가?

신명기 7:1-6, 16-24

 

나쁜 놈이었으면 좋겠다

 

두 남학생이 한 여학생을 좋아합니다. 아주 가까운 친구인 두 남학생은 같은 여학생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보하기는 싫습니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보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지요. 한 녀석이 별똥별을 보면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내 친구가 나쁜 놈이었으면 좋겠다.”

 

많이 듣던 얘기지요?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기억에 남는 장면입니다. 두 남학생은 아주 친한 친구인데 같은 여학생을 좋아하니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아무리 친해도 좋아하는 여학생을 양보하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서로 경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별똥별이 떨어질 때 빈 소원이 “내 친구가 나쁜 놈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나쁜 놈이면 맘 편하게 여학생에게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친구가 너무 착하고 좋은 사람이어서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너도 그 얘를 좋아한다면 내가 포기할게.’라고 생각하게 한 친구 말입니다.

 

제 경우엔 대개 설교를 준비하다 영화나 드라마 에피소드가 떠오르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드라마의 장면을 보면서 이스라엘과 가나안 종족이 떠올랐습니다. 야훼의 백성 이스라엘과 그들이 야훼로부터 멸절하라고 명령받았던 가나안의 일곱 족속의 관계가 두 남학생 관계와 비슷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사실은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과 친구처럼 가까웠는데 어쩔 수 없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처지여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그들이 나쁜 놈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그래야 자기들이 그들 땅을 차지하는 게 덜 미안할 터이니 말입니다.

 

보통 기독교인 정도의 구약성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이 얘기에 고개를 갸우뚱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사람들과 친하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둘은 철천지원수 아냐?’라면서 말입니다. 구약성서를 조금 더 아는 사람은 터무니없다고 여길 겁니다. 그는 구약성서가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서술하는지 알기에 제가 지나친 상상력을 펼친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구약성서 전문가라면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들 중에는 제 얘기를 흥미로워 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들도 야훼가 가나안 사람들을 모조리 멸절하라고 명령했다는 데에 의문을 갖고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제 얘기가 그 의문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기대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전문가들 중에도 제 얘기에 분노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느님 말씀의 권위를 깎아내린다고 말입니다.

 

 

 

사람 죽이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왜 저는 이스라엘과 가나안 사람들이 친한 사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친하다는 말은 지나칠지 모르지만 둘 사이가 철천지원수였다고 여기는 것도 지나친 생각입니다. 우선 내가 그렇게 추측하는 근거를 얘기해보겠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나 수단은 다양하고 많습니다. 그걸 갖고 있으면 쉽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은 정서적, 감정적, 정신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그 후로도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사람 하나 죽이는 일도 이렇게 쉽지 않은데 하물며 수백, 수천, 수만 명을 한꺼번에 죽이는 대량학살은 오죽하겠습니까.

 

여기서 두 가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느님이 정말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요? 정말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종족을 멸절하라고 명령했을까요? 성서는 분명히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나중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겠지만 분명한 점은,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그렇게 명령했다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가나안 족속을 몰살하라고 명령하셨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합니다.

 

둘째로 구약성서 학자들 중에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대량학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극히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학자가 아닌 한 대개가 그렇습니다. 물론 크고 작은 전쟁이 가나안에서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 숫자라든가 여자와 어린아이와 짐승까지 몰살했다는 성서의 진술 그대로 전쟁이 벌어졌다고 믿는 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휴머니스트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성서의 진술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짐작할만한 이유가 성서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얘기는 앞으로 차차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가정하고 얘기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랬다면 어땠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집단적으로 싸이코패스가 아니었다면 제 정신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 수천, 수만 명을 죽이는 짓을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냉정하게 저지를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짓을 했다면 그들은 무척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최근 이라크나 아프간 전쟁에 다녀왔던 군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에 시달리는 걸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사람을 죽였으면 얼마나 죽였겠습니까. 그런데도 그토록 심각한 증상에 시달리는데 이스라엘이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 몰살했다면 오죽했겠습니까. 비록 성서에는 그런 얘기가 없더라도 그랬을 거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짐작하는 게 맞습니다.

 

저는 지난 글에서 성서라는 오케스트라에는 불협화음이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또한 역대기에 나오는 두 얘기를 갖고 불협화음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한편에는 수많은 에돔 사람들을 전쟁에서 죽인 것도 모자라서 포로 1만 명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으스러뜨려 죽인 유다군인들의 행위를 허용 또는 묵인한 하느님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다윗이 너무 많은 피를 묻혔으므로 성전을 지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하느님이 있습니다. 이 하느님은 분명 피 흘리는 일에 부정적입니다. 해서는 안 되거나 적어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두 하느님은 도저히 어울릴 수 없습니다. 하나가 화음이면 다른 하나는 불협화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성서에 이와 같은 불협화음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이면 누구나 생래적으로 갖고 있는 보편윤리와 종족신앙 사이의 갈등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불협화음이 존재하는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신학, 곧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종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우리만 위해주는 나/우리만의 하느님, 나/우리 종족만의 안위를 지켜주고 축복해주는 하느님, 다른 종족의 생존과 안위와 번영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오로지 나/우리 종족만을 위해주는 하느님, 종족신앙이라고 불리는 이 종교를 당시 모든 족속들이 갖고 있었던 겁니다.

 

당시에는 어느 종족도 종족신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신, 인류 전체를 위한 보편적인 신(universal god)이란 개념은 당시 사람들 생각 속에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미개한 종족들만 그랬던 게 아닙니다. 당시에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도 예외 없이 종족신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고요. 이스라엘이 여타 종족과 다른 점은 그들은 야훼 하느님 한 분만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런 종족신앙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3천 년 전 고대인들이 갖고 있던 신앙을 21세기 사람들이 여전히 갖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고 리영희 교수께서 20여 년 전에 <말> 지에 쓴 글을 저는 아직껏 기억합니다.

 

리영희 교수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양심수로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성서를 여러 번 읽었고 예수의 교훈과 삶은 깊이 공감하고 신뢰하지만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엔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때 통역장교였답니다. 그는 치열한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을 앞에 두고 군목이 전투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념이 달라서 벌이는 이 전쟁에서 과연 하느님은 어느 편을 들까? 하느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줄까? 이렇듯 자기만 위해 달라는 사람들의 기도를, 자기 이익을 위해 전쟁까지 불사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줘서 한 편을 이기게 하는 신이라면 과연 그를 하느님이라고 믿을 수 있겠나?’ 그는 서로 이겨서 이익을 차지하려고 치고받는 전투에 하느님을 끌어들이는 기독교에 환멸을 느꼈다는 했습니다. 이것도 종족신앙에 다름 아닙니다. 이것이 종족신앙이 아니면 대체 뭐가 종족신앙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

 

앞에서 얘기했듯이 여기서는 야훼가 가나안의 일곱 종족을 멸절하라고 명령했는지 안 했는지 여부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그 문제는 다음에 따져보고 오늘은 야훼에게 그런 명령을 받았다고 믿었던 이스라엘의 입장과 태도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족을 대량학살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어떤 정신 상태로 그들을 죽였을까요?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가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리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으로도 쉽지 않습니다. 살인의 경험은 사람의 정신과 영혼에 깊은 상흔(傷痕)을 남깁니다. 한 사람을 죽이는 것도 그럴진대 대량학살의 경우는 오죽하겠습니까.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족을 대량학살 했을 때 정상적인 정신 상태가 아니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저는 그들이 제 정신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휘파람 불면서 칼춤 췄을 걸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여러분 중에 이런 생각을 해본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처음 들은 분이 대부분이고 그래서 혼란스러울 겁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을 겁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는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하는 얘기는 대체로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성서 텍스트 상의 근거가 강력하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족을 죽이면서 혼란스러웠을 거라느니 측은한 마음을 가졌으리라느니 하는 얘기는 성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상태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성서 텍스트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추측에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직접적인 근거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종족들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별개의 종족이 아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보면 적어도 물질문명에 관해서는 이스라엘과 가나안 종족 사이에 어떤 의미 있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주거방식도 같았고 도구와 토기들도 똑같았다고 합니다. 구약성서를 제외하고 고고학 연구결과만 놓고 보면 둘은 같은 종족이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한편이 다른 편을 인종청소 하듯이 몰살했다는 얘기는 ‘정말 그랬을까?’ 싶습니다.

 

둘째로, 오늘의 신명기 본문에 나타나 있듯이 가나안 종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성서의 진술은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어느 한 곳에서는 그들을 ‘내쫓으라’고 말하는데 반해 다른 곳에서는 ‘몰살하라’고 말합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내쫓는 것과 몰살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또한 그들의 종교시설을 다 헐어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내쫓든 몰살하든 목적이 뭔지 불분명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그들의 종교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지가 불분명합니다.

 

이렇듯 일관성 없는 서술의 원인이 뭘까요? 그것은 가나안 종족을 몰살하라는 야훼의 명령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척 당황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합니다. 의도적이었는지 아닌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이들은 자기들이 야훼로부터 받은 명령에 얼마나 당혹스러워 했는지를 이런 방식으로 남겨놓았다는 겁니다. 가나안 종족을 모두 몰살하라는 명령은 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걸 그들도 알았지만 그들이 신앙이 종족신앙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답을 찾지 못했던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다음번에는 이런 명령을 이스라엘에게 내린 야훼 하느님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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