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4)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사람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 자손(子孫)에게 포도주(葡萄酒)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命令)은 실행(實行)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先祖)의 명령(命令)을 순종(順從)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부지런히 말하여도 너희는 나를 듣지 아니하도다”(예레미야 35:14).

 

강원도의 한 외진 마을에서 목회를 하며 집 한 채를 지은 일이 있다. 흙과 나무와 돌을 모아 집을 지었다. 벌목을 하는 분이 나무를 전해주었고, 마을 분들은 동네의 집을 수리할 때 나오는 구들장과 창문 등을 전해주었다. 그 모든 것을 모아 마을 어른들과 시간을 잊고 쉬엄쉬엄 지은 집이니 허술하기로 하면 더없이 허술한 집이 되었다. 새집을 헌집처럼 지은 셈이다. 고개를 한참 숙여야 드나들 수 있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잠을 잘 수가 있는, 참 불편한 집이기도 하다.

 

집은 허술하고 불편하지만 이름만은 그럴듯한 이름을 얻었다. ‘인우재’(隣愚齋), 어리석음과 가까워지는 집이라는 뜻이다. 어리석음과 가까워지는 일은 여전히 피해야 할 일일까,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어리석음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 아닐까, 세상이 만들어준 주판을 스스로 버리는데 우리의 희망이 달려 있는 것 아닐까, 세상과 거리를 두고서 불편을 벗 삼아 어리석음을 배우는 자리가 되기를 바랐다.

 

 

 

예레미야 35장에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님과의 약속을 어긴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34장과는 대조적이다.

 

끝까지 약속을 지킨 사람들은 레갑 족속 사람들이었다. 레갑은 열왕기하에 나오는 인물로 북왕국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예후가 사마리아의 바알 신당에서 바알 숭배자들을 없앨 때 함께 있었던 사람이다. 신앙적으로 부패했던 북왕국에서 그래도 바른 신앙을 지켜가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레갑의 후손들을 주님의 집 한 방으로 데리고 가서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고 명하신다. 예레미야는 하난의 아들들의 방에 포도주가 가득한 사발과 잔을 놓고서 그들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권한다.

 

하지만 레갑의 후손들은 어느 누구도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는데, 이는 선조가 남긴 당부 때문이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자신의 자손들에게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명하였던 것이다. 레갑의 후손들은 선조가 남긴 당부를 지키느라 예언자가 권하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던 것이다.

 

요나답이 후손에게 남긴 당부는 포도주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집도 짓지 말라 했고, 곡식의 씨도 뿌리지 말라 했고, 포도원도 재배하지 말라 했고, 평생을 장막에서 살아가라고 했다. 장막에서 산다는 것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삶을 의미한다.

 

요나답이 요구한 것은 더없이 불편한 삶이 아닐 수가 없다. 곡식의 씨를 뿌리지 않고 산다는 것, 포도원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 집을 짓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것은 고단하고, 가난하고, 아무 것도 자신의 앞날을 보장할 것이 없는 위태한 삶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레갑의 후손들은 그런 삶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의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렇게 살라고 명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았지만, 선조가 남긴 말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불편하고 불안한 삶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선조가 남긴 당부를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지키고 있는 레갑 후손들의 모습은 주님 백성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주님께서는 레갑의 후손들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자손은 조상이 내린 명령에 순종해서, 이 날까지 전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은 내가 직접 말하고, 또 거듭하여 말했으나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새번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부지런히 말하여도 너희는 나를 듣지 아니하도다” <개역한글>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개역개정>

 

“그런데 너희는 내가 그렇게도 거듭거듭 일러 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공동번역>

 

“그런데 너희는 어떠냐! 너희 주의를 끌고자 내가 그토록 수고하였는데도, 너희는 계속 나를 무시했다.” <메시지>

 

사람이 남긴 말도 선조의 말이라 하여 성심껏 지키는데, 어찌 내 백성이 내 말을 지키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주님의 말씀 속에는 주님의 실망과 탄식과 책망이 담겨 있지 싶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직접 듣지도 않은 선조의 말도 성실하게 지키는 레갑 자손들을 두고서, 주님께서 직접 말하고 거듭해서 말해도, 부지런히 말해도, 끊임없이 말해도, 거듭거듭 말해도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있으니, 주님 눈에는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부러우신 것 같기도 하다.

 

더없이 불편하고 불안한 선택이었으니 시대가 바뀌고 가치가 바뀌었다며 얼마든지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단 하나 선조가 남긴 명이라는 이유로 묵묵히 따르고 있는 레갑의 후손들 앞에서 주님의 백성들이 보이고 있는 모습은 가볍고 어처구니가 없어 보인다.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세상 사람들이 지켜가는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깃털보다 가벼운 것! 아무리 주님이 직접, 거듭, 부지런히, 끊임없이 말씀하셔도 듣지를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중요해 보이는 말과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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