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52)

 

회의와 신앙 사이에서

 

지극히 높은 신성은 겸손이라는 심연 이외의

모든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1970년대 내가 다니던 신학대학 화장실에 이런 낙서가 적혀 있었다.

 

“신은 죽었다―니체”

 

그 밑에는 이런 낙서가 이어졌다.

 

“니체는 죽었다―신”

 

회의와 신앙 사이에서 고뇌하던 어떤 신학도들은 이런 낙서조차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어떻게 그런 불경스런 농담을 지껄일 수 있느냐는 ‘확신파’도 있었지만!

 

 

하여간 인간이 존속하는 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생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절감하는 것이지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이 우리의 생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시는가를 묻는, 소위 신의 부재(不在)에 대한 의문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광활한 어둠’이며 ‘숨어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당신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이 ‘나는 당신을 찾았습니다.’라고 하나님을 다 아는 체하는 교만보다 더 건강한 신앙적 태도가 아닐까.

 

회의를 거치지 않은 신앙적 태도는 얕고, 모름을 긍정하지 않는 신앙은 깊이가 부족하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인식에만 머무르는 ‘앎’은 우리를 아주 왜소하게 만들고,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것에 대해 ‘모름’을 머금은 채 나아가는 앎은 우리의 왜소한 자아를 넘어설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하지만 오만한 지성은 그 알량한 ‘앎’의 희열만 알았지 ‘모름’의 희열은 모른다. 즉 ‘모름’을 머금은 ‘앎’의 희열을 모른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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