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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설교비평 모음

옥한흠 목사의 ‘비판하지 말라’는 설교에 대해

by 한종호 2016. 5. 13.

설교비평 모음(4)

 

옥한흠 목사의 ‘비판하지 말라’는 설교에 대해

 

 

편집자 주/예전에 옥한흠 목사의 ‘비판하지 말라’는 설교는 성서의 ‘비판하지 말라’는 대목에 대한 이해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설교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옥한흠 목사는 마태복음의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의미와는 동떨어진 각도에서 자신의 설교를 구성하고 전개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의 대목은 교회 내에서 교권적 권위 방어를 위해 비판적 발언을 봉쇄시키려는 자의적 목적으로 자주 등장시키는 수가 많다는 점에서, 본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긴요하다.

 

옥한흠 목사가 이 설교를 통해서 강조하고자 했던 바가, 비판이라는 명목 아래 날이 선 말로 형제들의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일 터이다. 그리고 그러한 측면의 강조가 분명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유형의 비판이라도 그 비판의 봉쇄를 통해서 기득권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동기가 저간의 중심에 깔려 있다면 이것은 ‘언제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메시지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성서의 본래적 의미를 바로 아는 일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비판의 진정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게 하고 모두 뭉뚱그려 비난의 계열에 분류해 버리는 오류를 낳음으로써 ‘교권적 질서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을 유도하거나 강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다.

 

 

‘비판하지 말라’는 율법주의적 정죄에 대한 비판

 

마태복음 본문의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율법주의적 정죄 내지는 상대의 속 깊은 사정에 대하여 사려 깊이 헤아리지 않은 일방적, 단정적 심판에 대한 경계’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율법주의적 정죄를 앞세워 교권적 지배를 꾀하였던 당대의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과감한 공격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논리에 뭇 백성들이 자기도 모르게 세뇌되거나 따라가지 말라고 일깨우시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율법주의적 정죄론에 사회가 휘말리면, 너나 할 것 없이 그 논리에 희생당하고 서로에 대한 정죄주의적 추궁과 일방적 심판이 횡행하여 살벌해지는 것을 꿰뚫어 보신 것이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변호 과정도 바로 이러한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죄 없음에 대한 자신이 있다면, 혹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못한 처지에서 자신의 의를 절대화하는 율법주의적 단죄 또는 심판은 택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렇게 자신의 불의에 대한 청산 작업은 전혀 하지 않고 타자의 사소한 잘못을 과장하여 정죄의 자리에 세우려는 율법주의적 자세를 겨냥하신 말씀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오늘날 현대적 의미에서의 이성적 비판 작업의 중단 내지 금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아픔이나 사연을 도외시한 채 자기 의를 절대적인 우위에 놓는 율법주의적 사고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면 이 율법주의적 정죄관을 극복하는 자리에서 가능해지는 비판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이것이 분명해져야 우리는 율법주의적 심판과, 건강한 비판 의식의 육성을 가려낼 수 있으며 그로써 이 성서의 대목이 교권적 방어를 위해 본의에 맞지 않게 동원되는 오류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함부로 타인의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주는 행위는 마땅히 배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특히 신앙공동체를 멍들게 하고 병에 걸리게 하며 신앙으로 한 형제 자매 된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파괴하고 만다는 점에서도 강력하고 분명하게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열매로 충만한 사람이 그 입으로 타인의 마음과 영혼의 살을 도려내고 아프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비판을 통해 상대를 죽이는 것은 음해

 

옥한흠 목사의 비판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이 그의 설교에서 나타나고 있다.

 

“저는 왜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인 우리를 보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하는 것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판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 형제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서 험담하거나 공격하는 언어의 폭력입니다. 이게 비판이에요. 자기 안경을 쓰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비판이요, 자기의 자로 다른 사람을 재면서 길다 짧다 늘어놓는 것이 비판이지요. 물론 여러분, 비판 중에는 건전한 비판도 있습니다.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해서 아예 비판 의식을 모두 정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가 잘못되어 가면 건전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교회가 바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한국 교회가 조금이라도 부패하고 세속화되어 간다면 우리는 이런 교회를 가슴에 안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비판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뭐냐? 교회 안에서 형제끼리,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용납하지 못해 말을 가지고 형제들을 상처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그러면서 옥한흠 목사는 비판의 바리새적 문제에 대하여 정확하게 정리해내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내세우는 의가 뭡니까? 다른 사람 죽이고 자기가 사는 의요. 그렇지요. 다른 사람 까뭉개고 자기가 의로워지는 것이 바리새인의 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님을 섬긴다는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행동하면 안 되는 거요. 우리에겐 더 나은 의가 필요해요. 더 나은 의가 뭡니까?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의입니다. 나를 죽이고 형제를 높이는 의요.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 되기를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교회 안의 형제가 아니에요. 세상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은 우리가 영적으로 비판할 수 있어요.”

 

비판을 통해서 자기를 내세우고 상대를 죽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비판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음해이자 악의적 공격이며 분열주의적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옥한흠 목사가 경계하고 있는 비판은 그런 점에서 타당하다. 하지만 그가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이 영적 기준에 의해 비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여전히 영적 판단의 여지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시 말해서 영적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에게는 그렇지 못한 세상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앙공동체 내부로 비판의 화살을 돌리지는 말 것이나, 그것이 신앙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향해 쏘아질 때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가 비판의 정의를 매우 이중적으로 또는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즉, 세상 사람에 대한 비판은 그가 내린 비판의 정의대로 상대가 세상 사람이기 때문에, 신앙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허물과 약점을 들추어 상처 내는 일은 괜찮다고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신앙인의 세상 사람에 대한 비판은 세상 사람들의 허물과 약점을 고쳐서 바로 잡아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니 그것은 상처인 것 같지만 상처 내는 일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만일 비판이라는 것이 옥 목사의 정의대로, 형제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내서 험담하거나 공격하는 언어폭력이라면, 그것은 신앙공동체 내부에서나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나 그 어떤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생명을 바로 세우는 비판, 언어폭력으로서의 비난

 

그런데 그는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의 비판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니, 그때의 비판은 이러한 언어폭력으로서의 비판이 아니라 건전한 영적 비판 행위를 의미하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언어폭력의 성격을 지닌 비판을 세상 사람을 겨냥해서 해도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면 그의 설교는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말하자면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의 허물을 공격하고 상처를 주어도 되는 자격과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 셈이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독선과 오만이요 자기의 영적 기준을 절대화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옥 목사의 의도를 선하게 받아들여 세상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신앙적 기준에 맞추어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요,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비판은 형제에 대한 언어 폭력적 공격이라고 구별해서 이해한다면 문제는 없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신앙적 기준에 맞춘 비판은 인정되고 있음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은 옥 목사가 언급한 건전한 비판의 범주에 포함시켜도 될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바는 그가 말하듯이 누구의 허물과 약점을 들추어 그를 괴롭게 하는 일을 즐기거나 그래서 자기는 살고 상대는 죽이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언어를 통한 폭력적 공세는 비난이지, 건강한 비판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도 비판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특히 교회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이니 교회 안에서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여 “내가 비판받지 않기를 원하거든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 안 하면 자기도 비판 안 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의 이런 것 저런 것 가지고 손가락을 헤아리면서 입으로 쪼아대면 쪼아대는 것만큼 너도 다른 사람의 입에 비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판받기를 원치 않으면 먼저 내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돼요”라고 말하고 있다.

 

옥 목사의 말대로 누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문제 삼고 추궁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비판이 언어폭력으로서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악의적 동기를 가진 것이라면 그러한 비판은 마땅히 배격해야 옳다. 그러나 비판이 영적 기준에 의해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 상대를 살리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영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짓밟는 것들이다. 그것마저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면 그것은 그의 말대로 ‘생명이 떠난 교회’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그가 말한 언어폭력으로서의 비판은 신앙적 삶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폭력으로서의 비판의 범주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지향하는 비판까지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교회의 생명에 대한 도전이요 그 생명에 대한 폭력이 된다. 성도끼리 아귀다툼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음해와 비난과 험담을 하며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당연히 중단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불의한 일이 일어나고 그것이 특히 교권적 지위를 가진 사람에 의해 저질러졌을 때에도 침묵하고 그대로 넘어간다면, 그것은 영적 비판의 능력을 상실해버린, 그래서 예언의 능력이 죽은 교회가 된다. 개신교의 출발이 중세 교회의 불의에 대한 영적 비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망각하지 않는다면 교권적 불의마저 침묵의 대상으로 삼고 그로써 진정 교회를 바로 살릴 비판의 목소리마저 묵살하거나 봉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모독하는 일이요, 병들도록 내버려두는 일이자 성도들의 영적 안목을 가리고 그 영혼을 신음하게 하는 일이다.

 

교권적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

 

옥 목사는 “1-2년 전에 서울에 있는 큰 교회 유명한 목사님이 여러 가지 스캔들에 말려서 굉장히 고역을 치른 일이 있습니다”라면서, 특정한 목사를 변호하는 발언을 그의 설교에 담는다.

 

“신문에 가끔 보도가 되고 텔레비전에까지 야단법석을 치고 그 다음에는 기독교의 평신도 단체들이 비난의 성명을 발표하고, 심지어는 그 목사님이 법정에까지 서고, 그야말로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나오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 대부분은 그 내용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그 목사님을 좋게 보지 않았어요. 그리고 심지어 목회자 가운데는 그 목사님의 목회 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즈음에 목사님 몇 분이 모이는 모임에 참석할 일이 있었어요. 제 옆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님이 앉아 계셨는데 식사를 하다가 저보고 이런 말을 해요. ‘아, 요사이 자주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 목사님 정말 안타까운데 참 야단이다’라고 하면서 자기가 우연히 그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일부러 떠봤대요. ‘아니, 그런 말들을 듣고 있는 목사님인데 교회를 계속 나가느냐’고 물었대요. 나간대요. 설교가 귀에 들어오느냐고 물었대요. 들어온대요. 그러더니 그분이 목사님을 향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는요, 우리 교회 목사님 신뢰해요. 소문대로 나쁜 짓을 할 분이 아니란 걸 잘 알아요. 설혹 한두 가지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꼭 교회를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흠이 없는 목사가 있어요? 목사님은 흠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서 그 목사님이 감동을 받았대요. 아! 이런 교인이 있기에 그 교회가 살아 있구나.”

 

이어지는 설교에서 옥 목사는 목회자의 비리를 비판하지 않고 감싸 안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에 ‘그 교회가 지금 부흥하고 있다’며 얼마 전에는 ‘한 주에 세례를 1천명을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언급한다.

 

옥 목사의 설교 전체의 흐름으로 비추어보면, 그 목사에 대한 비판은 성서의 뜻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며 교회 안에 속한 형제를 아프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 된다. 과연 그런가?

 

그 목사의 잘못에 대한 지적과 비판이 바로 서지 않아 교회의 위신은 추락했고 교회의 영적 권위는 손상 받았으며 그로 인해 무수한 신앙인들의 마음과 영혼이 상처 입은 것을 옥한흠 목사는 어떻게 정리해낼 것인가?

 

그의 말대로 “이 세상은 너무 잔인합니다. 날마다 혀에서 나오는 말 몇 마디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형제를 서로 감싸고 함께 아픔과 슬픔을 나누면서 서로 위해주는 것이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를 비판하고 헐뜯는 거친 돌이 되지 않도록, 쓴 뿌리가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항상 돌아보면서 말씀으로 바로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가 불의를 그대로 용납하고 그것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묵인하도록 하라는 논리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언어폭력이 난무하고 비판과 비난이 혼동되고 있는 이 시대에, 위로와 용서 그리고 사랑의 언어는 그야말로 갈급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교권적 지위를 앞세워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교회를 병들게 하는 일에 대한 의의 육성이 바로 서지 않으면, 교회는 세상을 향한 진정한 영적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될 것이다. 영적 각성의 뜨거운 육성이 들리지 않는 교회는 옥 목사의 말대로 이미 생명이 떠난 교회가 되지 않겠는가? 부디 영적 비판의 육성마저 언어폭력으로서의 비판의 개념에 집어넣어 하나님의 의가 침묵 당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깨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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