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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하느님이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by 한종호 2016. 5. 15.

구약성서의 대량학살(5)

 

하느님이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여호수아 10:1-15

 

만일 정말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하느님이 이 사람을 죽이라고 했다. 난 그렇게 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고 주장한다면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하느님께서 내게 이러저러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지만 하느님이 남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실 리 없다고 생각하지요? 현대사회에선 국가가 사법권을 갖고 있습니다. 종교적 신념조차 법률의 판단을 받지요. 그러니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신념이 있다고 해도 사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신념이 존중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 십상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그랬을까요? 그때 거기서도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믿음이 행위에 대한 평가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누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그걸 상당히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게 사실입니다. 적어도 ‘정신병자’ 취급은 안 받았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보냄을 받았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예언자라고, 하느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하는 사람 치고 하느님의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했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텐데 뭘 보고 그의 진정 하느님의 예언자인지 구별하겠는가 말입니다. 신명기와 예레미야서에는 진짜 예언자와 가짜 예언자를 판별하는 기준이 나옵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당신들이 쫓아낼 민족들은 점쟁이나 복술가들의 이야기를 듣지만 주 당신들의 하느님은 당신들에게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주 당신들의 하느님은 당신들의 동족 가운데서 나(모세)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당신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당신들이 호렙 산에서 총회를 가진 날에 주 당신들의 하느님께 청한 일입니다. 그 때에 당신들이 말하기를 '주 우리 하느님의 소리를 다시는 듣지 않게 하여 주시며 무서운 큰 불도 보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하였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한 말이 옳다. 나는 그들의 동족 가운데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는 내가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다 일러줄 것이다. 그가 내 이름으로 말할 때에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벌을 줄 것이다. 또 내가 말하라고 하지 않은 것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그것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겠느냐고 말하겠지만 예언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말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제멋대로 말하는 그런 예언자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신명기 18:14-22).

 

긴 얘기를 짧게 줄이면, 참 예언자는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그의 입에 담아준 사람이고, 거짓 예언자는 야훼께서 당신 말씀을 입에 담아주지도 않았는데 자기 마음대로 말하거나 다른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예언자가 한 말이 야훼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려면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명기 18장이 말하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판별하는 기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야훼의 이름으로 말하는지 다른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지 여부, 둘째로 야훼께서 그의 입에 담아준 말씀을 전하는지 아니면 자기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말하는지 여부, 셋째로 그가 한 말이 성취되는지 여부가 그것입니다.

 

이것 이외에 대표적인 구절이 예레미야 23장입니다. 좀 길지만 예언자를 분별하는 데 관한 대목을 인용해봅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예언을 듣지 말아라. 그들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고 있다. 그들은 나 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할 뿐이다. 그들은 나 주의 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도 말하기를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한다.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도 ‘너희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서 누가 나 주의 회의에 들어와서 나를 보았느냐? 누가 나의 말을 들었느냐?… 이런 예언자들은 내가 보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달려 나갔으며 내가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예언을 하였다. 그들이 나의 회의에 들어왔다면 내 백성에게 나의 말을 들려주어서 내 백성을 악한 생활과 악한 행실에서 돌아서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들이 있다. ‘내가 꿈에 보았다! 내가 꿈에 계시를 받았다!’ 하고 주장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이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거짓으로 예언을 하겠으며 언제까지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 예언을 하겠느냐? 그들은 조상이 바알을 섬기며 내 이름을 잊었듯이 서로 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잊어버리도록 계략을 꾸미고 있다. 꿈을 꾼 예언자가 꿈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말을 받은 예언자는 충실하게 내 말만 전하여라…. 그러므로 보아라, 내 말을 도둑질이나 하는 이런 예언자들을 내가 대적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제멋대로 혀를 놀리는 예언자들을, 내가 대적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허황된 꿈들을 예언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내가 대적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들은 거짓말과 허풍으로 내 백성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하는 자들이다. 나는 절대로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으며 그들에게 예언을 하라고 명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런 유익도 끼칠 수 없는 자들이다. 나 주의 말이다.”(16-32절)

 

 

요약하면, 거짓 예언자는 첫째로 야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하는 자, 둘째로 야훼 하느님의 회의(council)에 들어와 보지 못한 자, 셋째로 야훼에게 보냄을 받지 않은 자, 넷째로 꿈에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자, 다섯째로 야훼의 말씀을 도적질하는 자라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상당히 격식을 갖춘 기준이 되겠습니까? 언뜻 보면 그래 보입니다. 하지만 이 기준의 문제는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본인 이외에 제삼자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기준이라는 데 있습니다. 예언자임을 주장하는 자가 한 말이 야훼의 입에서 나왔는지 자기 맘대로 말하는지 누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야훼의 회의에 들어가 봤는지, 그가 야훼에게 보냄을 받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제삼자에게는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본문은 꿈은 계시의 전달 수단이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야곱 같은 사람은 꿈에 하느님의 계시를 받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점들을 고려해보면 신명기와 예레미야가 제시하는 참 예언자과 거짓 예언자의 기준은 객관적,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게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얘기가 곁길로 많이 갔습니다. 하느님의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 보편적인 윤리기준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진 신학에 부합한다면 그가 참 예언자임을 비교적 쉽게 판단할 수 있었을 겁니다. 곧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계명에 부합하는 말을 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보냄을 받았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윤리이거나 이스라엘 안에서 오랫동안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져 온 가르침이므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의심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보편윤리나 하느님의 뜻으로 여겨져 왔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거나 그것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내용을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정말 그가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물론 하느님이 그것들과는 다른 내용을 전하라고 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많은 경우에 ‘상식’에 어긋나는 분이기도 하므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요? 쉽지 않습니다. 대량학살의 경우가 여기에 속합니다.

 

 

보편윤리가 늘 옳지는 않다

 

보편윤리나 오랫동안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가르침이라도 예외 없이 늘 옳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거짓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은 보편윤리에서나 성서의 전통에서나 모두 옳지만 상황에 따라서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2차 대전 중에 나치군인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유대인을 색출하고 있었습니다. 찾으면 수용소로 보내서 결국 죽이려는 겁니다. 우리 집에 유대인 어린아이 하나가 숨어 있었는데 나치군인이 우리 집에 와서 “여기 유대인 없어?”라고 물었다고 칩니다. 이때 없다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사실대로 있다고 말해야 합니까?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하는 게 되고 있다고 말하면 유대인 어린이는 죽을 겁니다. 어떻게 하는 게 옳습니까? 대답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은 거짓말보다는 살인이 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떻습니까? 얼마 전 한국에서 어떤 국가고시 필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면접에서 국정교과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게 옳지 않다고 말했다가는 십중팔구 불합격할 텐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정교과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해서 불합격하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너희들 속셈이 뭔지 잘 아니까 내가 이번엔 거짓말하지만 나중에 두고 보자. 내가 반드시 바로잡으리라.’라고 다짐하며 “국정교과서,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해야 할까요? 알쏭달쏭하지요? 앞에서 얘기한 유대인 어린아이의 경우보다는 더 결정하기 어렵지요?

 

911 사태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칩시다. 비행기를 탈취한 테러범이 대량살상을 저지르려 한다면 그 비행기를 격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거기에 많은 어린이들이 타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영화에서는 비행기를 격추하기 전에 어디선가 영웅이 나타나서 테러범을 소탕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듯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굳이 하느님을 결부시키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성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이 대량학살을 직접 명령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직접 하느님이 대량살상을 저지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얘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하느님이 그런 무자비한 명령을 내렸을 리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주류에 속한 구약성서 학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그런 무지막지한 명령을 내렸을 리 없고 또 실제로 대량학살이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왜 성서는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고 이스라엘은 그걸 수행했다고 말할까요? 이에 대해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잘못 알았고 잘못 믿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오해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믿고 행했다는 겁니다. 하느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닌데 그렇게 오해했다는 것이지요.

 

이 대답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대량학살의 경우에만 하느님을 잘못 믿은 것이 아니라 그게 그 시대의 한계였다고 지난 글에서 얘기했습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종족의 신앙은 종족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것을 ‘종족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 개념은 제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종교학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온 말입니다. 다만 구약성서의 종교에 이 개념을 적용한 학자는 많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의 종교를 종족신앙으로 보는 것이 그걸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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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이스라엘이 면책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대량학살(정말 저질렀다면)은 분명히 잘못됐습니다. 그냥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죄악이죠. 이스라엘도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저는 그들도 혼란스러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문제라고 느꼈다는 얘기입니다. 옳지 않다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게 야훼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들의 사고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더 곤혹스러웠을 겁니다. 하느님과 ‘정의’의 문제를 두고 한판 맞장을 떴던 욥이 등장하려면 수백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가나안 종족을 멸절하라는 야훼의 명령과, 그들과 비슷한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웃인 가나안 종족들을 어떻게 멸절할 수 있겠냐고 하는 보편윤리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갈등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여럿 남아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다뤘던 역대기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아온 에돔 군인 일만 명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죽인 얘기와 다윗이 전쟁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려서 성전을 지을 수 없었다는 얘기는 그들이 가나안 종족을 죽이는 문제를 두고 얼마나 깊이 고뇌했는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의 본문인 여호수아 10장도 비슷한 예입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고 평화조약을 맺은 기브온 주민 얘기가 나옵니다. 기브온은 가나안의 일곱 종족 중 하나인 히위 족속에 속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가나안 종속의 일원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을 멸절했어야 했는데 그들은 여호수아를 속여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과정이 여호수아 9장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기브온 주민들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와 아이 성을 멸절시켰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자기들도 죽게 됐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으려고 꾀를 냈습니다. 거지꼴로 이스라엘을 찾아가서 자기들은 먼 곳에서 왔다면서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안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행색을 보아하니 먼 곳에서 온 것 같지 않아서 의심했지만 이들이 자기들을 믿고 종으로 삼아달라고 말합니다. 이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에게 묻지도 않고 이들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됐지만 이미 조약을 맺고 맹세했기 때문에 무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10장은 가나안 종족들이 소문을 듣고 기브온에 쳐들어왔다고 이에 이스라엘이 기브온 주민을 도와 싸웠다고 전합니다.

 

이 에피소드가 뭘 보여줍니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나안 종족을 모조리 죽이라는 야훼의 명령은 처음부터 지켜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안 그렇습니까? 기브온 주민은 문명 가나안 종족의 일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습니다. 더욱이 이게 유일한 예외도 아입니다.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에 이와 비슷한 얘기들, 곧 가나안 종족들을 멸절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은 예외적인 경우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걸 다 찾아 읽을 시간이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지난번에 얘기한 대로 가나안 종족을 ‘내쫓으라’는 명령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쫓아내든 죽이든 둘 중 하나를 해야지, 둘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보다 먼저 가나안에 들어가서 거기 사는 종족들을 다 몰아내겠다고 말씀했다고도 전합니다. 이런 모순과 불일치에서 우리는 가나안 종족들을 멸절하라는 명령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고뇌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더 큰 문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그렇다고 말하면 그대로 일어났다고 믿습니다. 성서가 이집트의 장자들을 몰살했다고 말하면 그렇게 믿고, 하느님이 가나안의 일곱 종족을 몰살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하면 그렇게 믿으라는 겁니다. 대량학살을 명령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상당히 많습니다. 모호하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명명백백하게 말하는데 어떻게 그걸 의심하냐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도 야훼의 명령이 무자비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그렇게 명령했다면 거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어린아이들까지 모조리 죽이라고, 숨 쉬는 것은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성서에 적혀 있는 대로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들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 저지르면 안 되는 막중한 범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렇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고 동서양이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살인 금지가 모두 마찬가지로 보편윤리에 속하지만 유아살인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살인에 정상이 참작되는 경우가 있지만 유아살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도 어린이를 우선적으로 살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서대로라면 야훼는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죽이라는 무자비한 신이 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 저질러서는 안 될 범죄행위를 명령한 신이 되는 겁니다. 하느님이 이런 신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그럴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물론 하느님이 하시는 일 중에는 사람이 알 수도 없고 이해할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을 몰살하는 행위에 대해 이해해야 할 뭔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 나은 선을 위해서 어린아이들을 죽였다?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이 왜 그런지 설명을 해주셨어야 하지 않을까요?

 

둘째, 살인은 죽는 사람뿐 아니라 죽이는 사람에게도 엄청난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첫 번째 글에서 얘기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살인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얘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종족을 대량학살 하라고 명령했다면 이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정신과 영혼에 엄청난 상처를 준 셈입니다. 그게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에게 하느님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까? 만일 그럴 줄 몰랐다면 그런 하느님을 우리가 믿고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의 정신과 영혼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줘가면서 다른 종족을 몰살하라고 명령하는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가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바른 신앙은 무균실 안에 안전하게 있는 게 아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왜 가나안 종족을 죽이라고 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성서는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하는데 신명기 20장 16-18절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느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신 땅에 있는 성읍을 점령하였을 때에는 숨 쉬는 것은 하나도 살려 두면 안 됩니다. 곧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은 주 당신들의 하느님이 당신들에게 명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는 온갖 역겨운 일을 당신들에게 가르쳐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느님께 죄를 짓게 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을 몰살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고 온갖 역겨운 일들을 그들에게 배워서 죄를 지을 터이니 모조리 죽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종족은 일종의 ‘전염병’ 같은 존재로 여깁니다. 같이 있으면 몹쓸 병이 전염되니까 없애버리라는 겁니다.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웬만한 병은 스스로 극복합니다. 저는 이 얘기를 읽을 때마다 ‘그럼 야훼 신앙은 가나안 종족의 신앙보다 약하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야훼 신앙이 얼마나 연약하면 가나안 종족의 신앙은 접촉도 하지 말라고 했는가 말입니다. 가나안 종족의 신앙이 악하다면 올바른 야훼 신앙으로 그걸 극복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굳이 그들을 내쫓거나 죽여야 하는가 말입니다. 악은 악으로 갚는 게 아니라 선으로 악을 극복해야 한다면 가나안 종족을 몰살하는 게 결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닐 겁니다.

 

올바른 신앙이 뭔지를 생각해봅니다. 이른바 악한 것들을 다 없애버리고, 다 쫓아내거나 죽여 버리고 무균실 같은 데서 고고하게 사는 게 좋은 신앙일까요? 바른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은 속세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야 할까요? 더럽고 때 묻은 세상에서 존속할 수 없는 신앙이 올바른 신앙일까요?

예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뭔가를 얘기하셨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가 거기에 초막을 짓고 살자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산 아래에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더럽기 때문에 거기에 살면 내가 더러워진다고 해도 거기 ‘사람’들이 있으니 그리로 내려와야 했던 겁니다.

 

좋은 종교가 뭘까요? 올바른 신앙이 뭡니까? 더럽고 추한 것 모두 없애버리고 세상을 무균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은 절대 무균실이 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예수의 제자는 자신이 더러워지는 걸 감수하고 세상에 들어가서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세상과 사람들을 정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의롭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더러 가나안 종족들을 멸절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조건 잘못 믿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믿었든 그것과 상관없이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은 그런 명령을 주실 리 없습니다. 다음번에는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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