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救援)의 지평, 기어서 넘기

- 김기석 목사의 《아슬아슬한 희망》 -

 

 

가을의 끝자락, 초겨울의 문턱에서 김기석 목사의 열 번째 책 《아슬아슬한 희망》을 만났다. 꽃들은커녕 곱게 단풍이 든 나뭇잎들에게조차 암담한 계절, 이제는 추운 바람과 눈서리 겪는 일만 남은 계절에, 이 책은 ‘아슬아슬’하게 우리에게 왔다. 이기적으로 저만 챙기게 태어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신학을 하면서 겨우겨우 애써가며 배워온 것들을, 김기석 목사는 그냥 ‘타고난’ 것 같다. 조개 잡고 갈매기 쫓으며 팔랑팔랑 뛰어다니느라 바닥 볼 일 없이 바빴던 어린 시절 나의 개펄에의 추억이 무색하게도, 그는 어려서부터 시선을 바닥에, 땅에 두며 살았다. “온 몸으로 바닥을 기어가는 것들에 대한 이상한 연민”(12쪽)이 있었다 한다. 개펄에 난 게의 흔적, 신작로에 남겨진 지렁이가 기어간 길, 그 흔적들이 말해주고 있는 작은 생명체들의 삶에의 몸부림이 애처롭고 처연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보다. 김기석 목사는 이 책 가득히 ‘포월(匍越, 기어서 넘기)’의 삶을 사는, 살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득 담았다. 땅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의 구원의 발걸음은 초월(超越)이 아니라 포월(匍越)이라고, 김 목사는 고백한다.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을” 늘 슬픔으로 지켜본 ‘땅의 사람’이라서, 그러나 한편으로 “하늘을 말하지 않고는 땅의 희망을 말하기 어려웠던” 신앙인이요 목회자였기에(13쪽), 그는 결국 이 땅의 삶을 하루씩 ‘기어서’ 하늘에 닿자고 우리를 초대한다. 기어서 넘기가 어디 만만한가? 에녹이, 엘리야가 하늘로 들려 올라가듯 천군천사가 양팔 잡고 병거 타고 훨훨 날아,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훌쩍 뛰어넘는 구원을 성취하자고 말해야 그나마 솔깃할 세상에서, 그는 ‘기어서 넘는’ 구원으로, 천천히 하루씩 성실히 일상을 살아내는 그 어려운 길로, 기어이 우리를 이끈다.

 

  

그도 안다. 기어서 넘기가 얼마나 고단한지, 얼마나 위태로운지, 얼마나 어려운지. ‘기어서 넘기’에 이 세상은 또 얼마나 악한지. 그래서 그는 하루하루의 삶을 열심히 ‘기어’ 버텼으나 끝내 ‘넘지’ 못한 인생들을 안타까이 기억한다. “일그러진 자본”의 악한 모습이 앗아간 생명, 태안군 의향리 어민 이영권 씨(114쪽), 팽목항에서 “돌아올, 아니 돌아와야만 할 자식의 젖은 몸을 덮어주려고 담요를 든 채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피에타들”(215쪽), 미움도 분노도 없이 오히려 “죄송합니다” 공손히 글을 남기고 스러진 송파구 세 모녀의 생명!(207쪽)

 

성경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뽐내고, 교만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무정하고, 원한을 풀지 않으며, 비방하고, 절제가 없고, 난폭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을 말세의 징조라고 말한다. 어느 것 하나 우리 시대를 비껴가는 것이 없다. 우리는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58쪽)

 

그래서 그는 마냥 서정적인 아름다운 에세이를 쓸 수 없었다. 하늘의 희망을 품고 성실히 땅을 ‘기어’ 살아가던 민초들이 끝내 ‘넘지’ 못하고 죽어가는 오늘의 현실 앞에서 신앙인이요 목회자인 그는 저 슬프고 아픈 이름들을 새기며 그 이름들을 “자기 확장 욕망에 사로잡힌 교회[와 사회]에 대한 기소장”으로 읽어낸다.(211쪽) 그래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그의 언어들은, 한편으로는 날카롭고 아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는 그의 목표는, 그의 꿈은, 그의 소망은 “우리 현실 속에 하늘의 빛을 끌어들이고 싶은”(13쪽) 것이었으니까.

 

가당키나 한가? ‘우리 현실’이 지금 어떠한데? 꿈을 꾸어야하는 청춘조차 ‘너머’의 세계를 그리는, 그리워하는 것이 사치라고 말하는 시절 아니던가. 시인의 언어를, 예언자의 소리를 들려줘도, 그런 것들은 ‘정규직’이 되는 일에도 돈을 버는 일에도 쓸모가 없다며 들으려하지 않는 시절인데, 언감생심 오늘 이 자리에 ‘하늘의 빛’을 끌어오겠다니!

 

눈물이 났다. 실은 나도 그런 어이없는 꿈을 꾸는 사람이라서, 그럼에도 현실의 힘에 눌려 가끔 그 꿈을, 그 희망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불쑥불쑥 찾아옴을 경험하기에…. 하지만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며 나는 새삼 감사했다. 하나님 나라, 인간이 내는 견적으로는 도저히 이 땅에 도래할 것 같지 않은 그 ‘동아리’에서, 묵묵히 앞서가는 선배(先輩)의 뒷모습을, 발자국을 발견한 기쁨 때문이었다. 이 책은 ‘관계의 그물망’이다. 혼자서는 어림없는, 혼자 하다 자꾸 손을 놓아버리고 싶은 이 외로운 싸움에서 “우리가 허무의 물결에 실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지켜주는”(137쪽) 따듯하고 탄탄한 그물망이다.

 

또한 정화된 영혼으로 숱한 제자들과 순례자들의 발길을 닿게 했던 베네딕도의 동굴처럼(146쪽), 문풍지가 되어 겨울바람을 막아내고 계셨던 어머니처럼(274쪽), 익지 못한 감 열매도 채 자라지 못한 참외조차도 버리지 않고 살뜰히 챙기신 아버지처럼(117쪽), ‘기어 넘는’ 우리 인생이 품은 ‘아슬아슬한 희망’에 버팀목으로 연대하려는 몸짓이다.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근원 앞에서 홀로 앉도록” 초청하고, 그 힘으로 마주 앉고, 둘러앉음으로, 모든 생명이 “비스듬히 기댄 채 살아가는”(78쪽) 것이 필요하다고, 가능하다고 외치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희망은 낙관적 전망이 아니라, 기어코 살아내기 위한 안간힘”(66쪽)이기에 그것은 누구도 대신 못할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의 일상 가운데 치열하게 성실하게 살아내며 만들어갈, 우리의 몫이다. 바람타고 날아와 예배당 뒤편 흙 둔덕에서 피어났으나 하얀 뿌리를 드러내고 아슬아슬 생명을 버텨내는 위태로운 소나무의 모습이 안타까워 대나무를 잘라 울타리를 만들고 흙을 덮어주고 날마다 물을 주며, 그 소나무 이름을 “아슬아슬한 희망”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한 후배 목회자의 이야기를 전하며(65-66쪽) 김기석 목사는 말한다.

 

희망은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완제품이 아니라 삶으로 구현해야 할 과제이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깨어나 안녕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아슬아슬한 희망’을 붙잡고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보인다. 그들은 저항과 연대와 연민을 통해 역사의 봄을 선구한다.(67쪽)

 

자본의 지배를 약화시키는 힘은 협동과 섬김과 돌봄과 비움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이들”에게서 나온다. 그 수가 적어도, “바늘로 우물을 파는 것” 같더라도(98쪽), 희망하기를 그치지 않는 한 우리의 일상은, 인생은 가능성이다. 이상주의라고? 그 꿈으로 치자면 성서의 인물들만 할까? 김 목사도 말하듯이 성서에는 전쟁의 한 중간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꿈,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노는 세상을 꿈꾸었다.(193쪽) 예수의 꿈은 어떤가? 삶과 죽음의 매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도래케 하는, 하나님 나라 통치 질서를 이 땅에 오게 하려는 꿈을 꾸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인은 꿈꾸는 자들이다. 그리고 꿈대로 사는 자들이다.

 

때문에, 김기석 목사는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순천(順天)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모두가 발을 맞추어 행진하는 대열에서 벗어나 딴 길로 가는 이가 있다면 그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대는 세상의 북소리가 아닌 하늘의 북소리를 듣는 이들을 부르고 있다. 굳게 붙잡고 있던 욕망의 바위를 놓고 흐름을 타고 살아가는 순천(順天)의 사람들이야말로 새 시대의 주역이다.(29쪽)

 

결국은 한 걸음씩이다. 기던 걷던, 단 하루도 건너뛰고 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하여 일상에서 하늘의 빛을 담아내지 못하고서 구원은 없다. 그래서 김기석 목사는 말한다.

 

삶이란 오늘의 점철이다. 오늘이라는 점들이 모여 우리 삶의 풍경을 이룬다. 점 하나를 바로 찍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도 정성껏 살아내야 한다.(70쪽)

 

그 성실성으로 김기석 목사는 익명성의 거대 공간 도시 한가운데서 순간순간 스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진심으로 마주하며 ‘화살기도’를 날린다.

 

“저 학생의 가슴 속에 하늘의 따뜻한 기운과 생기를 불어넣어 주십시오.” “저 아름다운 헌신을 기억해주시고 부디 건강 잃지 않게 지켜주십시오.” “저 가슴에 깃든 어둠이 있다면 그것을 빛으로 바꿔주십시오.” “저 할머니의 느린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사랑의 샘이 솟아나게 해주십시오.” 시인의 화살기도는 타자를 함부로 대하고 생명을 유린하는 이들을 향해서도 멈추지 않는다. “저분들도 생명의 신비에 눈뜨게 해주십시오.”(21-25쪽)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다. 그들조차도 그리스도는 문을 두드리시며 들어가길 원하시는 기적 같은 생명 아닌가.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지 않았나!

 

김기석 목사는 평화주의자다. 평화주의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와 나의 ‘선배’이신 예수께서 그러하셨으니… 그러나 그 평화가 땅의 권세가들과의 공모나 묵인으로 오는 상태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아는 진정한 평화주의자이다. 하여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한 멕시코 혁명가의 결기는 이 책 갈피갈피마다 묻어난다. 그가 싸우는 대상은 참으로 크다. 강하다. 자본이 ‘주의’가 된 세상, ‘정규직’이 꿈이 된 세상, ‘무한경쟁’이 삶의 가치가 된 세상, 개별화가 당연이 된 세상, 끝없는 탐욕이 능력이 된 세상. 이 세상과 싸우자하니 그의 평화는 피 흘림 없이, 상처 없이 도래하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답게 피 흘리는 그의 언어들은 이 책에서 그 싸움을 싸운다. 사람을 미워하지 아니하되 인간 본래의 생명이 하루하루의 삶을 성실히 ‘기어서 넘는’ 인생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짖밟는 구조악에 한판 싸움을 걸면서, 샬롬의 그날을 꿈꾼다.

 

그래서 희망이다. 우리 현실이, 인생이 비록 ‘아슬아슬할’ 지언정, 끝내 포기하지 않고 평화의 꿈을 꾸며 오늘 하루씩 겨루어내는 이 ‘기어감’이 결국은 이 생명 경시의 세상을 ‘넘어’가도록 만들 테니까. 한 명, 또 한 명, 이렇게 ‘살림’의 방향으로 연대하여 ‘기어가는’ 신앙의 사람들이 늘어가는 그 나라를, 그래서 예수는 겨자씨에 비유하신 것이었겠지. 김 목사는 이 책을 “멋진 소식으로 이 세상을 방문한 외손녀 예빈이에게” 주고 싶다(15쪽)고 했다. 나도 그렇다. 책 읽기를 마치고서 나는 밑줄 가득한 이 책을 나의 미래인 내 아이에게 건넸다. 내 아이가, 우리의 아이들이 ‘기어서 넘는’ 세상은 견딜 만 하도록 땅을 고르고 장애물을 치워줄 몫이 나에게, 우리에게 있다는 걸 다시 다짐하면서.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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