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6)

 

두루마리는 태워도 말씀은 태우지 못한다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취(取)하여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書記官)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 왕(王) 여호야김의 불사른 책(冊)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의 구전(口傳)대로 기록(記錄)하고 그 외(外)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 하였더라”(예레미야 36:32).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어디 그런 모습이 한둘일까만 내게도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흔히 미련한 사람을 ‘꿩 대가리’라 부르는 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어릴 적 시골의 초등학교에서는 겨울이 되어 눈이 수북이 쌓이면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함께 뒷산으로 올랐다. 토끼사냥을 가는 것이다. 한쪽에 그물을 쳐 놓고는 손에 막대기를 든 학생들이 산 전체를 에워싼 채 함성을 지르며 몰이를 시작하면 놀라 도망을 치던 토끼들이 걸려들곤 했다.

 

어떤 날은 토끼 대신 엉뚱한 것을 잡기도 했다. ‘꿩 대신 닭’이 아니라, ‘토끼 대신 꿩’을 잡는 것이다. 눈 덮인 겨울 산에서 꿩을 발견하면 학생들이 고함을 지르며 몰아댄다. 꿩은 독특한 습성이 있어 오랫동안을 날지 않고 잠깐 날다가는 꼭 내려앉고는 한다.

 

꿩에게는 또 한 가지 바보 같은 특징이 있는데, 몰이에 쫓기다 더는 어쩔 수가 없게 되면 자기 머리를, 그야말로 대가리를 눈 속에 파묻고는 꼼짝을 하지 않는다. 제 깐에는 숨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제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니 안전하게 숨은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이니, 그렇게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모습이 또 있을까 싶다.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진 주님의 말씀이 영 불편했다. 하긴 바벨론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으니 어느 왕이 그런 그것을 좋아할까?

 

왕은 두루마리에 적힌 주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소도(小刀)로 베어 화롯불에 태웠다. 두루마리를 베어낼 때 쓴 칼은 갈대 글씨를 쓰기 위해 촉을 만들 때 사용하는 것으로, 주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 서기관들이 사용하던 칼이었다. 말씀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했던 칼을 말씀을 베어 없앨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렇게 왕이 두루마리를 모두 태운 뒤에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시 명하신다. 다른 두루마리를 구해다가 첫 번째 두루마리에 기록하였던 먼젓번 말씀을 모두 다시 적으라는 것이었다.

 

또한 주님은 왕에게 임할 진노를 말씀하신다. 먼저 왕의 후손들 중 다윗의 왕좌에 앉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라 하신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르지만 여호야긴은 왕위에 오른 지 석 달 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고, 37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자유로운 몸이 된다. 여호야김의 시체는 무더운 낮에도 추운 밤에도 바깥에 버려져 뒹굴게 될 것이라 하신다. 죽은 뒤에도 아무도 돌보는 자가 없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이 내리시는 재앙은 왕에게서 그치지 않는다. 왕 뿐만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에게도, 또한 주님이 경고하였으나 믿지 않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도 내리게 된다.

 

예레미야는 주님이 명하신 것을 그대로 따른다. 왕은 두루마리를 태웠지만 주님의 말씀은 다시 기록이 된다. 먼젓번 말씀만이 아니라, 더 많은 말씀이 기록된다. 재난을 예고하는 말씀까지가 담겼기 때문이다.

 

칼로 두루마리를 베어내고 베어낸 두루마리는 태웠을지 몰라도, 주님의 말씀까지를 태울 수는 없는 일이다. 내 귀에 쓴 소리라 하여 주님의 말씀을 없앤다고 주님의 말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잠시 멀어지는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오히려 더 분명한 힘으로 다가온다.

 

주님의 말씀은 내가 외면한다고 해서 나와 무관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눈 속에 제 대가리를 파묻고 스스로 안전하다 여기는 겨울 꿩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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