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29)

 

파추부 노인, 그 아스라한 생존자

 

지난주는 지난해 중동감기로 격리병동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지 일 년이 되는 즈음이었다. 마침 완치자 연구 프로그램에서 검사가 있어 서울대 병원엘 갔다. 의사가 가지고 있는 두꺼운 개인기록 겉장에 ‘생존자’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내가 생존자로구나.’ 그 사실을 기뻐해야할지 축하해야할지 의아스러웠다.

 

나중에 듣게 된 바로는 당시 입원자들 가운덴 별의별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죽음의 위협과 강제 격리 상태에서의 심각한 불안은 환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반응을 일으켰던 것이다. 집에 가겠다고 난동을 부리고 의료진에게 화를 내고 살려달라고 발작을 일으키고, 개중에는 억지로 제압을 해야 하는 피치 못할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매우 조용한 환자였다. 나는 거의 말도 하지 않았고 먹지도 못했고 누워만 지냈다. 간호사들이 텔레비전이라도 보시라 권했지만 그런 친절에조차 대꾸를 하지 않을 정도로 마치 대단히 화가 난 사람 같은 까칠한 환자였다. 지금 생각하면 완치 판정을 받고 집에 돌아가든지 죽든지 그 판단을 기다리느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건지 모르겠다.

 

‘생존자’라는 말이 구사일생 치열하게 싸워서 살아난 사람의 의미라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사실 깊은 우울에 빠져 생존을 위한 적극적 노력을 거의 하지 않은 셈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여사의 죽음에 이르는 5단계설(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을 적용해 본다면 수용 직전의 깊은 우울의 단계였다고 할까. 아니면 그 모든 단계가 내 안에서 한꺼번에 들끓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까닭일까. ‘생존자’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입원한 다음 날 한 노인이 내 옆 침대에 들어왔다. 일생을 강도 높은 노동으로 살아왔음직한 깡마르고 주름진 70대 노인이었다. 침대에 누워 들어올 때부터 그는 의식 불명에 기도삽관 상태였다. 그를 옮긴 의료진이 필요한 모든 장비를 다 갖춰놓고 나간 다음 나는 그의 상태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인간의 생명을 ‘목숨’이라 했던가? 그는 거의 목으로 호흡을 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긴박하고 갑갑한 숨소리가 이어지다가 폭발할 듯 몸을 뒤틀며 엄청난 소리를 지르곤 숨이 좀 터졌다. 그리곤 다시 반복. 게다가 그에게서는 마치 죽음의 전조 같은 노인 환자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썩는 냄새가 났다. 그의 곧 끊어질 것 같은 숨소리는 24시간 계속됐다. 그로인해 우리 방에는 간호사들이 자주 들어왔다. 일상적 검사와 주사나 약물 투여 외에도 그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가래를 뽑아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웬일인지 나는 그가 의식이 없다는 사실에 좀 위안이 됐다. 그의 숨소리와 냄새엔 질식할 지경이었지만 결국엔 적응이 되어 무심하게 됐다. 실로 무심이었다.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 발에 쇠사슬을 차고 4년의 유형생활을 했던 작가 도스또옙스끼는 멀리 있는 인류는 사랑할 수 있지만 더러운 냄새를 풍기며 옆에 누워있는 동료 죄수 한 사람만은 결코 사랑 할 수 없었다는 취지의 말을 한 바 있다. 나 역시 그를 보기가 싫었다. 살아나리란 가망이 없어 보이는 그의 상태. 나는 그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당시 나는 감염자들은 결국 다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그걸 상기 시켜주었다. 일종의 내기 같은 것? 우리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죽을까? 상태로 보아 그가 먼저 죽을 확률이 높겠지만 그건 또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도 어제는 화장실에서 쓰러져 죽음 비슷한 경험을 했지 않는가.

 

나는 그와 내 침대 사이에 커튼을 쳐 그를 가렸다. 그러나 그를 가리니 그의 침대 건너 창밖 풍경과 하늘도 가려 보이지 않게 됐다. 궁여지책으로 그의 허리 아래까지 만 커튼을 쳤다. 그런데 그 상태에선 하늘과 먼 산의 풍경은 볼 수 있었지만 그 사람의 기저귀찬 아랫도리와 초등학생들의 반양말처럼 무릎 위까지 신겨놓은 흰 양말이 먼저 보였다.(그건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돌아가신 장인의 발에도 신겨있던 괴사방지용 양말이었다.) 나는 그걸 보는 게 괴로워 눈을 감아 버리거나 가급적 시야를 높게 설정해 보고도 안 보이는 척을 했다. 전혀 양심이 찔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내 양심을 눈치 챌 의식이 없으므로, 그리고 내 처지 또한 그와 다를 바 없었으므로, 괘념치 않았다.

 

우리들을 돌보던 의료진중 한두 명의 간호사가 기억이 난다. 방호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생김새는 알 수 없지만 목소리만은 생생하다. 그들은 박완서의 표현처럼 환자를 ‘공깃돌 굴리듯’ 다루진 못했다. 그러나(특히 두 명은) 마치 친아버지를 다루듯 했다. 그들은 의식도 불분명한 노인에게 일일이 그때그때 자기들이 하려는 작업을 설명했고, 진행상황을 말해줬고, 당치도 않게 그를 다그치거나 용기를 북돋우며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처음엔 심드렁했던 나는 점차 그들의 헌신적인 간호에 주의를 기울이게 됐고 환자의 용태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한 번은 그의 가래가 막혀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의료진을 불러 들여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나는 점차 그의 침대를 건너 창문까지 링거를 끌고 방안 산책을 다녔다. 둘 사이의 커튼을 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단 한번 의식이 깨어났다. 깨어나자 그는 엉뚱하게도 간호사에게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간청했다. 간호사가 애기 달래듯 핀잔을 주자 담배가 아니라 전자담배라도 좋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말이 아닌 말로 전자담배를 간호사에게 설명하는 과정이 오래 걸렸다. 나는 처음으로 웃었다. 둘이 남았을 때 그는 ‘이게 누군가’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으나 무슨 의사를 전하진 못했다. 나 역시 뭔가 말을 붙여 보지 못했다. 얼마 후 그는 곧 의식 없는 상태로 돌아갔다. 내가 퇴원할 때도 그는 거친 목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병마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에게 인사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일부러. 나는 그가 죽을 줄 알았던 것이다.

 

파추부 씨(氏). 나는 간호사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을 듣고 딱 한번 그가 중국인이냐고 물었었다. 간호사의 대답은 아닐 거라는 애매한 것이었다. 나중에 나는 그가 죽지 않고 살아서 요양원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양원에서 상태가 나빠져 병원에 왔다가 감염까지 된 분이었다. 자식들조차 돌보지 않아 무척 외롭고 안 된 처지의 노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살았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저 깊은 양심의 찔림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다. 그가 죽었다면 나는 또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가 살아난 것은 나를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다.

 

카뮈의 《전락》이라는 소설은 한 프랑스인 지식인인 변호사가 자신의 내면의 전락(타락) 과정과 그 절망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여러 사건이 나오지만 그중 가장 최초 전락의 원인은 독일군의 포로수용소에서 죽어가는 동료의 빵을 가로채 먹어버린 죄책감이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는 자기기만으로 양심을 잠재우고 그는 앓으면서 죽어가는 동료의 빵을 먹는다. 또 하나 유사한 사건은 변호사가 되어 잘 나가던 어느 겨울 밤 파리의 센 강 다리 위 바로 지척에서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람을 구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겨울이라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기 싫었다는 이유로 그는 한 사람의 죽음을 방치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서서히 전락해 간다.

 

나는 가끔 ‘파추부’라는 기이한 이름의 노인을 생각한다. 그 이름은 내가 얼마나 살 준비도, 죽을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어설픈 인간인지, 나만의 생사와 안위와 자아의 진퇴를 최종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인지를 상기시켜 준다. 물론 나는 그 일로 전락하진 않았지만. 반성과 함께, ‘파추부 씨, 가래를 빼야 돼요.’ ‘파추부 씨, 기저귀 갈아 드릴께요.’ 하던 방호복 속의 생김을 알지 못하는 간호사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파추부 노인.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실까?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posted by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