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8)

 

반쯤은 희망을 품고 반쯤은 두려움을 품은 채

 

“시드기야 왕(王)이 보내어 그를 이끌어 내고 왕궁(王宮)에서 그에게 비밀(秘密)히 물어 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가 대답(對答)하되 있나이다 또 가로되 왕(王)이 바벨론 왕(王)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예레미야 37:17).

 

같은 본문을 읽고 묵상한 다른 이의 글을 읽는 것은 조심스럽기도 하고 유익하기도 하다. 조심스러운 것은 그것이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처럼 자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말씀과 씨름을 하며 내가 길어올릴 수 있는 묵상의 내용을, 다른 이가 길어 올린 물로 손쉽게 대신하는 우를 범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익함도 크다. 무엇보다도 다른 이의 묵상을 대하며 얻는 유익함 중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내 좁다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점이다. 말씀을 대하는 마음은 저마다의 신앙과 성품과 경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것, 나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묵상의 내용을 대하게 되면 새삼 말씀의 깊이와 폭에 놀라며 고마워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주님의 말씀은 매장된 모든 것을 다 파낸 폐광이 아니라 아직도 무엇이 얼마나 묻혀 있는지를 전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땀 흘리며 곡괭이질을 하는 만큼만 알려주는 거대한 광산과 다를 바가 없다.

 

마침 지난주 묵상(‘내게는 말씀이 있습니다’)의 본문으로 삼았던 예레미야 37장 17절의 본문을 월터 브루그만이 쓴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에서도 다루고 있다. 쉬어가는 마음으로, 경청하는 마음으로 내용 그대로를 옮겨본다.

 

 

 

 

<우리는 시드기야처럼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나타납니다. 이 왕은 ‘은밀히’ 물어보려고 나타났는데, ‘밤중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요한복음 3:2)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시드기야왕이 찾아온 까닭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바벨론 군인들이 그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지지 체계’와 ‘지식인 공동체’가 그들의 자원을 모두 소진하여 도무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닥친 무서운 상황 때문에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여호와께서 기적을 행하여 구원해 주신 적이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또 그런 기적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참조, 예레미야 21:2).

그처럼 무서운 상황에서 불안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그는 절박한 희망을 품고 찾아온 것입니다. 이 희망은 두려움으로 채색되어 있는데, 한편으론 신앙의 전통에 뿌리박고 있으며 또 한편으론 실제 상황에 따른 불확실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희망은 신학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어쨌든 시드기야왕은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말씀을 들을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그 들은 말씀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 말씀을 들으려고 왔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해야’ 할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말입니다(에레미야 38:24-28).

우리도 설교를 들으려고 올 때는 시드기야처럼 반쯤은 희망을 품고 반쯤은 두려움을 품은 채 그 자리에 있기가 당황스러우면서도, ‘복되거나 저주스러운’ 우리의 현 상황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은 아니라고 반쯤 믿으면서 나오게 됩니다.>

 

말씀을 들으러 나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시드기야에 빗대어 표현한 마지막 문장 ‘반쯤은 희망을 품고 반쯤은 두려움을 품은 채 그 자리에 있기가 당황스러우면서도, 복되거나 저주스러운 우리의 현 상황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은 아니라고 반쯤 믿으면서 나오게 됩니다.’에 공감을 한다.

 

말씀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들은 습관처럼 무덤덤하게 나아갈 때도 있고, 비를 기다리는 마른땅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나아갈 때도 있다. 어떤 모습이든 우리 안에는 ‘반쯤은 희망을 품고 반쯤은 두려움을 품은’ 마음이 있다. 말씀으로 마음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희망과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을 감당해야 하는 두려움을 아울러 가지고 나아간다.

 

‘반쯤은 희망을 품고 반쯤은 두려움을 품은’,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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