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톺아보기(26)

 

진짜 어른을 보고 싶다

 

중3 무렵 아들 아이는 내 곁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쑥 빼곤 했다. 아버지와 보이지 않는 키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어쭈, 이 녀석 봐라’ 하면서 실소를 머금기도 했지만 한편 아이의 성장이 대견하기도 했다. 아이는 이제 곧 아버지 키를 뛰어넘게 된다는 설렘으로 나름의 통과의례를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녀석은 키 재기를 그만 두었다. 아버지가 자기보다 작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확인한 후였다. 그때부터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숙명은 아버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미지는 아들로 하여금 언제나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게 하는 ‘내면화된 타자’, ‘내부의 강력한 검열관’”(임철규)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이미지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아들과 딸을 생각할 때마다 김승희 시인의 <제도>를 떠올린다. 아이는 하루 종일 색칠 공부 책을 칠하고 있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색칠이 나갈까 두려워한다. 아이는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선 안에 갇혀 있다. 답답하다. 죽은 풍경이다. 시인의 내면에서 폭풍에 감싸인 언어가 펄럭인다. ‘금을 뭉개버려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차마 발설되지 못한다. 위반하는 삶의 신산스러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엄마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그토록 제도를 증오했건만 엄마는 이미 제도가 되고 총독부가 되어 아이를 묶고 있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처연하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그 말은 어쩌면 흐르는 모래 속에 파묻힌 고야의 ‘개’처럼 침묵 속에 잦아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젊음의 특권은 불온함이다. 기존 질서에 의문부호를 붙이고, 제도에 도전하는 눈빛 사나운 젊은이들이야말로 역사 변혁의 단초이다. 세속의 논리에 순치된 젊음처럼 슬픈 것은 없다. 시대에 따라 세대를 구분하는 용어가 달라졌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조어처럼 가슴 미어지는 것이 없다. 불온조차도 사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가끔 길에서 쏘아보듯 눈길을 보내는 젊은이를 볼 때가 있다. 그 불량한 시선에 순간 불쾌감이 일 때가 있지만, 슬쩍 곁을 스쳐 지나간 후에는 비죽 웃음이 배어나올 때도 있다. 그의 불온한 눈빛은 세상의 어떤 운명에도 맞서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직 인간의 삶과 운명을 주재하는 재판관인 시간에 종속되지 않은 젊음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젊음이의 미숙함은 아름답다. 인생에 정해진 답이란 없기에 길 찾기를 위한 방황과 좌절의 시간을 겪어야 한다. 그 겪음이야말로 창조의 모탕이 아니던가.

 

하지만 스스로 어른을 자처하는 이들의 미숙함은 보기 안쓰럽다. 가끔씩 하시는 한 마디가 사회통합에 기여하기보다는 갈등을 증폭시키거나, 사람들의 마음에 냉소의 한기를 심어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얼마나 가학적인가?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군대에서 벌어지는 비인격적인 가혹행위가 병사들을 죽음의 길로 내몬다며 언론이 들끓고 있을 때 대통령이 한 말을 듣고 나는 아뜩한 절망감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는 문제는 체벌이 아니라며 “자유롭게 자란 아이들이 군에 들어가 바뀐 환경에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더 큰 원인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심리학자의 분석이 아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을 가장 큰 책임으로 인식해야 할 분의 말이다. 이 말 속에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시난고난 사위어가는 부모와 가족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 또 죽어간 이들에 대한 예의도 없다. 앎의 과잉이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한 마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과 만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들은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주변세계를 재배치한다. 그들과 만나 상처를 입지 않고 물러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들은 욥의 세 친구를 닮았다. 느닷없이 닥쳐온 불행 앞에서 넋이 빠진 친구들에 그들은 인과응보의 잣대를 들이댔다. 욥의 죄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겪는 불행이 그의 죄를 입증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판 욥의 친구들이 참 많다. 쓰나미나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사태를 두고 불신앙 운운 하는 종교인들 말이다. ‘모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앎’은 독선이요 폭력이 아니던가? 딛고 서야 할 땅을 진창으로 만들어버리는 폭우처럼 ‘안다’ 하는 자부심은 때로 함께 살아야 할 세상을 진창으로 만들어버릴 때가 많다. 나의 ‘앎’ 혹은 ‘옳음’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타자와 소통할 여지는 줄어든다. 타자는 동화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티카의 강도이다. 그는 아테네 교외에 있는 한 언덕에 집을 짓고 강도질을 하며 살았다. 그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었는데, 그는 지나가는 길손을 초대하여 자기 침대에 눕힌 후, 침대보다 작으면 희생자의 몸을 잡아늘이고, 침대보다 크면 잘라냈다. 그 침대에는 길이를 조절하는 장치가 있어서 누구도 그 침대에 딱 들어맞는 사람은 없었다 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누운 사람은 누구나 죽임을 당했다. 어차피 죽일 거면서 그는 왜 희생자를 그냥 죽이지 않고 사디스트적인 게임을 벌였던 것일까? 자기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는 임의로 결정한 기준을 가지고 남을 재단하면서도 분명한 기준에 따랐다는 명분에 집착했던 것이다. 그 강도는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침대(Procrustean bed)는 사라지지 않았다. 변신에 능한 그 침대는 사람들의 자아 속에 깃들어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나는 그 침대를 ‘기준이 되려는 욕망’이라고 부른다.

전도서 기자는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라고 충고했다. 또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고 말했다(전도서 7:16-18). 어중간한 위치에 선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불완전함을 받아들인다는 말일 것이다. 자기 기준에 집착하는 사람은 언제나 극단에 치우치곤 한다. 그러나 극단의 자리는 온전한 인식과는 거리가 멀다. 도무지 내 기준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해도 다른 자리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 때가 있다. 우리가 아무도 멸시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간 세상에 ‘절대’란 없다. 자기를 상대화할 줄 아는 것이 곧 지혜이고, 알 수 없음을 받아들임이 겸손이다.

 

마치 세상에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사람들, 안 해 본 일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에는 이웃에 대한 절절한 아픔이 깃들 수 없다. 그러니 아픔꽃조차 피워내지 못한다. 그들은 모르는 게 없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공감하는 사랑을 빼고 어떻게 인간을 논할 수 있겠는가? 세상 현실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 말고 많이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을 보고 싶다. 무한히 열려 있어 모든 것을 흐르게 하는 사람들, 어쩌면 그들이 진짜 어른인지도 모르겠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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