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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비참한 말로

by 한종호 2016. 7. 18.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2)

 

비참한 말로

 

“바벨론 왕(王)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목전(目前)에서 그 아들들을 죽였고 왕(王)이 또 유다의 모든 귀인(貴人)을 죽였으며 왕(王)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 하여 사슬로 결박(結縛)하였더라”(에레미야 39:6-7).

 

독일 속담 중에 ‘끝이 좋아야 모든 게 좋은 것이다’(Ende gut, alles gut)는 속담이 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그런 가벼운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속담을 보면 ‘끝만’이 아니라 ‘끝이’다. 끝만 좋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끝이 좋아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과정이 다 중요할 터이지만, 무엇보다도 끝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좋게 시작을 했다가 좋지 않게 끝나는 일들이 적지가 않다. ‘지옥으로 가는 모든 길이 선한 동기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이 있거니와, 좋은 말잔치로 시작을 했다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끝나는 경우들이 많다.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좋은 관계로 시작을 했다가 나중에는 좋지 않은 관계로 끝나는 경우들이 있다. 기쁨을 주던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아픔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인생도 다르지 않다. 누가 보아도 부러움을 살만한 삶을 살다가, 나중에는 더없이 비참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신산고초(辛酸苦楚)를 겪어가며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사람이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느냐는 듯이 넉넉하고 평온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시드기야 왕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하다. 시드기야는 자기 백성들이 두려웠다. 백성들은 바빌로니아 군대에게 투항을 했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주님의 뜻을 따라 자신이 바빌로니아에게 항복을 할 경우 바빌로니아 군대가 자신을 백성들에게 넘겨주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럴 경우 백성들이 자신을 학대할 것이라고 시드기야는 생각했던 것이다.

 

시드기야의 모습이 불쌍하고 불행하다. 왕이 백성을 두려워하다니 말이다. 나라를 바로 이끌고 백성들을 사랑했다면 나라의 형편이 어찌 되든 무엇이 두려울까만, 시드기야는 자신을 백성에게 넘길 경우 백성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왕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자 예레미야가 말한다.

 

“그 사람들 손에 넘어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소인이 전하는 야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래야 임금님의 앞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래야 임금님께서는 목숨을 건지십니다.” (38:20, 공동번역)

 

지금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만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매우 구체적인 일들을 나열했지만 왕은 끝내 예레미야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왕은 그런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말라며 함구할 것을 명한다.

 

시드기야의 결국이 어땠을까? 잊을 수 없는 날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날을 이렇게 기록한다.

 

“시드기야 제 십일 년 넷째 달 구일에 마침내 성벽이 뚫렸다.”(39:2, 새번역)

 

혼비백산 도망을 치던 시드기야는 여리고 평원에서 사로잡혀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 앞에 끌려오게 된다. 마침내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이 처형을 당한다. 자식들이 죽는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아비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처형한 느부갓네살 왕은 마침내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버린다. 결국 시드기야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들들이 죽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보다 더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결말이 어디 있을까?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기 위하여 쇠사슬에 묶이는 것은 앞선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싶다.

 

주님의 뜻에 눈이 멀자 결국은 두 눈이 뽑히고 마는 시드기야,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된 것 또한 비극 중의 비극, 한 사람의 말로가 이리도 비참할 수 있을까 싶어 몸서리가 쳐진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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