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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

엇갈린 두 여인의 운명,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by 한종호 2016. 7. 19.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5)

 

엇갈린 두 여인의 운명,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억압의 공포가 일상화된 세상이었다(사사기 4:3; 5:6). 그러나 이스라엘은 새로운 신들을 선택했고 누구도 가나안의 억압에 저항하며 전쟁에 나설 용기를 갖지 않았다(5:8). 이때 드보라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은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일치된 헌신을 보여주었지만(5:9),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메로스 주민들이 있었다. 북 팔레스타인 어디쯤 위치한 메로스를 주님의 천사가 저주하라고 외쳤다. 이유는 여호와를 돕지 않아서다(5:23). 반면에 한 여인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야엘은 여인들 중에서 복 받을 것이요, 그녀는 겐 사람 헤벨의 아내이며, 장막에 거하는 여인들 중에 있다”(5:24).

 

야엘은 특별한 임무를 받은 적도 없다. 야엘의 무엇을 칭송한 것일까? 야엘의 태생적 신분은 생략되었고, 그녀의 남편 겐 사람 헤벨은 모세의 처남 호밥의 후손이다(4:11; 민수기c10:29). 사사 드보라의 지휘아래 바락 장군이 만 명의 군사를 데리고 가나안 왕의 군대장관 시스라 군대와 싸울 때였다. 시스라는 혼란에 빠진 죽음의 전쟁터를 빠져나와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으로 도망친다. 야빈 왕과 헤벨 사이에 맺은 동맹관계 때문이었다(4:15, 17). 시스라는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시스라가 기대했던 대로 야엘은 충분히 친절했다. 그녀는 시스라에게 말했다. “피하십시오, 나의 주인이여, 내게로 피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시스라는 이 말을 듣고 야엘의 천막으로 피했고, 야엘은 이불로 그를 덮어 주었다(4:18). 이불로 덮어준 야엘의 행동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이었다는 것을 강조한 문장이다(강조 능동형 동사). 그러니까 시스라는 야엘의 적극적인 행위에 의해 감춰진 상태가 된 셈이다.

 

 

 

이때 시스라는 약간의 마실 물을 청했지만, 야엘은 물이 아니라 우유를 마시게 하고 그를 이불로 덮었다(4:19; 5:25). 이때 시스라의 말투가 바뀌는데, 처음처럼 정중한 요청이 아니라 명령조다. “너는 장막 입구에 서있으라.” 그리고서 누군가 와서 묻거든 없다고 말하라니(4:20). 시스라의 두려움이 자기보다 약한 여성을 무시와 혐오의 대상으로 삼게 한 것일까? 그렇더라도 야엘은 침착하게 시스라의 고조된 불안감을 우유와 이불을 덮어주는 것으로 안정감을 갖게 했다.

 

그러나 야엘, 그녀는 더 이상 친절하지 않았다. 시스라가 깊이 잠든 사이, 야엘은 천막 말뚝을 들고 그에게로 가서 그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는다. 말뚝은 관자놀이를 통과하여 땅에 박혔다. 시스라는 여인의 발 앞에서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죽었다.”(5:27). 야엘이 베푼 친절함과 안정감에 잠든 시스라, 끝내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이때 야엘은 시스라를 추격하던 바락을 맞이하고 시스라의 최후를 바락에게 내준다(4:22). 드보라가 전쟁에 나가기 전에 바락에게 했던 말, “…네가 가는 길에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다”(4: 9)라고 했던 말이 야엘에게서 성취된 셈이다. 전쟁의 공훈과 영광은 바락이 아니라 야엘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야엘의 행동을 잔인하다고 여겼던 해석자들 사이에서 그녀의 정체성을 두고 많은 말들이 오갔다. 야엘은 사사, 전사, 요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불렀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가나안 왕 야빈과 맺은 동맹관계에 자신을 묶어 두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여성에게 수동성을 요구한 사회였지만, 야엘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이었다. 또한 야엘이 헤벨의 아내라는 것 외에 태생적 신분에 대한 정보가 생략된 것은 신분보다 그녀의 행위가 중요했다는 방증이다. 왜 야엘이 여호와의 백성 편에 섰는지에 대한 이유도 생략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적장 시스라의 죽음과 함께 하나님은 가나안 왕을 이스라엘 앞에 굴복시키셨다(4:23). 하나님은 억압과 유린으로 인한 고통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남자의 권위에 종속된 여성을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구원역사 속에서 여성을 남자의 배경으로만 묶어두지 않으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전쟁은 야엘의 영광으로 마무리 되는 듯했다. 그러나 승리의 노래는 돌연 적장 시스라 어머니의 상황 묘사로 급전환한다. 적장 시스라의 어머니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5:28). 그런데 혼잣말로 자신을 위로하는 시스라 어머니의 말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이 어찌 약탈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용사마다 한 두 처녀를 차지하였을 것이다.

시스라가 약탈한 것은 채색한 옷감,

곧 수놓아 채색한 옷감이거나

약탈한 사람의 목에 걸칠 수놓은

        두 벌의 옷감일 것이다”(5:30, 새번역).

 

지배계급에 속한 시스라의 어머니,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짓밟혀 전리품 취급당하는 여성들의 운명을 당연시한다. 전쟁터로 떠난 아들을 기다리는 애타는 심정의 평범한 어머니의 말이 아니다. 그녀는 특정 신체 부위를 지목하며 여성비하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한 두 처녀”라는 표현은 거친 군사들의 희롱하는 말로서 “한 두 개의 자궁”을 순화시킨 말이다. 구약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말이다. 여성이 남성 영웅들의 탈취 대상이었던 증거다.

 

시스라 어머니의 말은 잔인한 권력자 앞에서 참혹한 세월을 보냈을 이스라엘의 상황을 방증한 것이고, 동시에 심판 받아 마땅할 만큼 잔인했던 가나안의 일면을 밝힌 셈이다. 하여 드보라는 여호와께 대적의 멸망을 구하고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돋는 해처럼 힘이 넘치기를 노래한다(5:31).

 

이스라엘의 적장 시스라를 죽인 영웅 야엘과 시스라의 어머니는 둘 다 이스라엘 경계 밖에 속한 이방 여인이었지만, 누구 편에 설 것인가에 따라 운명은 엇갈렸다. 전쟁의 승리와 영광은 태생적, 사회적, 지리적 경계를 넘어 정의 편에 선 자들의 것이었다. 영광은 착취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착취당하는 자들의 것이었다. 때문에 드보라 노래에(5장) 실린 야엘과 시스라의 어머니 일화는, 참혹한 시대의 삶의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은유적인 답변이다.

 

구원은 인간이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온다. 주류 기득권이 주도하는 강고한 질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연약한 방식으로 온다. 제도적 공고함으로 무장한 주류 질서에서 배제된 ‘주변화’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니라 변방에서 이뤄진다”(신영복)는 말을 빌려와도 좋겠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중심 예루살렘이 아니라 소외되었던 갈릴리에서 꽃피기 시작한 것처럼.

 

김순영/백석대 신학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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