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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끝내 떠날 수 없는 땅

by 한종호 2016. 7. 29.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3)

 

끝내 떠날 수 없는 땅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百姓) 중(中)에서 그와 함께 거(居)하니라”(예레미야 40:6).

 

동화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전라남도 광주, 그 외곽에 있는 송정리, 그곳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평동이라는 곳에서 군 생활을 했다. 105미리 대포를 쏘는 포대였다. 상무대에서 이론 교육을 받은 이들을 위해 실제로 포를 쏘아줌으로 측지, 사지, 사격명령 등 실제적인 훈련을 받게 하는 부대였다.

 

부대 안에는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예배당이 있었다. 독립대대, 군종장교는 따로 없었다. 포다리라 불리는 포병생활과 함께 군종 역할을 맡은 나는 매주 한 번씩 광주 시내로 나가 교회를 섭외하는 일을 해야 했다. 주일 오후에 부대를 찾아와 예배를 드릴 목회자와 교회를 찾는 것이 빠뜨릴 수 없는 일 중의 하나였다. 일을 일찍 마친 어느 날 우연히 광주 계림동 헌책방을 들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권정생의 동화집을 만나게 되었다. ‘강아지똥’이 담겨 있는 동화집이었다. 동화가 참으로 좋은 그릇이라는 것을 권정생, 이현주, 윤기현 등의 동화를 읽으며 배우게 되었다.

 

동화는 쉰 살이 넘어야 쓰는 것이라는 말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마음속에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고 스케치 하듯이 글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처음으로 쓴 동화 ‘소리새’였다. 한 신문사에서 동화를 공모하는 일이 있었고, 내가 쓰는 것도 동화일까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보낸 ‘소리새’가 당선작이 되었다.

 

끝내 우리가 떠나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면 내 나라 이 땅과 인간다움이라는 곳 아닐까 싶다고, 당선소감의 마지막 부분을 그렇게 썼다. 오래 전 일이지만 떠나지 말아야 할 곳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마침내 예루살렘에 멸망이 찾아와 백성들이 사슬에 묶인 채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고 있을 때, 예레미야도 그들 중의 하나로 끌려가고 있었다. 백성들과 똑같이 손에 사슬에 묶인 채 끌려간다. 백성들에게 주님의 뜻을 외치는 삶을 살았지만 막상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자 고난 받는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 말씀을 외친 뒤 위험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일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끌려가던 중 라마라는 곳에서 바빌로니아 군사령관인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발견하고 예레미야를 풀어준다. 예레미야가 물웅덩이에 빠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레미야를 꺼내준 것은 구스 사람 에벳멜렉이었다. 낯선 일이다. 이방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을 구한다. 동족은 하나님의 사람을 버리고, 생각하지 못했던 이방인이 하나님의 사람을 건진다.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에게 말한다.

 

“그대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이 곳에 이런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그대로 하셨소.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하신 것이오. 그대들이 주님께 죄를 짓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들이 이런 재앙을 당한 것이오. 그러나 이제 보시오. 내가 지금 그대의 두 팔에 채워진 수갑을 풀어 주겠소. 그대가 만일 나와 함께 바빌로니아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면, 함께 가십시다. 내가 그대를 보살펴 주겠소. 그러나 나와 함께 바빌로니아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괜찮소. 이 땅 어디든지, 그대가 보기에 적당하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그 곳으로 가시오.”(2-4) <새번역>

 

당신들은 지금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죄를 지어 재앙을 당한 것이라고, 주님의 백성들이 이방 사람에게서 꾸중을 듣는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이 아닐 수가 없다. 함부로 성(聖)과 속(俗)을 구별할 일은 아니지만, 속(俗)이 성(聖)을 판단하고 걱정하는 딱한 일은 그 때나 지금이나 어느 시대에나 반복되지 싶다.

 

바빌로니아 군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고마운 제안을 한다. 어느 편을 택하든지 예레미야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바빌로니아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면 자신이 기꺼이 보살피겠다고, 아니면 유다 땅 어디든지 원하는 곳에서 살아도 좋겠다는 것이다. 이미 바빌로니아 왕은 느부사라단에게 예레미야를 선대하라고 지시를 내린 일이 있다.(39:12)

 

선의를 베풀되 강요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배려다. 이방인을 통해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바빌로니아 군사령관의 제안을 들은 예레미야는 유다 땅에 남기로 한다. 바빌로니아 왕이 안전과 편안을 보장한 것이기에 예레미야로서는 바빌로니아로 가는 것이 더 편하고 안정적인 삶일 수 있었지만, 망한 나라에 남아 실의에 빠진 백성들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편을 택한다.

 

남기로 한 예레미야를 위해 군사령관은 양식과 선물을 주어 예레미야를 돌려보낸다. 예레미야는 미스바로 돌아가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중에서 그들과 함께 거한다.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는 백성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빈민’(39:10)뿐이었지만, 예레미야는 그들과 함께 살기로 한다.

 

“예레미야는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를 찾아가, 그와 함께 그 땅에 남아 있는 동족과 더불어 살았다.”<새번역>

 

“예레미야는 아히캄의 아들 게달리야를 찾아 미스바로 가서 고향에 남은 백성과 어울리며 게달리야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냈다.”<공동번역>

 

끝내 떠나서는 안 될 땅이 있다. 함부로 등질 수 없는 땅이 있다. 그 땅에 남아 그곳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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