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8)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폭력의 시대(1)

우리는 그들이 한 일을 알고 있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 생각대로만 행동한다면, 끔찍하고 잔인한 세상이다. “각 사람이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했다”(사사기 17:6; 21:25)라는 한 마디는 구약의 사사시대를 압축 평가하는 말이다. 그 대표적 현상은 물욕을 상승시키는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결합시키는 혼합적 신앙의 확대였다(사사기 17-18장). 신앙의 타락은 사회의 폭력적인 무질서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레위인 남자와 그의 첩에 대한 일화다(19장). 이것은 차마 입에 담기에 끔찍하고 잔인한 사회의 얼굴이었다.

 

잔혹한 사건을 다룬 사사기19장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없다. 레위인 남자, 그의 첩, 장인, 기브아에 사는 어떤 노인으로만 소개될 뿐이다. 사사기 저자는 왜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생략한 것일까. 이름은 한 개인의 고유한 인격과 존엄성을 표시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몰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반영한 것인가.

 

이야기는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사는 레위인 남자가 베들레헴 출신 여성을 첩으로 맞아들인 것에서 시작된다(1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여자는 남편에게 “화가 나서”(새번역; 개역개정: “행음하여”) 남편을 떠나 유다 땅 베들레헴 친정으로 가서 4개월을 지냈다(2절). 저자는 “행음하다” 또는 “싫어하다”라는 뜻의 히브리 동사(“자나”)를 사용한다. 번역의 차이가 궁금증을 불러온다. 여인이 자기 아버지 집으로 간 것이 부정함 때문인지, 남편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다. 레위인의 첩이 남편을 떠난 이유는 모호하지만, 첩을 찾아온 레위인 남자가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3절). 자기의 첩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설득의 과정이다. 만약 레위 남자의 첩이 부정한 행위로 남편에게 불충실했다면, 남자가 자기의 첩을 데려오기 위해 단 지파와 베냐민 지파 땅을 통과하여 먼 길을 여행해 왔을까?

 

그는 장인의 따뜻하고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레위 남자는 3일만 머물 생각이었지만, 장인의 만류 때문에 5일째 되는 날 떠날 수 있었다(5-6절). 이 과정에서 장인의 친절함이 지나치게 강조된 반면 레위 남자의 첩은 한 마디 말이 없다. 더욱이 여자의 아버지는 레위 남자에게 마음을 즐겁게 하고, 원기를 회복하라는 말을 네 차례나 반복한다(5, 7, 8, 9절). 두 남자의 대화와 묘사는 촘촘한 반면, 여자의 목소리는 없다. 이 여성이 남편을 떠난 것 말고는 자기 삶의 주체적 참여는 없고, 객체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생략되어 남편과 아버지 사이에서 소외된 존재다. 주체적인 자기 결정권 없는 종속된 여성의 지위가 오롯이 드러났다.

 

반면 융숭한 대접을 받은 레위 남자는 베들레헴 장인의 집을 떠나 여부스에 이르렀다. 여부스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방의 땅이었지만 이후 예루살렘이 될 장소다(10절). 해는 저물었다. 레위 남자의 종은 주인에게 여부스에서 하룻밤 묵기를 제안한다(11절). 그러나 주인은 이방 사람의 성읍인지라 기브아까지 가기를 고집한다(12절). 때문에 일행은 좀 더 북쪽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성읍 기브아로 간다(12-14절). 그들이 기브아의 성읍 광장에 앉았으나 아무도 그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사람이 없었다(15절). 레위 남자는 기브아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밤이슬을 피하도록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없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거룩한 의무였지만(레위기 19:33-34), 누구도 레위 남자 일행을 집으로 들이지 않았다.

 

이때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에브라임 산간지방 출신이지만 이곳 베냐민 지파 땅에서 거류민으로 사는 노인이었다(16절). 노인은 광장에 있는 나그네들을 보았다. 노인은 레위 사람 일행에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다(17절). 레위 남자는 베들레헴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의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아무도 맞아들이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18절). 노인은 포도주와 먹거리가 충분하다며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노인 덕분에 레위인 일행은 발도 씻고 먹고 마셨다(18-21절). 그들은 타향살이하는 노인의 집에서 안전한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행이 편안히 쉬던 밤, 성읍의 “불량배들”이 집을 둘러싸고 문을 두드리며 노인에게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 하겠다”(22절)라고 요구한다. “관계하다”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로 “알다”라는 말인데, 단순히 정보교환의 의미가 아니라 성관계를 포함한다(창세기 4:1; 19:5). 그러니까 마을의 불량배들이 레위인 남자에게 집단적인 동성 강간을 하겠다는 뜻이다. 기브아의 남자들이 동성애자라서일까? 아니다. 강간은 폭력이지 애착에 의한 것이 아니다. 타락한 도시의 상징인 소돔과 고모라에서 있었던 사건이(창세기 19장) 이스라엘 땅 중심부 기브아에서 일어났다. 도덕적 판단이 마비된 폭력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노인은 밖으로 나가 “내 형제들아 … 제발 이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23절) 당부한다. 그리고는 이 노인, 처녀인 자기 딸과 레위 사람의 첩이 있으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레위 남자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24절). 노인의 행동은 무분별한 서원으로 자기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입다를 환기시킨다(11:39). 노인의 딸과 레위 남자의 첩은 자기 몸의 주인이 아니다. 두 여성은 레위 남자를 보호하려는 남자 노인의 전략을 위한 희생의 도구일 뿐이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우월함을 확보한 남자가 지위가 낮은 약자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난다. 레위인 남자가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냈다. 불량배들은 밤새도록 그 여자를 윤간하여 욕보였고 새벽 동틀 무렵에야 놓아주었다(25절).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 엎드러져 밝기까지 엎드러져 있었다.”(26절). 잔혹한 상황에서 여자의 남편이 ‘주인’으로 언급되었다. 첩은 마치 남자의 착취 대상처럼 취급되어 더 처참하다. 더욱이 여자는 “첩”이라는 신분 때문에 법적인 아내보다 덜 중요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레위 남자는 자기 아내를 불량배들에게 넘겨 성적인 유희의 도구로 전락시켰고 기브아의 남자들은 한 여성을 집단 강간하여 성적인 학대를 자행했다. 이들 모두 남자의 우월성을 당연시한 사회의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민낯이었다. 사람이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했던(17:6; 21:25) 3천여 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의 참혹한 폭행은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가부장적인 위계질서의 강고한 문화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성서의 여성들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왜, 폭력의 지배구조가 주도하는 악하고 참담한 사건이 생략되거나 미화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왔는가. 악한 일에 대한 침묵과 회피와 방관으로 악이 반복되지 않게 하라는 부름 아닌가.

 

김순영/백석대 신학대학원 강사

posted by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