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톺아보기(27)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기

-한나의 아이 북토크


던져짐과 던짐 사이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보편적 운명은 불안이다. 동생을 죽인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서 '놋' 땅에서 살았다. '놋'은 '떠돌아 다님'을 뜻하는 말이다. 정주하지 못하고 떠돈다는 것, 흐름 위에 보금자리를 치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홀가분하지만 동시에 불안정한 삶이다. 찰라의 불꽃처럼 번뜩이는 기쁨은 있을지언정 지속적인 평강은 언감생심이다. '안식 없음', '고향 상실'이야말로 인간의 운명이다. 삶은 익숙한 곳에서도 늘 낯설기만 하다. 어느 누구도 삶에 대한 영원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은 순간순간 삶의 의미를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시간이 혹은 우리의 외부 세계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는 한계가 뚜렷한 자유이다. 나의 자유는 너의 존재 앞에서 비틀거리곤 한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을 가리켜 '내던져진 존재'라 말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왔다. 우리 삶은 필연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자유를 선고 받았으나,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난 일들로 인해 우리는 부자유하다. 운명의 잡아당기는 힘 앞에서 어떤 이들은 속절없이 끌려가고, 어떤 이들은 그 힘을 거슬러가며 자기 삶을 기획한다.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기 삶을 기획하는 존재인 것이다. '던져짐'과 '던짐'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인간 존재의 운명이다. 그 흔들림은 존재론적 불안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불안하기에 사람들은 불안의 대용물을 찾는다. 돈과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기도 하고, 늘 새로운 것에 몰두함으로 존재의 불안을 잊으려 한다. 하지만 '존재'가 아닌 '존재자들'은 우리 영혼에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늘 새로운 목마름을 안겨줄 뿐이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이성 3부작은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를 탐구한다. 그런데 이 세가지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관심한 것은 시민 사회 속에서 어떻게 손해보지 않고 자기 이익을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였지만,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 이래 철학의 과제는 인간 존재에 대한 분석에 바쳐졌다. 인간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20세기를 거쳐오는 동안 우리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탈리아의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그곳에서 겪은 비인간적인 현실을 글로 남겼다. 수용소에서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였다. 인간에 대한 모든 낙관론은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의 현실 앞에서 번번이 무너지곤 했던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괴롭힌 것은 '부조리'였다. 인간의 이성은 세상을 합리적 질서 안에 재배치하려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 질서에 포섭되지 않았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혼돈과 무질서, 그리고 의미 없음이 사람들을 확고하게 사로잡았다. 카프카의 작품 <변신>의 작중인물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문득 거대한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했다. <심판>의 작중인물인 요제프 K는 자기 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나찌의 수용소에서 한 줌의 재로 바뀌거나 세탁용 비누로 변한 사람들의 존재, 세월호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다가 속절없이 죽어간 사람들, 혹은 터키 앞 바다에 시체로 떠밀린 세 살박이 시리아 아이 아일란 쿠르디의 죽음은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기표로 서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거침없이 신앙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마치 신의 대변자라도 된 듯 모든 일이 신의 뜻 안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런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멀미를 하고 있는 인간 실존의 흔들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지혜이건만, 그들은 그럴 생각이 없다. 노자는 言者不知, 知者不言이라 했다. 美言不信, 信言不美라고도 말했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도 하지만, 벽이 되어 소통을 가로막기도 한다. 오늘날 종교적 언어는 다리로 작동하는가, 아니면 벽으로 작동하는가?


아름다운 삶의 본보기였던 욥은 하루 사이에 심연의 고통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친구들은 그를 다그치면서 죄를 토설하라 으르대지만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아파할 뿐이었다. 그를 괴롭힌 것은 육체의 고통만이 아니었다. 질서정연하던 세계가 무너지자 무의미의 심연이 그를 삼키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의 든든한 토대라고 믿었던 공평과 정의가 무너진 세상 앞에서 욥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많은 설교자들이 욥기 1,2장과 42장을 본문으로 택하곤 한다. 그곳에서 욥은 신실한 믿음의 태도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욥기의 핵심은 3장부터 41장에 이르는 대목이다. 욥은 자기가 태어난 날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법정으로 소환하려 하기도 한다. 심연과 심연 사이에 놓인 외줄 위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생존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쉽게 신의 은총에 귀의하려 하지 않는다. 그 까칠한 버팀은 친구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지만 욥은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욥기의 마지막 장에서 욥은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하고 고백한다. 욥은 마침내 자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가 깨달은 것은 세상에는 자기의 이해를 뛰어넘는 일이 많다는 사실과 인간은 그런 부조리함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얽혀 들어간다는 것

 

정답이 없다고 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해답이 없어도 생은 지속된다. 어떤 이는 망각의 기법을 동원해 인생의 의미 물음을 던지지 않고 사는 길을 택한다. 해야 할 많은 일들이 그로부터 '의미 물음'이 주는 불편함을 소거해간다. 하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심연에 숨겨진 어떤 핵심과 만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정신이 큰 사람들은 모두 무의미의 심연 혹은 영혼의 어둔 밤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존재 망각의 길이나 영웅적 정신의 길을 단호하게 추구하기 어려운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종교학자인 정진홍 선생은 "인간이란 희망이나 절망의 이원론적 서술을 벗어나는 다른 범주를 마련해야 비로소 서술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청계천이 피난민들의 거주지였던 때의 한 일화를 들려준다. 어느 날 그는 옷을 수선하기 위해 얇은 널빤지를 얼기설기 엮어 바닥을 만들고 두꺼운 종이상자로 벽을 세우고 그 한 부분을 잘라 창을 만든 허름한 집에 들어섰다. 엉성한 마룻바닥 밑으로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띈 것은 창턱에 놓인 녹슨 깡통이었다. 깡통에는 채송화가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그 때의 감동을 이렇게 전해준다."저는 그 아주머니께서 길거리에서 깡통을 주워 거기 구멍들을 뚫고 흙을 담고, 어디서 얻으신 것인지 채송화 씨를 뿌리고, 그것을 정성스레 양지 볕에 놓고 물을 주고 키워 마침내 노란 꽃이 피었을 때, 그때 당신이 그 꽃에 담았을 온갖 삶의 애환과 그 꽃에서 피어났을 당신 삶의 추억과 꿈을 어떻게 숨 쉬셨을까 하는 것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습니다."(정진홍,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청년사, p.412-413)그 아주머니는 궁핍한 시대를 멋지게 살아낸 삶의 시인이 아니었을까? 정진홍 박사는 그 때부터 그 꽃과 아주머니는 아름다움과 진실함과 착함을 가늠하는 잣대처럼 당신 안에 머물고 있다고 고백한다. 새로운 범주가 마련된 것이다. 기로망양岐路亡羊이라는 말이 있다. 갈림길에서 양을 잃었다는 말이다. 양을 우리가 붙들어야 할 생의 본질적 가치라고 한다면 수없이 많은 길이 교차하는 길목에서 우리는 그 양을 잃어버리기 일쑤이다. 그럴 때일수록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필요와 충족, 욕망과 쾌락의 원은 그의 실존의 모든 것을 담기에는 너무나도 좁다"((<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 4월 20일, p.56)고 말했다. 인간에게는 그런 것들로 충족될 수 없는 목마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알든 모르든, 우주적인 연극의 한 역을 맡는 것"(앞의 책, p.65)이라고 말했다. 정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한 방법은 누군가와 기꺼이 얽혀들어가는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은 참 난해하다. 누군지도 모르고, 언제 온다는 기약조차 없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막연히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쓸데없는 말장난을 해보기도 하고, 신을 벗으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무에 목을 맬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는다. 앞을 못 보는 포조라는 인물의 외침인데, 그 소리를 듣고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블라디미르는 고민을 하다가 에스트라공에게 말한다.공연한 얘기로 시간만 허비하겠다. (사이. 열띤 소리로) 자, 기회가 왔으니 그 동안에 무엇이든 하자. 우리 같은 놈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항상 있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지금 꼭 우리보고 해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놈들이라도 우리만큼은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보다 더 잘할 수도 있을걸. 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들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베케트, 133쪽)살려달라는 포조의 외침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대상은 동물이 아닌 사람일 테니까 인류를 향한 외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둘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싫건 좋건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쓰러진 사람 앞에 그들은 인류의 대표로 서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베케트가 암시하는 희망을 본다. 그는 삶의 무의미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누군가를 돌보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누구를 돌보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을 때이다. 진정한 경건은 돌봄으로 표현된다.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될 것인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의 말이 참 크게 다가온다. 그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떤 이야기, 혹은 어떤 이야기들의 일부로 존재하는가?’라는 보다 앞선 질문이 해명될 때에만 비로소 대답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auther)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오리지널'로 태어나 '카피'로 사는 것이 타락이라 했다. 옳다. 하지만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앞서 바른 길을 걸어간 이를 모방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를 '길'이라고 고백한다. 세상에는 많은 길(many ways)이 있지만, 우리에게 예수는 '그 길'(the Way)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기 자신을 '보냄을 받은 자'라고 표현한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하는 것을 자기 소명으로 삼는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10:10) 이 단호한 한 마디 속에 예수를 추동한 삶의 원리가 담겨있다. 그는 자기 앞에 현전하여 있는 모든 대상을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존재'로 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만나는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존재가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은 자들의 기쁨이 있었다. 자기 욕망 주변을 맴돌며 살던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아픈 사정을 헤아리며 살면서, 우정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자기 중심성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타자들 속에 숨겨진 신적 광휘를 보았다. 예수가 있는 곳에서 거룩과 속됨,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를 가르던 경계선은 철폐되었다. 경계선을 만듦으로써 자기 체제를 유지하고, 그 가운데서 자기 이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 체제의 토대를 흔드는 예수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의 손을 빌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제국의 토대를 뒤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민한 정치가인 빌라도가 몰랐을 리가 없다. 불의의 공모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스탠리 하우워어스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한나의 아이> p.375)이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제자들이 그 사람을 보고 묻는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 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9:2,3).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제기한 신학적 문제를 삶의 문제로 바꿔놓고 있다. 어차피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붙들려서 고통 당하는 사람의 현실을 해석의 대상으로만 삼지 말고, 그를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세상은 불의를 획책하는 이들과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시스템이 있다. 그것을 철저히 파헤치고, 더 이상 그런 불의가 작동되지 못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해야 할 일은 지금 여기서 고통을 당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그들 곁에 머물고, 그들이 가끔은 붙들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른다. 예수는 그 짐을 벗겨주기는커녕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따르라" 하신다. 예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에 짓눌려 허덕이는 이에게 십자가를 지라니 너무 가혹한 것 같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무게가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신앙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삶의 매순간이 제기하는 물음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러나 지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예수는 그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예수라는 푯대를 향해 걷기 시작할 때, 비록 흔들릴 수는 있어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그 길이 진리라고 고백할 것인가는 각자가 선택할 문제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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