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55)

 

‘쥐뿔도 없는 아모스’, ‘이름 없는 명문가’ (2)

 

아모스의 질타

 

죄를 지으면서 안전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아모스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들의 특권이 건설한 요새가 과연 안심하고 피해 있어도 될 자리인지 묻고 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심판이 오는 것을 경고한다.

 

너희는 망한다. 시온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사는 자들아, 사마리아의 요새만 믿고서 안심하고 사는 자들아. 이스라엘 가문이 의지하는 으뜸가는 나라, 이스라엘의 고귀한 지도자들아. 너희는 갈레로 건너가서 살펴보아라. 거기에서 다시 큰 성읍 하맛으로 가 보아라. 그리고 블레셋 사람이 사는 가드로도 내려가보아라. 그들이 너희보다 더 강하냐? 그들의 영토가 너의 것보다 더 넓으냐? 너희는 재난이 닥쳐올 날을 피하려고 하면서도, 너희가 하는 일은 오히려 폭력의 날을 가까이 불러들이고 있다. ……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말하였다. ‘선견자야, 사라져라! 유다땅으로 도망가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을 빌어먹어라.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말아라. 이곳은 임금님의 처소요, 왕실이다.’ 아모스가 아마샤에에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 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양 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하셨다’(아모스 6:1-3, 7:12-15).

 

그런데 아모스는 정작 이스라엘 출신이 아니라, 남쪽의 유다 출신이었다. 그러니 그가 이스라엘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하였다. ‘네 집구석이나 잘 챙겨,’ ‘네가 무언데 우리 집안을 헐뜯는가?’하는 비아양이 금세 그를 향해 반격처럼 꽂힐 그런 상황이다.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의 신흥 명문가 아마샤와 일대 대결을 벌이고 있으니, 이건 누가 보아도 싸움이 되지 않을 듯한 한판이다.

 

아모스가 예언활동을 한 시기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인데, 여로보암 2세는 엘리야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던 엘리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점지한 예후의 자손이다. 예후는 또 누구였던가? 이스라엘의 정신적 부패를 개혁하기 위해서 엘리사의 권고에 따라 일대 혁명을 일으켰고, 그로써 바알 숭배의 근본을 뒤집어 엎어버린 인물이었다. 그로써 이스라엘은 일대 영적 개혁의 시기에 들어갔고, 그의 집안은 이스라엘을 이끄는 새로운 가문으로 부상하였다.

 

이런 집안에서 자란 여로보암이기에 그에게 한 구석 기대를 걸 만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이스라엘은 주변 제국들을 제압하는 강국으로 융성함을 떨쳤다. 그래서 여로보암 2세의 치적은 남들이 넘볼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 치적과 융성함의 이면에는 정의가 짓밟히고, 정신적 타락이 만연하며, 강자가 약자를 능멸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현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모두 이런 것이 사는 것인가 보다 했고, 여로보암식의 지배에 저항하지 못했다. 나라는 비록 분열되었으나, 그래도 여로보암의 위대한 지도력으로 나라가 이만큼 잘 살게 되었고, 강국으로 주변의 경계심까지 일으킬 정도가 되었으니 국가권력의 정통성에 도전할 세력은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새롭게 세워진 베델의 성전은 여로보암 체제를 종교적으로 옹호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아모스라는 인물이 출현한 것이다. 여로보암 2세로서는 한참 끗발 좋게 잘 나가고 있는 판국에 웬 낮도깨비 같은 자가 나타나서 잔치 분위기를 흐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아모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부패와 부정과 타락과 부정의의 죄를 신랄하게 고발하기 시작했다. 그 예언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너희가 이 따위로 살면서 온전할 줄 아느냐?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리라고 여겼다가는 오산이다. 늦기 전에 돌아서라. 아니면, 모두 망할 것이다.”

 

이렇게 여로보암 가문을 비난하고 다니는 것을 아마샤가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혹세무민에다가 온갖 유언비어 그리고 왕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까지 함부로 하고 다니는 이런 자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마샤는 아모스의 입을 막으려 한다.

 

“유다 출신 주제에 어디서 와서 행패냐? 여긴 너 따위가 입을 벌리고 다닐 그런 땅이 아니다. 너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명문가의 왕이 계신 처소요, 왕실이다.”

 

아마샤는 아모스가 왕에게 반역하고 있다고 경고하는데, 정작 그는 왕이 하나님에게 반역하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쥐뿔도 없는 아모스’, ‘이름 없는 명문가’

 

그때 아모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무슨 말인가? ‘아마샤, 너는 베델의 명문가 제사장이라고 뻐기는구나. 그래 나는 무슨 이름난 예언자도 아니고, 또 누구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은 바도 없다. 나는 명함 한 장 없다.’ 그리고는 이어 이렇게 자신을 묘사한다. ‘나는 집짐승이나 먹이고, 돌 무화과나 가꾸는 천한 놈이다.’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그래, 나는 네가 보기에 밥이나 빌어먹게 생긴, 쥐뿔도 없는 놈이다. 그런데, 그런 천한 놈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내리셔서 역사의 현장으로 불러내셨다.’

 

아모스는 이런 말도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을 가로막느냐?’ 그가 자신을 불러내신 하나님의 행위를 ‘붙잡아 내셔서’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들판에서 계속 그대로 양을 치고 과실수를 가꾸는 일에만 묻혀 있기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드신 하나님의 영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마샤는 아모스의 초라한 행색과 그 출신을 보고 능멸하였으나, 아모스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이 ‘쥐뿔도 없는 아모스’가 그 대단한 명문가의 세도와 맞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광경은 눈부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저지할 수 없는 위엄과 생명의 영력이 그의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이 부러워하는 너희의 삶이 사실은 망할 길을 재촉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자의 삶이 도리어 죽을 길을 달려가고 있다는 경고’, 이것은 실로 특권에 대한 역습이다.

 

아모스는 이를 불평등이라든가 아니면 부정의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문제로 우리들에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특권은 죽음이고, 특권의 폐지는 생명이다’라는 결론이다. 쥐뿔도 없는 자가 도리어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특권을 화려하게 누리고 있는 자가 이미 죽음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밥이나 우선 먹고 보자’와 ‘정의를 먼저 세우자’의 싸움이기도 했다. 배가 고플 때 정의는 사실상 생각하기 어렵다. 반면에, 배가 부르면 정의는 거의 불가능해진다. 부정의하게 유지해온 것을 그대로 움켜쥐고 유지하느라고 더 큰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체질이 이미 그렇게 먹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정의로운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정의가 없는 배부름은 모두를 결국 타락하게 하고 죽음의 길로 이끌지만, 정의가 있는 배고픔은 순결한 훈련과 감사의 과정이 되며 정작 배가 찼을 때 정의로운 능력을 지니게 된다.

 

정의를 잃어버린 풍요의 비극

 

오늘날, 이 나라의 되어가는 형편은 정의를 잃어버린 풍요의 비극이다. 그리고 그 풍요조차도 지금은 불확실한 상태에 놓여 있다. 세월호 사건은 그 단적인 예이다.  정의를 떠난 풍요를 향해 온 사회가 질주하는 것은 잠시의 배부름을 가져다주고 명문가의 세도를 누리게 해주는 듯하지만 결국 죽을 길을 재촉하는 일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일깨우신다.

 

가난한 자에게 인정을 베풀고, 힘없는 자를 짓밟지 않고, 부정의한 길로 가문의 세도를 부리는 이들을 결코 존경하지 않으며, 술수와 권력과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일을 단호히 거부하고 가진 것으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는 일을 게을리한 사회는 병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하여, 인간의 성공과 실패는 세상의 논리로는 그의 지위나 달성한 목표가 기준이 되지만, 진정한 기준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의 존재 내면에 타자에게 나누어줄 만한 인격적, 영적, 정신적 힘이 얼마나 있는가가 더 중요한 내용이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그 마음이 교만하고 편협하면 그 지위는 오욕의 현장이 된다. 아무리 성취가 대단해도 그 영적 내용물이 천박하면 그는 헛살았다고 할 수 있다.

 

상처 받아 신음하고 있는 자를 위해 그가 얼마나 위로와 치유의 능력이 있는가, 절망의 나락에 빠진 이에게 뜨겁고도 실질적인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앞을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빛이 되는 지혜를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인가, 미움과 대결의 현실에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인간의 마음을 한없이 겸허하게 그리고 온유하게 만드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가, 열정이 다 식어버린 곳에 다시금 재기의 열망을 불어넣는 영적 강렬함이 있는가, 재빠른 계산과 이익에 눈이 어두운 현실에서 굳건한 양심과 순결한 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그가 나타나면 갈라졌던 이들의 사이가 하나가 되고, 그가 나타나면 침울했던 자리에 활기가 돌고 그가 나타나면 답답했던 심정이 뻥하고 뚫릴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멋진 인간이 될 것인가, 이것이 무한경쟁 시대에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며 풍요와 가난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이에 실패한다면, 열매가 별로 많지 않거나 또는 그 맛이 별 볼일 없어 힘만 들고 망쳐 버린 포도농사를 한 셈이다. 포도열매를 내놓아야 할 계절이 왔음에도 내놓을 것이 없어 막막해지는 자의 신세가 되는 것이다.

 

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

 

시인 도종환은 <나리소>라는 제목의 시에서 어떤 깊고 잔잔한 못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의 뜻을 묻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나릿재 밑에 있는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 한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영혼의 선함이 같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 존재에게서 나오는 힘이야말로 세상을 진실로 감동시키고 또한 새롭게 할 수 있음을 그는 믿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특권이라는 이름으로 높은 곳에서 요란해진다. 그곳에서 자신의 선함을 버린다. 자신의 반짝거림을 내세운다. 사랑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가짜가 되는 것을 우리는 무수히 목격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 잘난 여로보암과 그 대단한 아마샤가 보기에, 아니 스스로 보기에도 내세울 것 없는 아모스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일에 자신을 다하는 자가 진정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세상이 아무리 대단한 명문가처럼 여겨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소용이 없음을 깨우쳐야 한다. 세상이 우습게 여겨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셔서 ‘이름 있다’하시면 그 이름이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인류의 명문가가 되는 것이다. 그 명문가는 특권을 누리는 가문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이들의 집안이다. 한마디로 ‘이름 없는 명문가’이다.

 

우리 민족도 그런 비전을 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름없는 명문가! 그것은 네모난 삼각형, 각이 진 동그라미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총이다. 또다시 새롭게 주어진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무한경쟁 시대, 이름없이 빛도 없이, 바벨탑을 향한 특권을 소멸시킬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우리들이 그런 일에 의미있게 쓰이기를 기도하는 민족이 될 수 있기를 힘써야 하지 않을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이름없는 자 같으나 이름있는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모두를 풍요하게 하는 자요”라고.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특권의 위계질서, 이름없는 명문가(1)  http://fzari.com/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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