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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

이런 여자 어디 있나요?

by 한종호 2016. 10. 14.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12)

 

이런 여자 어디 있나요?

 

 

그대, 여성들이여 슈퍼 우먼을 꿈꾸는가? 그대, 남성들이여 슈퍼 우먼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은가? 그대의 아내가 슈퍼우먼이기를 바라는가? 슈퍼우먼은 집안일과 바깥일을 유능하게 잘 해내는 여자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아내와 어머니로서 가정을 잘 돌보고 바깥일을 척척 해내면서 사회적인 존경까지 받으며 역량을 발휘하는 여성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은 남성들에 비해 매우 낮다. 이유는 조직사회의 보이지 않는 높고 두꺼운 무형의 장벽, ‘유리천장’ 때문이다. 그럼에도 강고한 장벽을 깬 여성들의 고된 노력은 종종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는데,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낸 여성들의 흔적은 생각보다 훨씬 먼 과거로 떠나야 하는 여행이다.

 

가부장적인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감은 격하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치 섬광처럼 존재의 흔적을 남긴 무명의 평범한 여성이 있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그녀의 비범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여성의 활약상은 구약의 잠언서 맨 끝자락에(잠언 31:10-31) 소개되었다. 이 여성의 묘사는 히브리말 자음 21개의 순서를 따른 알파벳 시로 전해졌고, 이른바 ‘현숙한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시의 제목처럼 자리 잡은 잠언 31장 10절의 히브리말 첫 자음의 첫 문장은 “현숙한 여인을 누가 찾겠는가?”라는 질문이다. 직설적으로 들리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다는 대답을 유도하려는 듯 수사학적인 의도성이 짙다. 그 의도성은 이어지는 소절, “그녀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다”라는 말에서 곧바로 드러난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그녀의 가치는 산호보다 더 멀다”라는 말이다. ‘현숙한 여인’(문자적으로 “유능한 여자”)을 찾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뜻이다. 집과 재물은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부터 온다(잠언 19:14)라는 지혜자의 말대로 쉽지 않다.

 

그런데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얻은 사람이 있었다. ‘현숙한 여인’의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 남편은 진심으로 아내를 믿으며 산업이 핍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11절). 이 여성은 사는 동안 남편에게 선을 베풀며, 해를 입히는 일도 없다(12절). 남편은 마을 원로들과 성문에 앉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까지 한다(23절). 성문은 고대 사회에서 상업적인 거래가 이루어지고, 지역 사회 소식이 오가며 법적인 다툼을 해결하는 공공의 장소다. 이 남자는 공적인 장소에서 아내의 수고로움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그러니 그녀의 남편이 진심으로 자기 아내를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나. 남편은 아내의 유능함에 기대어 사는 남자로 보인다.

 

그러면 이 여성은 어떤 일을 하는가? 가족을 위해 양털과 아마포를 구하여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일하기를 즐겨한다(13절). 상인처럼 먼 거리 무역을 한다(14절). 동터오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여종들에게 일을 맡기며 집안일을 챙긴다(15절). 자기 손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포도원을 가꾼다(16절). 그녀는 허리를 졸라매고 자기 팔의 힘을 강하게 한다(17절). 활기찬 노동을 위해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모습이다. 그녀는 한 손으로 물레질을 하고, 다른 한 손으로 실을 타고(19절), 장사를 위해 밤에도 일한다(18절).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갖 종류의 궂은 노동을 거침없이 해내고 식솔들을 관리하는 경영능력까지 겸비한 모습이다.

 

맹렬하고 유능한 이 여성은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홍색 옷을 입히고, 아름다운 이불을 짓고, 가족들은 그녀가 만든 따듯한 의복 때문에 눈이 와도 염려하지 않는다(21절).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세마포 옷과 자주색 옷을 지어 입기도 한다(22절). 가족을 위한 옷을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시장 상인들에게 팔기도 한다(24절). 옷을 만들고 고운 색상의 옷감을 생산하는 일까지 해내는 이 여성의 활동은 가족의 범위를 벗어났다. 리넨과 자주색 옷을 입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재력가다.

 

그러나 그녀가 받을 영광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가난한 자에게 “자기의 손”을 편다. 그녀는 궁핍한 자에게 “자기의 팔”을 뻗는다(20절). 그녀는 부지런히 일한 것으로 자기만의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자본이 아닌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경제적인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력의 사용처가 가난한 자들을 향해 있다. 이 여성의 능력이 긍휼을 베푸는 것에서 절정을 이룬 셈이다. 그러니 지혜시인의 말대로 그녀는 “힘과 존귀”의 옷을 입었다(25절). 이 여성의 매력은 고운 색상의 비싼 옷이 아니라, 힘과 존귀의 옷이었다.

 

지혜 시인은 그녀의 노동과 자선행위만이 아니라 그녀의 언어행위를 언급한다. 이 여성은 입을 열면 ‘지혜’와 ‘인애의 가르침’이 쏟아진다(26절). 지혜는 시대의 금언들을 생산한 지혜자들이 추구하고, 요청하는 삶의 가장 고귀한 가치다. 그런데 이 여성은 이미 ‘인애의 가르침’(개역개정, “인애의 법”)을 말하고 생산하는 지혜 선생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가르침의 대상이 누군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가족의 범위를 벗어나 공적인 가르침을 수행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가르침의 내용은 ‘인애의 법’이다. 인애로 표현된 히브리말 ‘헤세드’는 구약에서 개인 또는 공동체의 의무와 책임, 성실, 변함없는 사랑, 호의, 자비, 선한 행위와 관계된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향해 쏟으신 지속적인 사랑과 은총의 표현이요, 재난과 억압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신 행위와 관계된 말이다. 이 때문에 잠언서의 지혜자는 “인애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3:3)고 권했다.

 

그러니까 이 무명의 여성은 고대 지혜자들이 추천하는 가치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면서 즐겁게 노동하는 사람이요, 행동하는 실천가였다. 때문에 지혜 시인은 무명의 유능한 여성을 알리면서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움도 헛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는다”(30절) 라고 노래한 것이다. 지혜시인은 여성을 몸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지혜 실천의 주체로서 여성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거나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여겼던 가부장적인 여성 개념을 초월한 시각이었다.

 

지혜시인은 “그녀의 손의 열매는 그녀에게 주어라, 그녀의 행한 일을 성문에서 ‘칭송하자’(할렐루하)”(31:31)라는 말로 잠언서를 끝맺는다. 잘못 들으면, “할렐루야”로 들리는 이 말이 남성중심의 고대사회에서 가능했을까. 그 현실성에 의문을 남긴다. 하지만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자들보다 몇 배의 고된 수고로움이 있어야만 여성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현실 고발 같기도 하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는가?”(31:10)라는 지혜시인의 첫 마디도 그렇지 않은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를 향한 칭송처럼(30절) 주님을 두려워하는 삶은 여성 명사 ‘지혜’ 추구의 시작이기에(1:7; 9:10), 삶의 이상적 가치는 지혜 실천과 맞닿아 있다. 그러니 이 노래를 “현숙한”(히브리말, “하일”) 여성의 모범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지혜 실천을 위한 호소로 읽어야 한다. 히브리말 성경 맛소라 텍스트 순서상 잠언서 뒤에 위치한 룻기는 룻의 남편 보아스를 “유력한”(히브리말, “하일”) 남자로(2:1), 룻을 “현숙한”(“하일”) 여자로(3:11) 동등하게 묘사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현실세계에서 지혜 실천과 이상은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하여 잠언서의 ‘현숙한 여인’의 시가 아내들의 희생적 내조를 신앙의 이름으로 강요하는 설교재료로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김순영/백석대 신학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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