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종교회복이다

- 종교개혁 499주년을 기념함 -

왜 종교개혁이 일어나야만 했는가?

 

자유인교회엔 네 가지 기념주일이 있다. 창립기념주일, 부활기념주일, 종교개혁기념주일, 성탄기념주일이다. 특별한 행사를 따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특별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기념(記念)’이라 이름 붙인 말 그대로 오래도록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겨 간직한다는 뜻이 있다. 네 기념일이 다 의미가 깊지만 개혁주의 목사로서 그중에서도 가장 기념할 주일을 꼽으라면 나는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기념주일을 꼽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하면, 종교개혁의 역사가 없었다면 우리들 프로테스탄트 교회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사실은 언제나 선행되는 세 가지 질문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곧 1)종교란 무엇인가? 2)왜 종교개혁이 일어나야만 했는가? 3)종교개혁의 결과는 무엇인가?

 

첫 번째 종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해볼 수가 있겠다.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반대급부다. 그 무엇인가란 지금 지배적인 현실, 조건, 상태 같은 것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종교란 기본적으로 반현실적인 것, 현실에 대한 반대급부인 것이다. 왜 그러면 이러한 종교라는 반대급부가 필요할까? 그것은 이 세상 현실이 사람이 존재하고 생존을 유지해 나가기에 합당한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는 유한하고, 시간은 종말론적이며, 환경은 잔혹하다. 종교는 이러한 인간의 조건, 유한성, 가혹한 노동, 죄와 악, 타락과 부패, 폭력과 지배, 병과 죽음, 곧 모든 부자유에 대한 반대급부(자유)로 존재하고 반대급부로 존재함으로써만 본질적 의미를 갖는다.

 

그 반대의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예컨대 도피이거나 저항이거나 초월이거나 수용이거나. 그러나 단 한 가지 방식만은 예외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타협. 한편 되기. 현실의 반대급부로서만 의미를 갖는 종교가 현실과 타협하거나 한편이 된다는 것은 존재자체의 의의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부턴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나 존재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없다. 그런 것은 오히려 더욱 더 악착같이 존재한다. 그럴 때 그러한 종교의 반종교적 현실 속에서 우리는 ‘2)왜 종교개혁이 일어나야만 했는가?’에 대한 대답을 발견한다. 그리고 2)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을 때 ‘3)종교개혁의 결과는 무엇인가?’의 그림도 그려볼 수 있게 된다.

 

종교개혁 전야에 유럽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교황권력을 필두로 한 지상의 모든 권력은 현실의 반대급부로서의 종교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모든 지상의 권력에 대한 종교의 스탠스에 대해 철저히 반대로 존재하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기엔 반대급부라고 할 만한 종교가 없었다. 세상 권세들은 자기들의 권력을 매개로 혹세무민의 전횡을 일삼았다.(권력은 멀쩡한 사람들을 얼마나 일상적인 바보로 만드는가!) 무지와 미신, 사악함과 부패, 수탈과 탄압, 성직매매, 가렴주구, 우상숭배, 사단적 갑질들이 도처에서 횡행하고 있었다. 민중들은 이런 세상 돌아가는 사태가 도대체 왜 이런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누구라 지목할 수도 없는 권력들이 혼돈스럽게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때, 종교개혁의 선각자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이 그러한 현실의 반대급부로서 개혁의 불을 질렀다. 그들의 도구는 설교(성서)였다. 말씀을 통한 성령과 불의 세례를 통과한 민중은 오랜 무지와 혼동의 잠에서 깨어났다. 그 결과 개혁운동은 신학적이고 영적인 운동으로 시작됐지만 나중엔 중세 로마카톨릭 체제와 봉건 사회를 붕괴시키고 민족주의와 휴머니즘, 시민혁명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사회적 제도적 사상적 예술적 결과로 진전되어 갔다. 곧 종교개혁의 여파로 발생한 정치 사회 제도 사상 예술의 본질이 무엇이냐? 현실(죄와 악과 그로인한 모든 부자유)에 대한 반대급부(자유선언)였던 것이다. 이것이 종교라는 영성의 역동하는 흐름이다.

 

 

<John Calvin by HolbeinWikipedia>


 

종교개혁이 던지는 질문

 

오늘은 499주년 종교개혁기념주일이다.(기념일은 10월 31일) 지난해 마르틴 루터에 대해서 설교했기 때문에 올해는 존 캘빈에 대해 설교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가롭게 역사를 탐방하며 낭비 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느꼈다.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 주역인 인물들에 대해 추적해 보는 것은 흥미롭고도 중요한 일이다. 개인사나 가족사나 세계사나 실재했던 사실들을 아주 망각해 버린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작은 애석함에 매달려있을 여유가 없다. 종교개혁 당시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 우리 현실의 역사 속에 마치 종교개혁 전야와도 같은 사악함과 부조리와 부패와 혼동이 대한민국 전체에 만연돼 있기 때문이다. 언제는 기득권과 권력이 깨끗하고 명백하고 정의로웠던 때가 있었던가? 문제는 종교다. 지금 가장 중대한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현실의 반대급부로서 존재하는 종교가 실종됐다는 점이다. 그것이 도피든 저항이든 초월이든 대안적으로 기댈만한 종교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든다.

 

이 전대미문의 사태를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저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도 난감할 것이다. 엊그제 페이스 북에는 외국인 남편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설명하는 데 대한 난감함에 대한 글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남편들이 자기들의 설명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웃어야할지 울어야 할지,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그런데, 최순실 게이트가 마침내 백일하에 드러나고 가련한 금치산자 대통령이 초췌한 모습으로 2분짜리 녹화 사과를 한 이후 한국교회의 대표를 자처하는 한기총과 한교연은 곧바로 개헌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일종의 물타기 성동격서의 방식으로 대통령 구하기에 나선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여당의 일각에서도 대통령 퇴진주장이 나오고 있는 판국에 왜 하필 교계의 대표자라는 위인들이 대통령 살리기에 나서고 있는 것일까? 처음 던졌던 질문을 조금 다르게 다시 던져보자. 1)그들에게 종교란 무엇일까? 2)지금 종교개혁은 왜 필요한가? 3)종교개혁의 결과는 어떤 것일까? 아마 그들도 오늘 종교개혁을 기념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기념해야할 종교개혁은 이러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기념이 아니라면 그것을 기념해야할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두 가지 방식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는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좋은 방식이고 하나는 나쁜 방식이라고 했다. 좋은 방식은 (히브리서 13:7~9)의 방식이고 나쁜 방식은 (마태복음 23:29~33)의 방식이다. 각각 말씀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브리서 13:7~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태복음 23:29~33)

 

첫 번째는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왜 일어났나 하는 그 연원을 추적하고 그 과정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오늘의 현재를 되돌아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모든 역사의 본질을 지우고 엉뚱한 기념식과 엉뚱한 기념사업으로 그 본질이 망각되도록 대체해 버리는 것이다. 첫 번째는 현실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종교의 회복을, 두 번째는 현실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종교의 왜곡을 나타낸다. 지금 우리는 이 두 가지 방식의 종교개혁 내지는 신앙적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그리고 우리시대의 교회를 대표한다는 자들은 대개 두 번째 그룹에 속해있고 나머지는 침묵 속에 잠들어있고 첫 번째 태도는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이로써 종교개혁 499주년을 기념하는 우리가 이제부터 진실로 기념하고 간직하고 전개해 나가야할 종교개혁의 모습이 어떠해야할 것인지 그림이 명백하고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필요성

 

오늘날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하는 필요는 무엇인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봉화를 들어올리기 전과 같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기독교인들이 참으로 무지하고 뒤떨어져 있으며 문맹(文盲)들이기 때문이다. 문맹이라는 표현은 역시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게 주장될 수 있다. 첫째는 문학적이고 둘째는 종합적 의미다. 실제로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제대로(전체적으로) 읽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전체적인 신앙생활이 왜곡되고 있는 것을 읽어내지 못한다. 이 두 가지 의미의 문맹이 만들어 내는 현실이 도덕적 상태의 현저한 하락이다. 과거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든가 성실하고 진실하다는 평가를 받아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 기독교인들은 스스로가 자긍심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자긍심이 뭔지도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우리들 자신의 종교개혁(믿음)의 제1의는 무엇인가? 우리가 믿었을 때 그 사실이 가지는 첫 번째 의미는 그것이 우리들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거기로부터 전진해 온 것이다. 그러한 영적 인격적 도덕적 새 출발을 가능케 했던 동력은 무엇이었던가? 복음의 말씀(성서)이었다. 특별히 그 복음의 말씀이란 1세기에 지상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한 󰡔복음서󰡕를 포함한 󰡔신약성서󰡕를 말한다. 이 󰡔신약성서󰡕의 복음의 말씀을 통해 첫째로 이 말씀들에 대해 각성했고 각성되자 그 말씀이 우리의 삶으로 들어왔다. 그러한 변화의 상태는 세상의 세상적 존재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어서 누구나 ‘나는 확실히 달라졌다’고 자신의 변화를 고백할 수 있었다. 이러한 ‘나는 확실히 달라졌다’는 신앙고백이 곧 ‘구원의 확신’이다. 이 구원의 확신이 우리의 진로를 실제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고 그 바꾸어진 진로란 세상 현실의 반대급부로서의 새로운 신앙의 현실이다. 그것이 타협이나 한편 되기만 아니라면 도피이든 수용이든 저항이든 초월이든, 이 공식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그리고 이것이 종교개혁이다.

 

루터나 츠빙글리 캘빈 존 낙스 같은 위대한 종교개혁자들 역시 그들의 시대에 세상 현실로부터 신약성서의 믿음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말씀에 대한 각성이 일어났고 그 자신들이 맨 먼저 그 메시지로 돌아갔다. 그러자 성령이 그들을 사용해 문맹 상태에 놓인 민중들을 각성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단지 신약 성서를 바르게 읽고 해석하고 설교했을 뿐이다. 그것이 세계(현실)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다. 어디를 향한 진로로 바꾸어 놓았나? 노예해방, 봉건전제의 타파, 절대왕정의 붕괴, 독재의 몰락, 민주주의, 인권, 자유, 평등, 비폭력, 노동조합, 여성해방, 인종차별 철폐와 장애인에 대한 권리, 지방자치, 반전운동, 환경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덕성의 제도화로 인류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다. 도덕성의 제도화가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천국)는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말씀)으로 인한 변화와 그 변화를 각성 시키는 설교(성령의 역사)로 구현되는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도덕성이 제도화되는 세상을 건설하도록 우리를 전진시킨다.

 

재확인이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하는 필요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기독교인들이 참으로 무지하고 뒤떨어져 있으며 문맹(文盲)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맹의 현 상태와 우리가 여기에 이르게 된 과정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1)세속화(사두개주의) 2)도덕화(바리새주의) 3)초월주의(혼합주의) 4)종교성 상실의 상태와 순서로 정리해 설명할 수 있다.

 

  1)세속화(사두개주의)

 

교회는 80년대를 정점으로 자본주의 세계화에 편입된 한국사회와 맞물려 지난 30여 년간 급속하게 세속화 되었다. 이른바 ‘오중복음(중생, 성령충만, 신유, 축복, 재림)’과 ‘삼박자(영혼, 물질, 건강) 축복’으로 대표되는 순복음식 번영신학은 십자가의 자기부정이 아니라 반대의 욕망긍정을 정당화 시켰다. 처음엔 이에 대한 신학적 반대와 백안시로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이단으로 정죄되기까지 했지만 결국엔 한국교회 전체가 도리어 순복음에 굴복되는 역전이 벌어졌다. 조용기 목사는 한때 자신을 한국교회라는 골리앗과 싸우는 ‘조다윗’이라 불렀었다. 과연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에 방불할 역전이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영적 혼탁이 생겨났다.

 

긍정주의 일변도 신앙의 열매는 확실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지만 그 맛에 취하면 취할수록 세속화는 가속화됐다. 부흥열, 건축열, 대형교회의 출현, 온갖 부패와 금품 스캔들, 권력형 정치목사들의 출현, 교회 안에서 예언이 사라졌다. 담임목사들은 회사의 경영자들이 되었고 부목사들은 직원이 되었다. 경영학, 교회성장학, 상담, 심리, 처세술, 온갖 마인드 컨트롤이 기독교 메시지를 대체했다. 예배에서 설교(성서)의 비중은 줄고 찬양과 기도, 이벤트 등의 비중은 늘어났다. 이러한 세속화의 요소들은 현실긍정과 성공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정당화되었고 복음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현실의 권세 곧 보수적 세속 기득권과 교회의 정치적 연대가 점점 공고해져갔다. 결국 기득권과 교회의 이해타산은 일체화 되기까지 이르렀다.

 

2)도덕화(바리새주의)

 

도덕화는 세속화에 대한 반발로 생겨났다. 그것은 세속화된 자신들 내부에서도 나타나고 그들을 반대하는 그룹들 속에서도 나타난다. 도덕화가 내부에서 나타날 때 그것은 무의식적 콤플렉스를 가리는 소도구로 잠시 사용될 뿐이고 그것이 전체 메시지나 메시지가 지시하는 삶의 강조된 내용은 아니다. 흔히 ‘~~해야 한다’로 설교되는 도덕화된 메시지는 세속화된 욕망을 정당화시켜주는 명분으로 작동한다. 더 나아가면 그것은 아예 교회의 세속적 목표달성(예컨대 건축헌금 모금 같은)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세속화를 반대하는 그룹에서의 도덕화 역시 문제를 가진다. 문제란 그들에게 강조되는 것이 다름 아닌 도덕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예배는 지루하고 숨막히는 윤리강론 시간이 되고 신앙생활이란 항상 뭔가 도덕적인 교훈이나 거기에 맞는 삶의 실천을 발견해내어야만 하는 고루한 것이 되고 만다. 그들은 흔히 세상을 어두운 죄에 그늘로 인식하며 그러한 인식을 지닌 자신은 의롭다는 식의 바리새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바리새주의야말로 그 자신에게 어두운 그늘이 되고 자기를 얽어매는 구속복이 되기도 한다.

 

3)초월주의(혼합주의)

 

초월주의라는 명칭은 이들이 스스로를 사두개주의적 세속화와 바리새주의적 도덕화로부터 벗어난 참된 복음을 가졌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들은 오로지 자기들은 복음의 말씀에 천착한다고 주장한다. 신앙생활에 있어 성서에 대한 해석이나 설교를 대단히 중요시한다. 그 결과 탁월한 복음을 강론하는 설교자 목사가 각광을 받고 그를 중심으로 이른바 마니아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이들을 초월주의라 명명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추상적이고 관념화된 복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느라 현실로부터 말그대로 초월(도약)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발을 땅에 붙이지 않고 사는 사람들처럼 복음을 이야기한다. 자기들이 말하는 그 복음을 알아야만 하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이 아닌 거라는 배제와 배타가 중요한 결집의 논리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들을 다시 혼합주의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그들 역시 세속화를 피할 수 없고 도덕화된 자기율법 안에서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바른 복음을 가진 매우 특별한 부류라고 믿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이고 착각 같은 것일 뿐이다. 만일 그들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그런 말 자체가 거짓된 것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을 것이다.

 

4)종교성의 실종

 

종교성의 실종은 선행된 세 가지의 결과로 나타난다. 선행한 세 가지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진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그들은 자신을 정통적이라 불리는 교회 안에서 혹은 교의 안에서 발견할 수 없고 자주 그것을 벗어난 지점에서 자신을 발견하곤 스스로 충격을 받는다. 그는 자신을 여전히 그리스도인라고 할 수 있을지 회의를 느낀다. 그는 어떤 때는 자신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여기기도 하고 혹은 그런 것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종교적으로 매우 성숙해졌다고 느끼기기도 하고 동시에 신앙을 상실했다고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Marein Luther by Lucas Cranach, Wikipedia>


 

종교개혁은 종교회복이 되어야

 

며칠 전 JTBC뉴스에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이야기가 등장했다.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 장면에는 주인공 청년이 애인과 통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애인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데 주인공은 대답할 말을 잃는다.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는 그렇게 대답한다.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는 <상실의 시대>를 누군가 패로디한 <순실의 시대>란 그림을 띄웠다. ‘순실의 시대’란 곧 ‘상실의 시대’인 것이다.

 

세속화, 도덕화, 기만적 자기초월의 과정을 거쳐 우리 기독교는 어느새 종교성을 상실한 상실의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우리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시대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무엇보다 기억해야할 것은 종교개혁자들은 다음의 두 가지를 일깨워주었다는 점이다. 참된 1)종교성과 함께 2)경건함을. 1)종교성이란 현실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자기부인의 항상 깨어있는 비상한 정신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알고자하는 마음이다. 존 캘빈은 인간의 제1의 목적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했다. 경건함이란 그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태세를 유지하기 위한 겸손함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성이란 이 두 가지가 어우러진 경건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상태를 가질 때 우리는 그것을 종교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실은 종교회복이라고 불러야 더 마땅할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물론 <신약성서>를 가지고 싸웠다. 그러나 그들이 신약성서에서 발견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는 단지 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성이며 경건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종교성과 경건함으로부터 구원의 확신이 나왔고 그 구원의 확신이 그들로 하여금 모든 반종교성 반경건의 세속화, 도덕화, 자기초월, 종교성 상실의 현실과 분명하고 명백하게 싸우게 하였다.

 

우리는 더 이상 직설적으로 교회에 나오라 권면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못한 처신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의 시대를 살고 있다. 교회에 나오라 권하는 대신 교회에 나오든 안 나오든 어디에 있든 그리스도인으로(?) 살수(도?) 있다고(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교회에 나오라고 권해보았자 그들이 교회 와서 배우는 것이 위의 네 가지 상태 중 하나라면 의미가 없다. 혹은 교회 밖에서도 얼마든지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다 말은 한다지만 과연 그 말의 실효성은 어떨까? 아무튼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게도 못하고 설명하지도 못하는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타나신다고 해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란 절망감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은 우리들 자신이 종교개혁 내지는 종교회복의 필요 앞에 직면하고 있음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해진다면 우리는 세속화되지도 도덕화되지도 초월적 자기기만에 빠지지도 종교성을 상실하지도 않고, 세상의 실제적 변화의 원리로 작용하는 현실의 반대급부로서의 종교성과 믿음 안에서 그 영감(靈感)을 은혜로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을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종교개혁은 곧 종교 회복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 역사와 사회는 이러한 종교회복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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