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김기석 목사님 신간 《아! 욥》-

1.

김기석 목사님의 「욥기 산책」 《아! 욥》을 일부러 느리게 읽는다. 나는 요즘 속력에 대한 무서움을 느끼고 있다. 속도가 만드는 이차적 징후들. 주마간산(走馬看山). 모든 것이 최소화다. 생사사생, 성사사성(生事事生 省事事省), 부끄러운 일이지만 매사 어찌하면 힘을 덜 쓰나하는 게 일상이 된 것 같다. 우선 몸이 아팠고(겉으로 보기엔 멀쩡한데, 이명(耳鳴)이 심하고 머리가 꽉 막혀 쓰러질듯 어지럽다.) 그래서 늘 피로해 뭔가 힘을 쏟아 집중한다는 게 힘겨웠다.

 

연암선생(朴趾源, 1737~1805)이 그랬다지. 한 달 보름씩 세수도 수염도 깎지 않고, 누구볼 일 어디 갈 일, 인사치레 체면치레, 일가친척 사람노릇까지 팽개치고, 그저 툇마루에 앉거나 벌러덩 누워 하릴없이 묏풍경이나 바라보고 있던가, 갈 길이 멀고 바쁜 박물장수를 공연히 불러다 앉히고 객쩍은 세상 이야기나 엿들으면서, 그런 자신을 또 한심해하기도 하고 다행으로 여기기도 하고.

 

나는 그 정도까진 못되어 자주 피로한 몸을 누이고 쉬면서 몸의 고통을 줄여 보느라 뉴욕의대 존 사노 박사의 《통증혁명》에서 읽은 대로 TMS(Tension Myositis Syndrome, 긴장성 근육통 증후군)개념을 내 몸에 대입시키느라 또 남은 힘을 쏟아보곤 하였다. 보내주기로 약속한 책들 약속도 못 지키고, 써주기로 약속한 글도 못쓰고(생각해 보니 사람 노릇이 아니다.), 남의 말을 듣는 것도 건성건성, 글을 쓰는 것도 건성건성, 아내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대충대충인 식이었다. 이 건성건성과 대충대충이 무서웠다. 대충 듣고 건성으로 알아들은 척 하며 ‘응응 그래그래 그렇죠 뭐 세상일이 별거 있나요 허허허…’ 하면서 하루가 일주일이 휙휙 지나가는 그 속력이 무서웠다.

 

 

 

 

2.

구약성경 「창세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만물의 기원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기인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나타난 모든 것은 지어짐으로 말미암았고, 그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가 계신다는 유일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런 공허한 말이 또 무슨 대수인가. 중요한 것은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당신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함께 (이런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이 사실이다. 이 사실이 우리의 공통의 이해력 안에서 우리의 존재의 원리로 승인될 수 있고, 이 공통의 원리가 가장 실용적이며 가장 최고로 요청되는 지혜이며, 윤리적 선이 된다는 사실뿐이다.

저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에 계신 하나님. 수천억 원을 쏟아 부은 포스트모던의 건축물 가운데 현대식 영광을 받는 하나님이 아니라 말 그대로 베들레헴 말구유에 소박하고 가난한(벌거벗은!) 사람의 아들로 오신 하나님. ‘하나님은 모든 신학적 성찰을 지배하는 기초적인 원리’라고 할 때 그 하나님은 교의의 사원에 안치된 최고신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을 향한 겸손의 가슴에 깃든 서로에 대한 존경 속에 숨은 신이시다.

 

「욥기」는 성서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실지라도, 신학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실지라도, 교조화된 교의신학이 인간의 부조리한 현실을 다 설명해 줄 수 없음을 고발하고 있다. 주인공 욥(그의 이름은 아카드어로 ‘내 아버지는 어디 계신가?’라는 의미를 지녔다)은 전통적이고 교의신학적인 지혜론을 펼치는 친구들과 달리 철저한 부정신학적 입장에서 교의신학에 대한 무용론내지는 반박론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 욥이 그러한 입장에 서게 된 배경은 말할 것 없이 그가 직면한 이유 없이 당하는 고통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들의 입에 발린 칭송으로서의 교의가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하여 정당하고 정직한 대면의 언어로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직면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어찌 됐든 「욥기」의 텍스트 안에서 그것은 여전히 난해한 의문을 그대로 남겨놓기는 했지만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논쟁하는 욥과 그의 친구들 앞에 나타나 욥의 말의 정당함을 선언하셨다.)

 

《아! 욥》에서 저자는 이렇게 이미 밝혀진 「욥기」의 텍스트를 가지고 벌어지는 현대의 욥과 욥의 친구들 간 제2라운드의 논쟁을 보여주려고 한다. 어쩌면 「욥기」의 해설 보다 더 중요한 저자의 관점과 수고가 깃든 작업이 이 부분일 거라고 생각된다. 「욥기」의 텍스트는 완결 됐어도 ‘우리의 공통의 이해력 안에서 우리의 존재의 원리로 승인될 수 있고, 이 공통의 원리가 가장 실용적이며, 가장 최고로 요청되는 지혜이며 윤리적 선이 된다는 사실’을 교회조차(혹은 교회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러한 몰이해는 세월호로 대표되는 우리시대의 모든 욥과 그의 가족들과 고통에 대하여 교회가 여전히 교의신학적 폭력을 휘두르는 괴물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쓰나미가 몰아쳐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났을 때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했다는 설교 내용을 매스컴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남아시아를 휩쓴 지진과 해일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피해를 본 그 지역은 모슬렘과 불교도들이 주를 이루고, 기독교를 박해했던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또 세계적인 휴양지인 그곳은 사람들이 몰려와 향락과 마약을 즐기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치셨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 기사를 듣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심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만한 정신, 이미 괴물로 변해버린 사람의 말입니다.”(《아! 욥》, 84쪽)

 

이 책이 설교임을 감안하더라도, 나는 실제 김 목사님에게서 이렇게 격렬한 파토스를 좀처럼 보질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격렬함 보다는 가령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할 때, 나는 김 목사님의 온유한 성품이 표현할 수 있는 갑작스런 파격(그 파격의 온유함!)을 생각하고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다.

 

욥에게는 친구의 불행 앞에서 칠 일 밤낮을 함께 울어준 벗들이 있었지요? 지난 시간에 나는 ‘그만 한 우정이 또 있겠는가’ 하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기억나시지요? 그런데 그들은 정말 우산을 내던지고 욥과 함께 비를 맞았나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우산을 접어 욥을 두들겨 팹니다.(《아! 욥》, 80-81쪽)

 

누가, 무엇이, 왜, 이 온유한 시인으로 하여금 충격적인 괴물을 발견하고 그 괴물에게 격렬한 인간의 파토스를 토해내게 하는가? 우산을 내던지고 함께 비를 맞기는커녕 오히려 우산을 접어 비를 맞는 친구를 두들겨 패는 자들. 그런 상황. 그런 신학. 그리하여 이런 부분은 이 책에서 기억하고 넘어가야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욥기의 탁월함은 이 대목에 있습니다. 욥의 불행에 대해 진심으로 아파하는 친구들, 더구나 한 마디의 말도 내뱉지 않고 그의 곁을 지키는 친구들의 존재는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철저히 뒤집히고 맙니다. 이 대목은 욥기의 비극성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 친구들을 욥의 적대자로 돌변시켰던 것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아! 욥》, 65쪽)

 

우리는 세월호 사건 이후 일체화된 충격과 연민과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언뜻 난해할 정도로 돌변해가던 적대를 경험했다. 이 대목은 우리사회의 비극성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우리사회의 비극성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대목일 것이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 사람들을 희생자들과 그들의 유가족들의 적대자로 돌변시키는 것일까?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모두를 이 질문 앞에 한 사람 예외 없이 몰아세우려 한다. 저자는 「욥기」의 주제를 하나님에 대한 공소한 정의증명이 아닌 인간의 책임으로서 하나님 존재증명에 위치시키려 한다. 저자의 설교적 지향이 주인공 욥보다도 조연격인 욥의 친구들을 향해 있는 데는 이런 연유가 있다. 이 점 여타의 전통적이고 변증적인 「욥기」 해설서들과 이 책의 가장 큰 변별점일 것이다.

 

그리고 또한 간과해선 안 될 이 중요점은 남미의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 1928~ )가 그의 「욥기」 연구서 《무고한자의 고난과 하느님의 말씀》에서 정리한 ‘고난당하는 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이란 관점과도 차이가 난다. 사실 어느 시대인들 마찬가지겠지만, 욥을 향하고 욥의 입장에서 욥의 편에서 말하는 것의 근원적 중요성보다, 특히 우리들의 시대는 괴물로 변해가는 욥의 친구들에게 더 시급히 말해야할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고, 설교자로서 저자는 이 점을 가장 긴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리라.

 

 

 

3.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1274)는 ‘우리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는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라고만 알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느낀다.(고전 13:9) 하나님이든 지식이든 한 인간이 하나님이라도 된 듯 전체를 온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불가능성에 대한 겸허한 깨우침이 가능성을 열어준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무오류의 앎을 가능케 하는 신학이란 불가능한 과제이지만, 동시에 전적으로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과제이다. 어떻게 그러할까? 불가능하다는 것은 교의신학적 차원의 정직한 진실이고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부정신학적 차원의 희망에 대한 긍정이다.

 

저자는 이 부정신학적 가능성을 ‘말이 끊어진 자리’의 ‘침묵’이라 설명한다. 이것은 「욥기」가 고통 받는 인류에게 선사하는 최후의 용기이고 고귀한 인간성이고 신의 선에 대한 변증법적 반항이자 믿음일 것이다. ‘말이 끊어진 자리’와 그 ‘침묵’. 얼마나 눈물이 나도록 멋진 표현인가! 미스테리, 수수께끼, 그러나 완전히 감추어지지 않는. 그것은 정연한 신정론(神正論)이 아니라 말이 끊어진 침묵의 자리에서의 신비(神秘)다. 거기서 울려 나오는 말은 논리적으로는 해답으로서의 말은 아니지만 더 이상 논리도 해명도 필요없이 너무 충분한 해답이 된다. 저자는 하나님의 대답에 얽힌 무수한 억측과 도돌이표로 돌아가 버리는 신정론적 정답의 들끓는 요구들에 대하여 말 끊긴 자리의 침묵으로 대답하려한다. 어쩌면 김기석 목사님 자신의 말 끊긴 자리의 침묵으로.

 

“…욥은 모른다. 신이 하필이면 왜 그를 선택했는지. 욥은 벗들에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오로지 신하고만 대화하고 싶을 뿐…”〔비스바와 쉼보르스카, 「개요(Streszczenie)」, 본문 중 인용된 시〕(《아! 욥》, 408쪽)

 

신비와 함께 산다는 것도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태도를 말한다. 저자는 이미 책을 시작할 때 밝혔다.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할지가 아니라 읽지 말아야할지를. 여기서 저자가 성찰하는 신비의 갈피를 느리고 차분한 사색의 분별력으로 가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욥기를 읽어나갈 때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태를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둘째, 욥기를 읽으면서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까닭이 무엇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욥의 말이라고 다 맞는 것도 아니지만, 친구들의 말이라고 다 그른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발화된 말의 내용에 집중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말이 발설되는 상황이나 심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셋째, 욥기의 주제를 무고한 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이라고 규정해버리는 것은 다의적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에 굴레를 씌우는 일이다. 독자들에게 정답 없는 삶을 살아갈 용기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넷째, 욥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과거의 인물로 규정하지 말라.”(《아! 욥》, 31-34쪽)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신비란 얼마나 외롭고 슬픈 일인가! 더구나 이러한 신비에 대하여 연구하고 상상하고 음미해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부조리한 고통 속에서 할 말과 도움 받을 말, 마침내 요구할 말조차 끊어진 침묵의 자리,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살아가려는 사람의 신비란 얼마나 슬픈 것인가. 하나님의 편에도 서지 않고, 반드시 올바른 것도 아닌 말들의 배경을 조응하며, 하나의 결론을 고집하고 않고, 모든 부조리한 오늘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 나는 과연 우리 시대에(「욥기」를 관통하는 삶을 지닌) 그런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보다, 그런 사람(삶)을 생각하는 것조차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마치 옛날 보았던 영화 <마농의 샘>에서 막힌 수도(水道)를 뚫고 우물을 파고 물을 구하려 애쓰다가 마침내는 당나귀로 물을 실어 나르다 죽는 어린 마농의 아버지 곱추와 같이 삶의 무게에 비틀리고 휘어진 형상의 삶. 그의 과묵함과 침묵이 이 세상의 부조리 너머로 응시하는 하나님. 목사님이 제 1강에서 언급했던 기형도의 시를 읽어본다.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 기형도(1960-1989)

 

어쩌면 우리 동네 목사님은 김기석 목사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을까. 아니 아니, 내 모습이기도 할까? 오십세. 나는 이제 세상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신학교의 교의신학도 깨우쳐주지 않았던 슬픈 천명(天命)이란 것을 스스로 깨쳐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하물며 목사노릇으로 강단에서 설교하기 너무나 자주 자괴감에 시달리는 바벨론 유수와 같은 날들이다. 김 목사님께 곧잘 이런 저런 대드는 말도 해보곤 하는 나이지만, 솔직히 길을 물어보고 싶다. 저 이제 어디에 밑줄을 쳐야할까요? 역시 다정하고 겸손히 빙그레한 웃음으로 ‘나도 당신과 같은데 뭘∼’ 끝내 대답은 안 해주실 줄은 안다.

 

나도 모르겠다. 숨은 신이 멸시 당하고 우상신이 득세하며 교의신학은 만연하지만 세계의 부조리에 대해서 설명이 안 되는, 어디로 가는지 모를 이 시대. 나는 가난한 천막교회 목사 같은 처지에 또 세상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줄 뻔히 알면서 어느 생활에 밑줄을 쳐야할까? 누구를 향하여 「욥기」의 소감을 피력해야할까? 모든 이슈가 블랙홀처럼 세상의 부패와 부정의 폭로에 말려들어간 이 연말에, 그래도 코밑에 닥쳐온 성탄절과 세모(歲暮)에, 욥은 누구이고 욥의 친구들은 누구이고 우리들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인 것인가?

 

김 목사님의 빼곡한 독서와 사색의 책갈피에서 지천명(知天命)의 내 의문에 대한 한 대답이듯 이런 생각이 난다. ‘불행한 사람이 책을 읽는다. 행복한 사람은 책을 읽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이 글을 쓴다.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이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는 다면 그것은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이다.’(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모르겠다는 말은 그만하자. 모르긴 뭘 모르는가? 우리는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욥기」는 그런 자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욥이 오직 신과만 말하려 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론 신은 오직 욥과만 말씀하신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가 막혀 할 말이 끊어진 침묵의 자리에서 오직 신과만 대화하는 사람. 그래서 제목이 이렇게 나왔을까? 《아! 욥》.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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