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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란 종교를 묻다

by 한종호 2016. 12. 31.

한국이란 종교를 묻다

 

트럼프의 당선에 세계는 당혹했다. 개신교를 믿는 백인이 세운 나라가 미국이다. 트럼프가 주목하고 배려한 대상도 백인 개신교도다. 반면 힐러리는 다양성으로 다가섰다. 미국의 투표제도를 잘 이해하고 목표를 명료하게 밝힌 트럼프의 승리는 당연했다. 미국 내 문제만으로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는 무엇에 집중해야 승리할 것인가? 한국은 사회적 경직성에 비해 종교적 조건은 무척 다양하다. 미국처럼 단순 명확하지 않다. 사실 개신교, 불교, 유교 게다가 샤머니즘까지 공존하는데도 경직된 사회란 당황스럽다.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려면 사회적 관용도 커져야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관용이란 진귀한 물건이다. 그렇다면 종교를 넘어 사회를 굳히는 콘크리트가 있다는 말이다. 종교 위에 또 다른 종교가 있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 퀴즈를 풀어보려는 노력이 바로 이 책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다.

 

 

태초에 통계가 있었으니, 책은 통계로 시작한다. 개신교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불교, 가톨릭 순이다. 하지만 통계가 보여주는 종교인 숫자는 종교의 영업방식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는 개신교는 ‘자영업’에 가깝다고 보았다. 맞다. 한국에는 치킨집과 교회가 가장 많다. 반면 가톨릭은 맥도날드 햄버거나 스타벅스 커피점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본사의 지원이 빵빵한 프랜차이즈라는 말이다. 반면 불교는 공무원 조직과 유사하다. 앉아서 염불만 외워도 먹여준다. 그렇다면 공무원 시험에도 스님을 넣을 일이다. 9급 스님, 7급 스님 시험이나 스님 행시에 붙은 5급 스님까지.

 

저자가 주목한 종교 뒤에 콘크리트는 바로 ‘민족주의’다. 교리는 “꿈은 다시 이루어지고, 한국은 다시 세계 4강이다!”이다. 아무 내용도 형식도 없는 황당한 구호지만 모두를 하나로 엮는 신앙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여러 종교들이 각기 역할을 담당한다. 중앙관청은 유교다. 유교가 정한 시행령 안에 인허가를 받은 자영업에는 개신교가 있고, 대리점인 가톨릭이 성업 중이며 공사(公社)기업인 불교가 게으르게 “관세음보살”을 외운다. 참고로 점집 및 무당이 개신교와 아웅다웅, 티격태격 싸우는 이유는 이들도 자영업자이며 업태 및 서비스가 겹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종교의 자유란 민주를 먼저 믿고 나서 생긴다. 하지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교리가 말해주듯 민족이 먼저다. 민족주의는 믿을 때 무릇 “민족성령”을 먼저 받아야 한다. 민족성령에는 유교가 주장하는 왕조 이념이 스며있다. 위아래도 모르는 싸가지 없는 불효자에게는 민족성령의 불을 내려주지 않는다. 즉 민주 위에 유교 이념으로 충만한 민족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일제 때 민족은 황국신민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어느 종교도 이 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때문에 일제 때는 총독부 입속의 혀처럼 굴고 유신 때는 유신의 앞잡이였다.

 

유교는 위아래의 위계에만 관심이 있다. 일단 줄 세워서 제일 앞에 놈이 쌔고 쌘 놈이 항상 올바르고 가장 우선이다. 왕 다음은 한 줄로 선다. 왕은 타고나니 따로 직업을 고민할 이유가 없다. 지금 대통령이 바로 그렇다. 다음부터는 연줄, 가문, 그리고 공부 순이다. 오늘날까지 이어진 조선시대의 과거제도가 바로 수능이다. 때문에 연줄도 가문도 없으면 수능만이 도(道)이자 있는 신앙이다. 출세만이 깨달음이고 도이니 마땅히 수능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따라서 높은 순위의 대학은 더 많이 구원 받았다. 지잡대 출신이면 하층민이고 진리를 벗어난 고졸은 악(惡)거나 노숙자일 수밖에 없다.

 

민주의 가면을 쓴 왕조사회는 왕과 공무원 그리고 시민이 아닌 충실한 신민(臣民)으로 이루어져있다. 저자는 사회적 트라우마 역시 왕조라는 종교에 기초한다고 보았다. 세월호나 메르스(Mers)가 바로 그렇다. 그들은 줄을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조에서는 소외되고, 배척받으며,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회적 약자란 값 싼 동정이나 배제의 대상이다. 게다가 유교주의 왕조에서는 약자의 고통과 희생은 필요하다. 서열에서 배제된 자의 고통은 선택받아 줄 안에 서 있는 자들에게는 위안이기 때문이다. 위안이야 말로 종교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달콤한 선물이 아니겠는가.

 

저자의 탁월한 통찰은 우리 종교, 다시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신념과 사회의 종교적 구조의 민낯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가 ‘개신교 치맥집’ 출신이라 유사 자영업인 ‘샤마니즘 분식점’이 지니는 지대한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듯하여 아쉽다. 물론 그가 “한국 교회는 편한 마음으로 샤머니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 혹은 희생타로 이용해 왔음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라고 고백하지만 마치 ‘김밥 천국’이나 ‘죠스 떡볶이’도 먹을 만 하다고 말하는 듯할 뿐이다. “타산지석”이라 하지만 개 닭 보는 것 같단 말이다.

 

하지만 보라. 전국적으로 등록된 무당, 점집은 개신교 목사의 3배에 가까운 30만이다. 그들은 한국 종교문화의 다수다. 니체는 신의 시체를 발견하고 “신은 죽었다”고 외쳤다. 그가 버리고 떠나간 신의 시체에서는 여러 벌레들이 들끓고 결국에는 해골이 남았다. 신의 시체에서 생겨난 벌레와 해골이 바로 민간신앙(Pagan Religion)과 샤머니즘이다. 유럽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그렇지 않으리라고 보지 않는다.

 

저자는 결론으로 “알게 모르게 우리는 다른 색에 대한 관용을 잊고 지낸다.”라고 하며, 이 하나의 색을 민족주의로 보고 다양한 종교 안에서 개인적 가치를 찾을 것을 충고한다. 종교학자로 바람직한 얌전한 그림이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관심은 민족주의일 뿐만 아니라 왕조의 붕괴다. 이런 점에서 저자도 실은 얌전하지 않다. 그에게도 승리가 관건이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다음 책은 <종교로 승리하는 한국사회>이기를 기대한다.

 

이호영/철학박사, 중앙대학교 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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