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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네 생각이 틀렸다

by 한종호 2017. 1. 5.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9)

 

네 생각이 틀렸다

 

“또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네가 너를 위(爲)하여 대사(大事)를 경영(經營)하느냐 그것을 경영(經營)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肉體)에게 재앙(災殃)을 내리리라 그러나 너의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로 생명(生命) 얻기를 노략물(擄掠物)을 얻는 것 같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에레미야 45:4~5).

 

큰 딸 아이 소리를 키울 때였다. 작고 외진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소리는 또래가 없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흙과 풀과 꽃과 강, 강아지가 친구였다.

 

어느 해 봄날 소리와 함께 앞개울로 나가 다슬기를 잡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논둑을 걷다보니 뭔가 신기한 것이 보였다. 걸음을 멈추고서 저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물었더니 소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바로 저게 개구리 알이야. 저기서 올챙이가 나오는 거지.”

 

설명을 해준 뒤에 올챙이가 커서 무엇이 되는지 아느냐 물었더니, “개구리요” 하고 자신 있게 대답을 했다. 이야기를 나누고서 다시 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소리가 물었다.

 

“그런데 아빠, 왜 올챙이는 커서 개구리만 되는 거예요?”

 

올챙이가 커서 왜 개구리만 되냐니, 지극히 당연한 것을 물으니 오히려 대답이 궁했다. 아이 생각에는 개구리 알이 저리도 많으니 더러는 물고기도 되고 더러는 새도 되고 더러는 다슬기도 될 것 같은 모양이었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선뜻 대답을 못하자 녀석이 불쑥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것밖엔 될 게 없어서 그래요?”

 

그것밖엔 될 게 없어서 올챙이는 개구리가 되냐는 어린 딸의 말에 웃음이 나왔지만, 그 말은 의미 있게 들렸다. 아무리 알이 많아도 개구리가 낳은 알은 모두 올챙이가 되고, 올챙이가 아무리 많아도 올챙이는 마침내 개구리가 되는 것, 그 이유를 ‘그것밖엔 될 게 없어서’에서 찾고 있는 것이 아이다웠다.

 

논둑을 걸어올 때 문득 마음속을 지나는 생각이 있었다. 맞다, 아무리 알이 많아도 개구리 알은 올챙이가 되고, 올챙이는 마침내 개구리가 된다. 나는 과연 ‘그것밖에 될 것이 없는’ 내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묻게 되었다. 작은 시골교회를 섬기며 내가 지금 사는 삶이 맞는 것일까, 이미 대답한 질문을 거듭 할 때가 있는 내게 어린 딸의 말은 하늘 음성처럼 다가왔던 것이었다.

 

 

 

바룩에게 주님의 말씀이 전해진다. 예레미야가 바룩하게 하는 말이지만, 그 말은 곧 주님께서 바룩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때로 주님께서는 누군가를 통해 내게 말씀을 하신다. 들을 귀가 있다면, 분별할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주님은 얼마든지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내게 말씀을 하신다.

 

주님은 바룩에게 네 생각이 틀렸다고 하신다. 그동안 주님은 바룩의 탄식을 듣고 계셨다. 주님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이제 꼼짝없이 죽게 되고 말았구나, 혼잣말로 탄식을 한 것을 주님께서 기억하고 있었다(3절). 한 사람의 탄식을 기억하시는 주님! 멸망의 길로 치닫는 유대 백성들을 보며 큰 아픔에 빠져 있던 터에,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지는 주님의 심판의 말씀을 책에 적다 보니 마음속 괴로움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진 것이었다.

 

바룩은 주님께서 주님이 세우신 백성을 벌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주님 앞에 가졌던 바룩의 심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바룩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묻어난다.

 

“나는 세웠다가도 헐 수 있고 심었다가도 뽑을 수 있다.” <공동번역>

 

주님이 세운 것을 주님이 허시는 것을, 주님이 심은 것을 주님이 뽑으시는 것을 바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이 정하신 대로 하시는 것을 두고서, 주님의 뜻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바룩에게 더 이상 너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경영(經營)하지 말라 하신다.

 

“네가 이제 큰일을 찾고 있느냐? 그만 두어라.” <새번역>

“네가 이제 큰일을 도모한다마는, 그만두어라.” <공동번역>

“너는 자신을 위하여 무슨 위대한 일들을 찾고 있는데, 그런 일들을 더 이상 찾지 마라.” <성경>

“그러므로 스스로 거창한 계획을 세울 생각은 마라.” <메시지>

 

아무리 훌륭한 생각도 주님 앞에서는 내 생각일 뿐이다. 내 눈에 훌륭해 보일 뿐이다.

아무리 옳은 생각도 주님 앞에서는 내 생각일 뿐이다. 내 눈에 옳게 보일 뿐이다.

아무리 위대한 생각도 주님 앞에서는 내 생각일 뿐이다. 내 눈에 위대해 보일 뿐이다.

내 생각이 아무리 훌륭하고 옳고 위대해 보인다 해도 주님 앞에서 내 생각을 고집하며 내 생각을 앞세우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 위대한 일’을 찾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바룩의 마음은 참으로 귀하다. 멸망의 길을 가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며, 그 백성을 벌하시려는 주님께 그럴 수는 없지 않느냐 매달리고 있으니, 어찌 거룩한 마음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앞서는 바룩을 두고 주님께서는 ‘그만 두라’ 하신다. 아무리 자신의 생각에 옳다 싶어도 주님의 뜻을 앞서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네 생각은 틀렸다고 하신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겸손의 자리는 그렇게도 아뜩하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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