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톺아보기(27)


아낌만한 것이 없다


이군, 새벽빛이 희뿌옇게 밝아오는 아침입니다. 불기 없는 사무실에 앉아 아침을 맞는 일이 조금씩 힘들어지네요. 하지만 밤과 낮의 경계선이 무너지며 아침 햇살이 조금씩 비쳐드는 이 시간, 새로운 삶을 살라고 주신 이 복된 순간이 흔감(欣感)할 따름입니다. 주위가 참 고요합니다.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충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좋습니다. 정겨운 얼굴들을 머릿속에 그리다가 문득 이군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하고많은 얼굴 중에 왜 이군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사람들처럼 목마른 표정으로 나를 찾아오는 이군이 나를 부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잔뿌리만으로 버티기엔


일상의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선 자리를 가늠하기 위해 가끔은 멈추어 설 줄 아는 군이 참 대견합니다. 화가들은 자기 마음에 그린 이미지들을 화폭에 옮기다가 가끔 뒤로 물러나 자기 그림을 살피곤 하지요. 그것은 자기가 그린 형상이 전체 화면과 잘 조화되는지를 살피기 위한 몸짓일 것입니다. 군은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더군요. 나는 삶에 아폴론적인 질서도 필요하지만, 디오니소스적인 일탈과 열정도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일탈과 열정도 더 큰 질서에의 통합을 지향하는 과정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더 큰 중심을 향한 솟구침이 아니라면 참 곤란한 일입니다. 오늘의 청년 문화의 전모를 볼 눈이 내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청년 문화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직관적으로 느끼는 바는 있습니다. 그것은 '부박함'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되는 것 같습니다. 관심이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어 그 색깔은 화려하지만 지속성은 없는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 아닌가요?


중심을 지향하기보다는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주의 선을 더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속성이 없는 일들은 우리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길 때가 많습니다. 일관된 법칙도 지향도 없는 가치들의 무질서한 율동을 보면서 나는 정서적 충격을 느낍니다. 어디로 발을 내딛든 중심을 향한 여정이기를 소망하며 살아온 내게 리좀(rhizome)적 질서는 매우 곤혹스럽습니다. 가끔 산에 오르다가 바람에 밀려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진 나무를 봅니다. 어김없이 뿌리를 아래로 깊이 내리지 못하고 잔뿌리만 발달해있는 나무입니다. 잔뿌리만으로 버티기엔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 아닌가요? 물론 뿌리를 깊이 내린다는 것은 힘겨운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어둠과 싸워야 하고, 거친 비바람과 싸워야 하고, 벽처럼 딱딱한 장애와 싸워야 하니까요.


이 암흑 속에 나는 계속 뿌리가 되는 게 싫다.

젖은 흙담 속에 안절부절 밑으로 늘어뜨려진 꿈에 떠는 뿌리,

무엇이든 흡수하고 생각하고 또 날마다 식사를 하는.


젊은 시절부터 좋아하던 파블로 네루다의 시 <산보>의 일부입니다. 삶이 무겁다고 생각되어 비틀거릴 때마다 나는 이 시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마치 내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시를 읊조리고 나면 다시 그 어둠을 향해 팔을 뻗는 것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어쩌면 ‘공감’에서 비롯된 힘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마음을 새롭게 하면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힘이 되어 삶의 대지 위에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게 되는 것 같더군요.


얼마 전에 만난 선배 목사님은 다짜고짜 내게 “김수영이 앙코르와트에 다녀왔으면 ‘거대한 뿌리’를 다시 썼을 거야” 하고 말씀하시더군요. 앙코르와트에 다녀오신 소감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인데, 수 백 년 동안 인간의 발걸음이 닿지 않았던 그곳의 신전 건물을 휘감아 오른 나무를 보고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가를 절감하고 오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요, 만일 김수영이 그곳을 보았더라면 다른 시적 상상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김수영은 이 척박한 슬픔의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모도, 어떤 반동도 감내하겠다고 말하면서 “― 第三人道橋의 물 속에 박은 鐵筋기둥도 내가 내 땅에/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의 은총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김수영처럼 삶이 절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박함이 없기에 현실에 착근하려는 노력도 그만큼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 인생이 부평초처럼 흔들릴 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누군가에 대해 품고 있던 꿈을 접어야 할 때 나는 흔들립니다. 참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고통이야말로 은총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없었을 테고, 생명의 고마움을 몰랐을 터이니 말입니다. 생 텍쥐베리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란 누구나 바람에 따라 방황한다. 꽃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간은 뿌리가 없어 상당히 불편할 거야. 그러나 나는 내 몸에서 뿌리가 돋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고통의 뿌리이다. 고통만이 인간을 대지 위에 뿌리를 뻗게 하는 유일한 은총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문화가 천박한 것은 고통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마치 컴퓨터 게임을 보듯 바라봅니다. 어두운 하늘을 가르는 미사일의 섬광은 마치 불꽃놀이와 같습니다. 미디어는 그 미사일이 떨어진 자리에서 벌어지는 참상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흥건히 흐르는 피, 잘린 손과 발, 그리고 아비규환의 비명소리… 현대문명은 그런 것을 감쪽같이 제거해줍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테러와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아라비아 숫자로 치환되어 우리에게 제공되고, 우리는 그저 혀를 쯧쯧 참으로써 그들을 망각의 강에 밀어 넣고는 재빨리 일상의 삶으로 복귀합니다. 파괴와 폭력의 현장에서 죽어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평안한 일상을 깨뜨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아픔이 없으니 창조도 없습니다. 무통분만(無痛分娩)의 시대는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필요한 것을 생산할 뿐이지요. 그렇기에 생명 가치는 생산구조에 종속됩니다. 기가 막힌 뒤집힘입니다. 우리는 이 뒤집힌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인정하고 살아갑니다.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는 사유도 진정한 공감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고통 받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데도 우리는 무관심과 무감각으로 무장한 채 갑각류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자크 아탈리는 “시장이 우위를 점하는 곳에서 소비자는 자기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쟁 논리의 종속변수로 변해버린 이들에게 남는 것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거리감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사나와집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이마에 ‘맹견주의’의 팻말을 써 붙이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


이 시대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가 뭐냐고 물으셨지요? 나는 서슴없이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낌’입니다. 공감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내게 절실한 도전입니다. 생태계의 파괴가 가속화되고 있는 세상이니 모든 것을 아껴야 하겠지요. 시간이 촉박합니다. 과민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의 도시 문명이 마치 나발의 잔치와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시지요? 그는 “도대체 다윗이란 자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즈음은 종들이 모두 저마다 주인에게서 뛰쳐나가는 세상이 되었다”(사무엘상 25:10)고 말하며 절박한 처지에 있던 다윗을 조롱한 사람입니다. 모욕당한 다윗이 복수를 다짐하며 부하들을 이끌고 나발의 집을 향하고 있을 때 그는 왕이나 차릴 만한 술잔치를 베풀고 취할 때로 취하여서 흥겨운 기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숙취와 함께 잠에서 깨었을 때 그는 아내인 아비가일로부터 지난밤에 있었던 일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져서 열흘을 앓다가 죽고 맙니다. 나발 이야기는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도취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것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제 몸집을 불려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군대 귀신에 들려 비탈길을 내리닫는 돼지 떼의 상황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본주의 질서는 난폭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보다 덕 있는 사람이 존중받던 호시절은 지나갔습니다. 군자는 사라지고 소인배들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자본주의 질서는 사람을 아끼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고, 능력이 다소 부족한 이들에게는 일자리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주변부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빈민층 이주 청소년들의 소요 사태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습니다. 프랑스 말로 대도시의 외곽지역을 일컫는 말이 방리유(Banlieue)라지요? 그런데 프랑스 정부당국은 방리유를 ‘도시민감지역’이라고 부른다더군요. 이것은 주변부를 바라보는 주류 집단의 오만한 눈길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표현입니다. 눈에 보이는 분리의 장벽만 없을 뿐 그들은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입니다.


돈이 주인인 세상에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부름 받은 까닭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 있는지요? 어쩌면 그것은 강고한 자본주의의 세상에 균열을 내라는 것이 아닐까요? 쉽지 않은 과제이고 도전입니다. 하지만 딱딱한 얼음을 깨는 데는 망치보다 바늘이 유용하듯이, 자본주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사람 하나면 충분합니다. 물론 그런 독립한 인격들이 함께 연대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나는 바른 신앙인은 정신의 독립을 이룬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형무형의 강제에 의해 떠밀리듯 살아가기보다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유르겐 몰트만은 교회가 ‘출애굽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바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탈출해 자유의 새 땅을 향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라는 말이지요.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말로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지속하는 것이 되겠네요.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자본이라는 바로(Pharoh)가 지배하는 세상의 한 부분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크기와 힘에 대한 집착으로 교회는 그 근본인 예수정신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군이 교회에 절망했던 것은 이런 현실 때문이 아닌가요? 내가 이미 교회의 질서 속에 깊숙이 몸을 담은 목사가 아니라면 나 또한 교회를 떠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교회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자본이 아닌 예수적 가치가 교회와 세상의 중심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몸부림칠 겁니다.



아낌, 참 삶의 시작


나는 예수가 보여준 삶의 핵심이 ‘아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아끼셨습니다. 그가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힌 세리이든, 행실이 나쁜 여자라는 소문이 난 사람이든, 죄인이라고 규정된 사람이든,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백안시되는 병자들이든, 귀신에 들린 사람이든 예수는 모든 이들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인간적인 호오(好惡)의 감정을 떠나, 그들 존재의 중심에 있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보아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을 누구라도 물리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존재 이유가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뜻을 명백히 드러내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한복음 6:39).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어찌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겠으며, 건성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인 나는 아직 이 마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젊은 날에 품었던 거룩을 향한 열정은 안락하고 안이한 삶에 잠겨버리고, 얼어죽어 가는 이의 포근한 꿈만 꾸고 있습니다. 잠들었던 제자들을 깨우며 ‘이제는 일어나 가자’고 말씀하셨던 서른 세 살 청년 예수의 모습은 예순 살 먹은 이 어설픈 제자의 얼굴에서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일어서야 할 때라고 느낍니다. 이군 같은 젊은이들이 있어 나는 혼곤한 잠에서 깨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있지요?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함께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이군의 열정은 나를 새로운 배움터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람들의 심성이 너무 거칠고 사나와졌습니다. 도로 위를 질주하는 운전자들의 시야가 좁아지고 남에 대한 배려나 너그러움이 줄어들 듯이, 이 무서운 문명의 발전 속도는 심성이 황폐화하는 속도와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느림’이 하나의 상품이 되고 있는 세상이니 새삼스럽게 느림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느림은 우리의 문명병을 치유해주는 가장 소중한 요소입니다.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버림받은 치매노인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살아가는 사람들, 장애자들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속도전일 수 없습니다. ‘웰빙’을 위한 느림도 소중하지만, 이웃을 돌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느림을 선택한 사람들이야말로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노자의 말이 생각나네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으니 治人事天 莫若嗇

무릇 아낌을 일컬어 빨리 돌아감이라 한다 夫惟嗇, 是謂早復

빨리 돌아감을 일컬어 덕을 거듭 쌓는다고 한다 早復, 謂之重積德(老子, 59장)


모두가 이 마음으로 산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사람을 아끼는 것이 참 삶의 시작일 겁니다. 특히 세상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채 뒤쳐진 사람들,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 무방비로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을 아낄 줄 모른다면 우리는 결코 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경제 발전이라는 파이를 키우기 위해 이런 이들을 버리고 가는 사회는 결코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이 실종된 문화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사람 아낌과 하늘 섬김은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아낌이야말로 우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지름길입니다.



틈을 만드는 사람들


그런데 규모가 커지면 아낌의 자리는 좁아지게 마련입니다. 인간적인 규모라는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간디가 마을 공동체를 세상 변혁의 초석으로 보았던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경쟁에서 밀려난 패배자들의 허울좋은 구호가 아닙니다. 사과 씨 한 알속에서 과수원을 보아내는 게 믿음이라지요? 안으로 견고하게 생명을 품은 씨앗처럼, 속에 예수의 혼을 품은 사람들 그들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규격화된 벽돌과 역청을 가지고 쌓아올리는 욕망의 바벨탑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군처럼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젊은이들이 이 답답한 세상에 작은 틈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몇 해 전에 텔레비전에서 수십 년을 한결같이 바위를 쪼며 우물을 파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값진 보화를 얻으리라는 그분의 바람은 허망해 보였지만 그분의 수도자적인 몸짓에서 나는 서늘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어리석음이 없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고,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 생명의 몫을 누리는 참 세상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의 꿈을 하늘이 외면하지는 않겠지요. 나는 이군의 답답한 마음을 일시에 해결해줄 수 있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다만 그 길에서 나는 이군이 예수의 마음, 즉 ‘아낌’이라는 단어 하나를 화두처럼 붙들고 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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