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톺아보기(30)


영성의 깊이란 무엇일까


● 반환점을 돌고 나서


“이렇게 민박집에 머물고, 버너와 코펠로 밥을 해먹어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그 동안 너무 여백 없이 살았지?”


“그래, 벽에 가득한 낙서를 보니까 우리 신학교 때 입석으로 퇴수회를 갔을 때가 생각나네. 생각나? 누군가가 베니어판 벽면에 매직으로 써놓았던 낙서. ‘신은 죽었다’―니체. 누군가가 그 밑에 이렇게 써놓았지? ‘니체는 죽었다’―신. 그땐 그래도 그게 꽤 신선하게 읽혀졌었는데.”


“저기 저 낙서 좀 봐. ‘A man without a pot belly is a man without an appetite for life ―Salman Rushdi, 『The Moor's Last Sigh』. 누가 써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체형은 짐작할 수 있겠는데. 올챙이배를 한 중년의 사람일 거야 아마. 이런 구절을 외우고 있는 걸 보면 되돌리기 어려울 만큼 변화된 자기 체형을 삶에 대한 욕구로 포장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사람일 거야.”


“그래도 그런 포장의 욕구라도 있으니 다행인가?”


“왜 이젠 뭐든 시들한가보지?”


“반환점을 돈지 벌써 한참 되었는데 아직도 내 인생이 오리무중이구나 생각하니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고.”


“우리 신학교 시절은 나름대로 치열했지?”


“그렇지. 시대적 소명으로서의 정의, 그리고 실존적 진실과 허무 사이를 오가면서 우리는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달아나기도 했지.”


“그런데 벌써 ‘몸’을 의식하게 되는 나이가 되어서, 젊은 날 우리를 달뜨게 했던 질문들은 사라지고, 또 다른 문제들에 치여 살고….”


“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붙들기보다는 비본래적인 문제들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치고….”


“그래도 그 때는 ‘타자’의 세계가 압도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존재의 문제를 한 순간도 잊을 수가 없었는데.”


“그래, ‘나’를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삼십 대 중반쯤에 정현종 선생의 번역으로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을 처음 읽었는데, 그 중에 <소나타와 파괴들>이라는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나와.


달이 사는 내 황폐한 침실 속에서,

내 식구인 거미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파괴들 속에서,

나는 내 잃어버린 자아를 사랑하고, 내 흠 있는 성격,

내 능변의 상처, 그리고 내 영원한 상실을 사랑한다.


―<소나타와 파괴들> 중에서


나는 이 구절을 보면서 일종의 정신적 근친성을 느꼈던 것 같아. 나중에 네루다가 이 시를 쓴 게 19세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지. 여하튼 파괴를 좋아하고, 능변이 상처가 되고, 흠 있는 성격도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의 쓸쓸함과 자부심이 동시에 느껴지지 않니?”


“조숙한 천재구만? 남을 기죽이는….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물가로 나가자.”


● 목숨을 건 자기 진실의 드러냄


“네가 전짓불을 그렇게 켰다 껐다 하니까 이청준 선생의 글이 생각난다. 혹시 들어봤니? <전짓불 앞의 방백>이라고?”


“아니, 못 들어 봤는데.”


“낮과 밤으로 좌와 우가 뒤바뀌던 뒤숭숭한 세월이 배경인데, 그게 이청준 선생의 개인적 체험인지 창작인지는 모르겠어. 지리산 자락 어딘가에서 일어난 일이야. 주민들에게는 생존이 무엇보다도 소중했던지라, 낮에는 경찰들 편이 되고 밤에는 빨치산 편이 될 수밖에 없었어. 어느 날 밤 누군가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전짓불을 눈앞에 들이대고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거야. 미칠 노릇이지. 불빛 뒤의 상대방이 어느 편인지를 알면 대답은 간단해. 상대방을 기준으로 해서 안전한 대답을 선택하면 되니까. 하지만 문제는 전짓불을 비추고 있는 이가 어느 편인지를 알 수 없다는 거야. 어쩌면 이 물음이야말로 소설가로서의 이청준이 직면할 수밖에 없던 본질적인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


길은 다만 한 가지. 그것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근거로 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제 목숨을 건 자기 진실의 드러냄인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마지막에 가선 자기 진실에 기대어 그것을 지키는 것뿐, 위험하기는 하지만 거기서밖에는 자신을 버티고 설자리가 마련될 수 없으리라는 참담한 이야기다.


진실 밖에는 버티고 설자리를 마련할 수 없다는 절박함과 목숨을 건 자기 진실의 드러냄이 없이는 진정한 글을 쓸 수 없다는 거지. 이것이 이청준의 문학이 지금까지도 진부해지지 않는 비결이 아닌가 싶어. 아니, 비결이란 말은 적절치 않겠다. 그건 방법이 아니니까 말이야. 하여튼 나는 이 대목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나의 상황으로 환치시켜놓고 생각해보곤 하는데, 과연 내가 진실이라는 위험한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자신이 없어.”


“그건 자신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지. 맥락도 다르고, 경중도 다르지만 목회 현장에서도 그와 비슷한 선택 앞에 서야 할 때도 있는 것 같아. 예를 들어 교인 A와 교인 B는 아주 앙숙이야. 서로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트집 잡고 말을 만들지. 그런데 그들은 매우 충성스럽고 헌신적이야.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인 거지. 문제는 그들의 충성 경쟁에서 비롯된 갈등이 다른 교인들에게도 파급된다는 데 있어. 목회자는 그 둘 사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조정자의 역할을 해야겠지. 그러나 목회자도 사람인지라 조정자로서의 역할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낄 때가 있어. 그러면 마침내 ‘진실’을 드러낼 수밖에 없지.”


“어떻게?”


“흑백을 가르듯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주제넘은 일일 것이고, 다만 내가 겪어왔던 어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거지. ‘당신들 때문에 내가 몹시 힘들다. 두 분 다 소중한 분들이지만, 이런 점은 공동체에 부담이 된다.’ 그러면 그분들은 처음으로 자기들의 틀을 깨고 제3자를 의식하게 돼. 그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꾸짖거나 외면하기는 쉬워도 실상을 있는 그대로 되비춰준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결국 그런 진실의 드러냄이 또 다른 상처나 오해로 귀결되지 않는 것은 오랜 인내와 수고와 사랑이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이겠지?”


“간혹 그렇게 교회에 부담을 안겨주는 이들을 보면 화가 날 때도 있지만, 또 생각해보면 저마다 다른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분들이 갈등을 통해 자신의 상처와 약함을 드러내면 공동체는 그런 갈등을 봉합하려고 서두르기보다는 그 상처를 자기 것으로 품고 함께 치유해가야 하겠지. 그게 어쩌면 교회의 치유적 책임이 아닐까?”


“갈등은 다소 혼란스럽게 보이더라도 잠복하는 것보다는 표출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어.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다’(잠14:4)고 하잖아. 교인들은 그렇다 쳐도 목회자들은 언제 그 영혼이 건강해지고 성숙해질까. 자기의 약함을 드러내거나 자기의 성격적 특색을 드러낼 기회도 별로 없으니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들이야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자꾸 질정을 받아야 나중에 허물을 면할 수 있는데, 그런 기회를 구조적으로 박탈당한 것 같아서 말이야.”




● 반성적 성찰의 허실


“스스로 깨어 있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겠지.”


“안톤 체홉의 소설 <공포>에 나오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진부함’이라고 말해. 그의 공포를 알 것도 같아.


내 행동들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려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전율하게 만들어요. 생활 환경과 교육이 나를 견고한 거짓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았다는 걸 나는 압니다. 내 일생은 자신과 타인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한 나날의 궁리 속에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나는 죽는 순간까지 이런 거짓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무섭습니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자기를 지탱해주는 것, 즉 자기 동일성을 담보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이 고백은 매우 심오한 거야. 그걸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택하는 생이나 주어진 생에 대해서 자꾸만 의문부호를 붙여보아야 하는데, 그게 힘겨우니까 우리는 적당한 선에서 반성적 성찰을 포기하고 익숙한 것에 입각해 살게 되지.”


“나는 반성적 성찰이라는 게 무책임한 공론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의지의 변화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됐어. 다시 말하면 의지의 변화 없는 반성적 성찰이라는 것은 기껏 해야 자기만족이나 위안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 어느 날, 그 날은 새벽기도가 없던 날인데 새벽 일찍 깨어나게 되었어. 다시 잠이 올 것 같진 않고 해서 잠시 망설였지. ‘텔레비전을 켤까, 신문을 볼까?’ 그러다가 문득 내게는 그런 생각들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루의 첫 시간을 세속의 분잡으로 덧칠함으로써 명상적 고요를 망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쳐서, 아주 가볍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 날 내 마음에 들려온 소리가 바로 의지의 변화가 없는 지성적인 깨달음이나 감성적인 뜨거움은 우리를 허위의식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었어.”

“흔들리지 않는 생의 토대는 결국 진실일 텐데, 우리가 진실한 걸까?”


“진실하려고 애는 쓰고 있지 않나?”


● 전체의 뜻으로 수정된 마음


“가끔 나는 ‘내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어. 때로는 진실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들고.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엮은 책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와.


결국 인간은 최악의 고통에서만이 진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추운 사람이, 질병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결코 점잖을 수도 없고, 성스러울 수도 없고, 거룩할 수도, 인자할 수도, 위엄이나 용기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찾는 자는 제 목에 오랏줄이 감긴 그 사람뿐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심신의 고통을 지금 맛보고 있는 그 사람뿐입니다. 가장 절실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장군이나 성직자가 아닙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 지금 병으로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온갖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밤을 사람들은 각양각색으로 새우고 있을 것입니다. 밤은 평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치와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절절한 아픔을 겪어본 이가 쏟아내는 이런 소리야말로 참 소리가 아닐까? 그렇게 보면 우리는 어쩌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실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일 거야.”


“권정생 선생의 글이지?”


“응.”


“……”


“거기에 비하면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말은 너무나 창백해 보여. 논리적이긴 하지만 진실의 향기는 맡을 수 없어. 며칠 전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나왔던 서울대학교의 어느 교수가 생각나네. 그는 정치권의 과거청산론에는 불순한 의도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했어. 그러면서 특정인을 법률에 의해 죄인으로 몰면 그 시대에 일제에 부역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역사의 원죄로부터 면죄시키는 효과를 발생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앞장서는 인위적인 과거 청산은 해서는 안 된대. 그는 심지어 정신대가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동원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으로 참여로 이뤄진 상업적 공창이었다는 식으로 말해서 참석자들을 분노하게 했는데, 자기는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서 말하고 있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빈정거리기까지 했어. 정신대 문제의 해결도 위안소를 이용했던 사람들의 자발적인 고백과 성찰이 우선되어야 한 대. 그가 말끝마다 후렴처럼 사용한 어구가 ‘반성적 성찰’인데, 과연 그가 말하는 성찰이란 뭘까? 그가 말하는 ‘반성적 성찰’이라는 말에서 나는 지적인 오만함 이외에는 느낄 수가 없었어.”


“그렇게 말하면 ‘반성적 성찰’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겠다야.”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화나는 것은 다른 게 아니야. 그가 정신대 할머니들을 비롯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부모 세대들이 겪은 아픔, 고통, 한을 ‘성찰’이라는 단어 속에 우격다짐으로 밀어넣음으로써 고통을 타자화하고 추상화하고, 그로써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려 한다는 점이지.”


“내가 의지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게 그 때문이야. 혈기(血氣)에 든 병은 의사나 약을 찾아 고칠 수 있지만, 지기(志氣)에 든 병은 자각(自覺)하고 자수(自修)하여 내심(內心)으로 고칠 수 있대.”


“누가 한 말이야?”


“율곡 이이 선생이 생질인 홍석윤에게 한 이야기 중에 나와. 학자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안다’ 하는 것이 병이지. 자기 논리의 폐쇄회로 속에 갇혀 다른 이들의 눈물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절반의 진실 밖에는 볼 수 없는 거겠지.”


“맞아. 사실 우리는 혈기에 든 병은 심각하게 생각하면서도 지기에 든 병은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지. 학자들만 그런가, 신앙인들도 심각하지. 그 중에서도 영적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함석헌 선생님이 그러셨지. ‘꽃이 아무리 피어도 수정이 못 되면 열매를 못 맺듯이 전체의 뜻으로 수정이 못된 마음은 쓸레 마음이다. 젊음은 전체의 위대한 영으로 수정이 돼야 한다.’ 나는 영성의 깊이란 결국 ‘전체와의 관련성을 깊이 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이게 같은 말이 아닌가 싶어. 물론 이런 자각 속에는 의지의 변화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전체의 뜻으로 수정된 마음이라! 바로 그거구나.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 계시고, 그런 하나님의 정념을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이 참 사람이라며. 그렇다면 진실은 책장에 갇힌 것이 아니라, 고통이 있는 곳, 또 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사람들에게만 깃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결국 다시 출발선일세 그려. 이제 우리의 남은 시간은 인식의 욕구를 채우려고 애쓰기보다는 어떻게든 앎을 삶으로 번역해내기 위해 땀흘려야 하겠지?”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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