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9)


한 가운데 서라


처음 자전거 타는 것을 배울 때, 넘어질까 조심하느라 페달을 세게 밟지 못했다. 신기한 것은 조심하면 할수록 자전거가 자꾸 쓰러진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힘 있게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갈 때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자리에 멈추는 것은 곧 쓰러지는 일이고, 앞으로 힘차게 나가야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종 어떤 일을 맡았을 때,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게으르게 하지도 말고 중간만 하라는 노련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모든 일에 남보다 너무 앞서 나가도 안 되고 너무 뒤쳐져서도 안 된다고 한다. 신념과 이념에 대해서도 자신은 중도노선이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이들을 본다. 중간의 삶이 가장 안전한 삶이라고 충고한다.


이들이 말하는 중앙의 길을 걸어가는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언뜻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거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듯싶다.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중용(中庸)’이란 개념이 과연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지 두 눈으로 또렷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양의 대표적 사상 중의 하나인 ‘중용’을 언급하면서 주로 ‘중(中)’에다 방점을 두는 모습을 본다. 이는 사물의 가운데에 자신의 위치를 두는 공간적 의미로서 중(中)을 강조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중용의 개념에서 ‘용(庸)’을 배제시키면 안 된다. 여기서 용(庸)이란 어떤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뜻하는 시간적 단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군자는 어우르지만 휘둘리지 않으니 곧추섬이 강하도다. 한 가운데 서서 기울지 않으니 곧추섬이 강하도다(君子 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중용》 10장 5절


군자는 다양한 것을 아우르고 모든 사람들과 어우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모습을 취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의견도 포용할 수 있고, 어떤 사람과도 더불어 지낼 수 있어야 진정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중심이 확고하지 않아 이리저리 흔들려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한다.



올바른 지도자는 한가운데 서서 모든 이들의 핵심이 되고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소심하게 몸 사리는 행동을 하거나, 치우지지 않으려 가만히 아무 입장을 취하지 않고 기회만 탐색하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중심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움직임이 수반되어야 한다.


자전거가 중심을 잡으려면 페달을 밟아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하듯, 중용의 가치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밟고 있는 삶의 발판을 힘차게 디뎌야 한다. 내 삶의 바탕을 면밀하게 살피고, 내가 처해있는 영역을 파악하여 자신의 입장(立場)을 공고하게 하여야 한다. 여기에다 내 발로 삶을 밟아나가는 실존적 실천을 수반해야 한다.


위 구절 바로 앞부분에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강함에 대해 논의한 내용이 나온다. 자로가 강함에 대해 묻자 공자는 북방의 강함인지 남방의 강함인지 되묻는다. 이어서 공자는 ‘남방의 강함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을 가르치고 보복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북방의 강함은 창칼과 갑옷 그리고 투구를 깔고 누워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공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고 싸우는 것만이 강함이 아님을 말했다. 상대를 포용하고 감싸 안으며 용서하는 것 역시 강함이라고 설명했다. 진정한 강함은 드러나는 외부로 보이는 단호한 태도가 아니라 내면에 세워져 있는 자기중심의 꼿꼿함이라고 강조했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에게 유연하지만 결코 부러지지 않는 자기주체성 확립을 요청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설명을 하려 했다. 그 때 그의 눈에 한 손 마른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죄로 인해 병자가 되었다는 자책감으로 회당의 한쪽 구석에 쳐 박혀 앉아 예수의 강론을 듣고 있었다. 그의 눈이 예수와 마주쳤다. 예수는 그를 불러 세웠다. 아예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가운데 세웠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마가복음》 3장 3-4절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눈총에 떠밀려 늘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던 병든 자를 세상의 중심에 세워놓으셨다. 당당히 모든 사람의 한 가운데 서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손 마른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성서의 관심은 왜 그가 그렇게 되었는지, 그가 어떤 방법으로 치유를 받게 되었는지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가 그를 주목했다는 것에 주목할 뿐이다.


400년이 넘는 세월을 애굽에서 살았던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등이 굽어버렸다. 이집트인들에게 굽실거려야 겨우 생존할 수 있다는 걸 터득하고 살아왔다. 갑작스레 모세가 등장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하였다. 자유를 얻으려면 쉽고 편하게 살아왔던 삶을 등지고 불편하고 어려운 삶을 감내해야 하지만, 그들은 불평으로 일관했다.


하나님은 삶의 의욕을 상실한 무기력한 걸음걸이를 바꾸어 올곧게 걷게 하셨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 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 (《레위기》 26장 13절)” 올바로 걷는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히브리인들은 제 발로 서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자기 존재를 누군가에게 의탁하고 살아야 하는 노예적 삶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기의 길을 선택하고 자기의 생각을 세우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법을 습득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기복적인 종교생활을 벗어버리고 주체적 자아로 하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실존적 신앙을 갖게 되었다.


예수는 애굽의 종교생활로 복귀시키려는 바리새인의 가르침에 항거하였다. 율법의 조항에 매여 사는 종속적인 신앙생활을 거부하였다. 신앙의 핵심은 종교적 규정에 의해 억압되고 피폐해져 가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부여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선포하며 당당히 살아가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였다.


좁은 골목을 지나치거나 가느다란 둑을 주저함 없이 내닫는 자전거를 본다. 불안함이 없어 보이는 자전거 탄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한다. 눈앞에 보이는 좁은 길을 두려움 없이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극복해가는 모습은 성서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좌우의 흔들림 없이 곧바로 제 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중용(中庸)의 신앙이다.


바람 불면 먼저 누웠다가 바람 그치면 먼저 일어나는 잡초들의 강한 생명력은 대지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올곧은 뿌리에 있다. 보이는 줄기와 잎은 바람에 쉬이 흔들리지만, 결코 미동조차 않는 보이지 않는 땅속뿌리는 자기중심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기 바람이 분다. 자전거 끌고 강변을 따라 에두르고 싶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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