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



말씀 기근의 시절에 “말씀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은 어떠할까? 글을 읽는 내내 마치 같은 이의 모습을 보듯 예레미야와 저자가 겹쳐 다가왔다. 얼굴을 직접 대면하고 알게 된 지 수년, 김기석 목사님은 자꾸 여위어만 간다. 혹 어디 아프신 건 아닌가, 염려하여 여쭈려했는데, 이 글을 읽다보니 알 것도 같다. “아이고, 배야. 창자가 뒤틀려서 견딜 수 없구나. 아이고, 가슴이야. 심장이 몹시 뛰어서, 잠시도 있을 수가 없구나!” 하나님을 잊은 시절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시각으로 세상을, 사람을 바라보자니 어찌 고통이 없을까.


그의 언어들은 예레미야의 저 처절한 표현만큼 직설적이지 않지만, 아니 오히려 너무나 아름답고 따듯하고 부드러워 읽는 이가 얼른 그 고통을 즉각적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실은 모두가 다 신음 소리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처럼 “하늘의 눈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석하는 자”가 예언자라면, 목사요 신앙인으로 하늘의 눈을 가진 그가 이 시절을 지내며 끙끙 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실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 모든 신앙인은 예언자여야 하리라.



우리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듣는 것을 듣지 못한 채, 하나님 없는 반생명의 질서를 지어놓고 ‘문명’이라 자족하는 이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데 어찌 앓지 않으랴. 실존적인 위험을 당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운명의 사람들, 그러나 예수는 예언자적 삶을 선택하는 이들을 복되다 했다. makarios! 존재로 복된 이들, 이들의 존재함은 오늘 이 땅에서 “뿌리 뽑힌 이들에게 샬롬의 매개”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기석 목사님은 복되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도 복되다.


김기석 목사님의 글은 여러 면에서 ‘넘나듦’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천 년 전 예레미야의 삶의 자리와 21세기 우리가 사는 공간이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듯 순식간에 넘나들며 하나가 된다. 성서 텍스트와 문학, 사회학, 인문학 텍스트 사이에서도 스스럼없이 흐르는 듯 연결된 넘나듦이 있다.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 문헌 사이에서도 그러하다.


그는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고 적절하게 길어 올리는 작가이기도 하다. 김 목사님만의 풍부하고 생생한 묘사로 살아난 글귀들을 읽으며 독자들은 예레미야와 함께 환상을 보고, 끌려가고, 묶이고, 갇히고,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오를 거다. 태어난 날을 저주할 만큼의 깊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의 비전을 전할 힘을 함께 얻을 거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은 강한 북풍이 아니라 따듯한 해님이었듯이, 김기석 목사님의 언어들은 포근하지만 우리의 비양심과 욕망의 껍질을 스르륵 벗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의 예레미야’를 읽으며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이드거니’(시간이 좀 걸리면서 분량이 좀 많게), ‘지며리’(차분하게, 꾸준히) 하는 법을 배우리라.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우화처럼, 그리스도인은 생존을 위해 당나귀 울음을 울다 건초더미를 받는 “열 번째 날의 호랑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나.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