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

일생 추위에도

by 한종호 2017. 4. 7.

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10)


일생 추위에도


봄이 오면 꽃들이 서둘러 핀다. 긴긴 겨울을 지내온 온갖 생명체들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꽃들은 잎보다 먼저 피어난다. 미처 물이 오르기도 전에 서둘러 꽃봉오리를 틔우는 꽃나무들의 고운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건, 이른 봄날부터 부단히 그들과 소통해온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이다.


추운 겨울을 강직하게 버티어온 이들만이 봄볕의 따스함을 누릴 수 있다. 온상 속에 숨어 겨울을 비켜간 이들이나, 겨울에 굴복하여 제 몸 얼려버린 이들은 봄날의 아름다움에 동참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온상 속에서 자란 꽃들은 향기가 거의 없다. 드러내는 모양이나 색상은 본래와 비슷하게 구현해내지만, 보이지 않는 향기만은 그러하지 못한다.


돈이나 지위를 얻기 위해 자신의 존재 가치나 의미를 가볍게 여기는 이들을 본다. 비겁하거 비굴하지 않으면 돈이나 권세를 결코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돈이나 권세를 얻을 수만 있다면 자존심을 버리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또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이들이다.


“오동나무는 천 년을 늙어도 항상 곡조를 품어있고, 매화는 일생 추위에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 《상촌집(象村集)》, 〈야언(野言)〉


조선중기를 살았던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의 말이다. 그는 선조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할 때, 주위에서 집을 리모델링하라고 종용했지만, 누추하기는 해도 이정도면 예(禮)를 갖추기가 충분하다며 기둥 하나 바꾸지 않은 청렴한 선비였다. 신흠은 신숭겸의 후손으로 영의정까지 오른 대학자였지만 늘 자신을 겸손하게 다스렸던 분이다.


오동나무의 존재가치는 가구나 악기의 재료가 되는 것에 있다. 서양의 대표 악기인 바이올린과 첼로는 가문비나무와 단풍나무로 만든다. 우리의 대표적 악기인 거문고와 가야금은 오동나무로 만든다. 오동나무는 가벼우면서 단단하고 뒤틀림이 적으며 화기와 해충에 강하다. 성장이 빨라 10년 정도면 가구나 악기의 재료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악기의 재료가 되기 위해서는 음이 잘 전달되면서도 변형이 적어야 한다. 습도나 온도의 변화에 민감하지 않아야 자기 음색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음향학적으로 오동나무 재질 자체가 공명(共鳴)이 뛰어나고 오동나무의 고유진동수가 거문고나 가야금의 현 진동수와 유사하여 동조(同調)가 잘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흠은 세월이 지나 원숙한 나이에 접어들어 노욕(老欲)을 부리는 이들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젊은 시기에 지녔던 강력한 패기와 날선 정의로움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퇴색하여 시대의 흐름에 쉽게 휩쓸리고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본다. 연령에 관계없이 오동나무는 악기 재료로 사용된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온 매화는 봄을 여는 꽃이다. 매화향이 사방 은은히 번져나면 비로소 봄이 왔다는 것을 실감한다. 봄을 적확하게 말해주는 매화는 자신이 봄을 장식하는 것에 대해 의미를 둔다. 그러나 겨울이 길어 봄이 더디 오기 때문에 또는 겨울이 지루하게 머뭇거린다고 해서 서둘러 향을 함부로 내지 않는다.


불의함이 가시지 않았는데도 향기를 내라며 엄청난 재물을 준다고 해도 매화는 억지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자연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돈의 힘을 빌려 억지로 피운 꽃은 제대로 향기를 피우지 못한다. 전혀 돈을 주지 않아도 올바른 시기가 되면 알아서 향기를 내놓는 것이 꽃들의 자존심이다.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 ⟪창세기⟫, 25장 31-34절


에서는 장자의 권한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았다. 배고픔 때문에 자기 존재의 목적을 팔아버린 어리석은 인물이다. 야곱은 치열하게 그 장자권(Primogeniture)을 가지려고 애썼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면서까지 장자권을 획득하려 집요하게 애썼다.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동생 야곱은 장자권을 획득한다. 아버지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욱 편애하였다.


장자의 권한이라는 것은 한 집안의 리더십을 의미한다. 장자는 집안을 대표하고 구성원의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 자기 자신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그런 태도로 한 집안의 리더가 될 수 없다. 에서는 대단히 무책임한 인물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일에 대한 존중감도 충실함도 없다. 큰 아들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레 자신에게 주어지는 권한이라 생각했다.


유목인에게 한 집안의 구성원은 숫자가 만만치 않다. 족장은 직계 가족 뿐만 아니라 방계 가족들까지 책임져야 한다. 양치기들과 종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러한 많은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수월치 않은 일이다. 위협적인 대적들과 맞서야 하고 험난한 자연의 변화 속에서 결단해야할 일이 많다.


장자권 포기사건은 에서라는 한 개인의 도덕적 또는 신앙적 문제가 아니다. 한 공동체의 생존과 관계된 일이고, 그 공동체의 추진 방향과 그들의 속도를 결정짓는 리더십과 관계된 문제이다. 가벼이 자신의 권한을 팔아버리는 인물에게 장자권이 주어진다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일이다. 그래서 장자 권한이 야곱에게 이양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묵인하셨나 보다.


정말 귀한 것들은 혼자 소유할 수 없다. 정말 귀한 것들은 공동으로 나누어 사용할 수밖에 없다. 우리를 생존케 하는 구름과 공기가 그러하다. 우리를 둘러싼 계절과 우리가 살기에 적합한 온도가 그러하다.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하고, 집안을 환하게 밝혀주는 불이 그러하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만물의 근원요소라 했다.


장자의 명분과 권한을 자신에게 팔라고 했던 야곱이나, 그것을 음식과 교환을 했던 에서, 둘 다 장자권을 소유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더욱이 아직 그 권한이 아버지 이삭에게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매한 것은 무척 슬픈 사건이다. 장자권 매매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긴 예서와 가능하다고 믿은 야곱 간의 다툼이었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 온 산과 호수와 들판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을 살 수 없다. 온종일 애쓴 노동의 피로를 풀어주는 달콤한 잠을 살 수가 없다. 별들의 반짝임과 자기 계절에 풍겨나는 꽃의 향기 역시 살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물질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는 우리 시대를 향한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다.


봄비가 내린다. 이 비 그치면 봄꽃들이 슬픔처럼 와르르 내려앉을 것이다. 그리고 나면 태양이 기운을 높여 비로소 식물들을 생생하게 만들 것이다. 내면에 품은 향기를 함부로 내뱉을 수 없다. 꼭 필요한 시기가 되면 꼭 필요한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놓는다. 이것이 이 시대에 향기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남은 자존심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가 아름다운 이유  (0) 2017.06.08
이 땅에 남은 자  (0) 2017.04.19
한 가운데 서라  (0) 2017.03.20
하나님의 기억 속으로  (0) 2017.03.13
별을 헤아리는 까닭  (0) 2017.03.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