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와 나눈 무궁무진한 대화의 한 단편


예레미야에게는 말이 찾아오곤 한다. 언어도 문법도 확인할 수 없는데, 곱씹을수록 메시지가 들린다. 신탁이란 것이 늘 이렇다. 혼자서만 듣고 말 그런 말이 아니다. 그 때마다 예레미야는 바룩을 불러,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며, 자기에게 들린 말을 바룩에게 다시 들려준다. 들려 온 말을 히브리어로 바꾸어, 히브리어 어법에 맞게, 히브리어 문법을 입혀서, 히브리어 언중이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받은 바 그 메시지를 바룩에게 먼저 전달한다. 예언자에게 수납된 계시는 대필자代筆者 amanuensis에게서 “기록”으로 바뀐다. 예언자의 계시수납 과정에서 이미 한 번 형태가 치환置換된 신탁이 대필자에게서 문학적으로 완성된다.


예레미야는 계시의 수납과 선포 과정에서 왜 기록을 대필자에게 맡길까? 예언자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나? 말로 외친 신탁과 글로 적은 신탁의 발생 순서를 묻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읽고 있는 예레미야서를 문학적으로 고찰할 때 그것이 예레미야의 작품인가 바룩의 작품인가?




우리 앞에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예레미야서를 가지고 우리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끙끙 앓는 하나님》의 저자 김기석이다. 그런데 그도 혼자가 아니다. 낯선 사람들을 함께 데리고 독자 앞에 나타난다. 이 세상 어느 예레미야 해설서를 보아도 예레미야를 설명하면서, 예레미야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들, 곧 신영복, 에드워드 사이즈, 우석영, 정경옥, 빅터 프랭클, 루미, 노자, 임철규, 플라톤, 헤로도토스, 에릭 메택시스, 이승우, 김상환, 모레스 마이모니데스, 앙드레 말로, 스베틀라나 알레시예비치, 레이첼 카슨, 아베 피에르 등을 데리고 다니는 저자는 김기석 말고는 없을 것이다.


김기석은 목사요 설교자다. 현학적이지 않고, 실존적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열어보려고 혼자서 끙끙대지 않고, 삶의 체험이 다양하고 삶에 대한 관찰이 심오한 시인과 소설가와 철학자와 신학자와 인문학자들과 옛 성현들을 친구삼아 함께 다니며, 그들에게서 언어를 배우고, 지혜를 터득하고, 지식을 전수 받아, 예레미야가 말하고 바룩이 쓰고 교회가 전수한, 예언자 예레미야와 나눈 무궁무진한 대화의 한 단편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말씀을 받는 사람과, 말씀에 뼈와 살을 입히는 사람과, 말씀을 번역하는 사람과, 말씀을 이야기 하는 사람과, 말씀을 듣는 사람, 이들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 진정한 독서 체험일 것 같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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