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34)


순복음 포수(捕囚)의 종언(終焉)


-범(汎)이든 호랑이든 한국교회의 기독교인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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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두 가지 분류 외엔 없다. 정치적으론 대의제 장로교, 신학적으론 순복음이다. 우선 모든 교파가 장로(長老)를 세운다. 감독제인 감리교, 직접민주주의 회중교회인 침례교도 장로를 세운다. 왜 그럴까? 한국인은 세 사람만 모이면 회장과 총무부터 뽑는다고, 안 세워주면 그 교회에 안 붙어있으니까. 그러나 장로들의 의결로 목회의 의제들을 결정한다는 대의제라지만 실상 대의(代議)는 유명무실하다. 대형교회일수록 당회장 담임목사가 전제적 제왕으로 군림하며 비자금 유용, 목회세습과 같은 전횡과 불법을 자행해도 적절한 제재를 못할 뿐더러 대다수 장로들은 담임목사의 근위장교나 거수기들에 불과하다. 신학적으로 순복음이라 함은 범복음주의권이라 불리는 보수적 기독교계가 80년대 이전 자신들이 이단(異端)이라 정죄하고 비판하던 순복음식 영성운동(방언, 은사, 치유 등의 신비주의와 오중 복음 삼박자 축복 등의 세속적이고 기복적인 축복관)을 교세확장과 성도교육등 목회의 기본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인상비평적인 판단이니 내 의견에 반대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럴만한 방증이 있다.)


그러니 결국 하나,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순복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 시장(재벌, 삼성)에 넘어갔듯이 9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교회가 순복음에 굴복해 통째로 넘어갔다. 왜 그랬을까? 교회성장이 절정을 지나고 성도수가 감소하기 시작한 90년대가 되자 교회는 더 이상 새신자를 영입할 전도의 동력을 상실하게 됐고 교회간 경쟁과 이동의 시대가 시작됐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농(離農)이 발생하듯 작은 교회에서 대형교회로의 수평이동이 대거 이루어졌다. 아이러니이지만 전체교세가 감소하기 시작하자 대형화 부흥화 경쟁은 치열하고 노골화됐다. 나는 전부터 대형교회들에게 성도의 전수조사를 실시해 볼 것을 권해왔다. 그들이 다들 어디서 왔는지. 한국교회가 뭐가 문제고 무엇을 회개해야 할 것인지 자연 알게 될 것이다. 


시장의 욕망이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을 물들였다. 금단(禁斷)의 과일 같던 성공과 번영 축복의 선악과(善惡果)를 맛본 성도들의 허영과 욕망을 만족시켜줄 더 큰 교회, 더 세련된 예배, 보다 편리하고 안락한 교회(신학적 목회적 내용의 질은 중요치 않다)를 향한 수평이동은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순복음에 굴복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다. 여기엔 복음주의권의 총아라 할 수 있는 성공한 유명 목회자들의 공로가 크다. 그들은 누구보다 선구적으로 앞장서 순복음의 이단정죄와 교류금지를 철회함으로써 총회와 교단의 결의를 무력화했고 순복음과의 적극적 교류를 시작했다. 자신들의 목회에 오순절 운동(五旬節運動, Pentecostalism)방식을 차용하기 위해서였다. 변화된 목회환경에 발맞춘 그들의 변화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에 힘입어 조용기 목사는 갑자기 이단의 괴수에서 한국교회의 큰 목자이자 대표목사 교계의 우상으로 추대되었다. 그 다음은 장신 총신 고신 합신 심지어 한신 등 복음주의권이든 개혁주의권이든 자유주의권이든 가릴 것 없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육하원칙도 없이 자고 일어나니 순복음 천지가 돼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조용기의 4차원 영성, 피터 와그너의 교회성장학과 신(新)사도주의(New Apostolic Reformation), 베니힌과 빈 야드 운동, G2와 알파코스의 금이빨 금가루 집회, 방언, 입신, 웃음, 예언, 축사(逐邪) 여기에 온누리를 필두로 한 <경배와 찬양>운동과 새들백 윌로우크릭의 훈련 프로그램들 등 수입산 오순절주의와 번영신학 복음주의의 성장 운동들이 한국교회를 풍미했고 지금도 그 막대한 영향아래 교계를 지배하고 있다. 담임목사들은 한동안 자신들을 교회를 경영하는 CEO라 불렀으며 부목과 전도사들을 직원으로 격하시켰고 그들에게 경배와 찬양 처세술과 경영이론 심리상담 리더십 제자훈련 세미나 수업과 사역을 강요, 마침내 그런 혼합주의 영성들이 순수(?)한 복음을 완전히 대체하기에 이르렀다.(순복음은 일종의 대체된 복음이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나오는 장로교 목사의 대사를 원용해 본다면 순복음을 쫓아간 다른 교파들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순복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콤플렉스들의 역동, 그림자의 역동, 남보다 뒤처지지 않으려는 욕망, 남보다 커지고자 하는 야망이 한국교회의 순복음 포수(捕囚)의 원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향후 한국교회의 지배적이며 본질적 정신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와 같은 세속적 변질과 획일화의 길을 반대하고 자기의 길을 소신 있게 걸어간 선배들과 동료들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역시 대부분 순복음 일색 가운데 틈새시장(?)을 공략하려는 전략에 불과했지 부흥제일주의라는 전체적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저항하는 반(反)순복음주의 신학과 정치를 지향한 사례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순복음은 옛날엔 위험한 사이비 정도였지만 이제는 중세 가톨릭만큼이나 변질된 기독교의 수괴로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신학 역시 순복음에게 점령당했다고 판단하는 근거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나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자 교회를 섬기는 전도사(목사)로서 늘 이런 점을 아쉬워했다. 누군가 순복음으로 대표되는 우리시대 교회와 목회지향에 반대하면서 자라나는 신학생들에게 포스트 순복음의 영감을 열어줄 선구적이고 모범적인 교회와 목회자 모델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선배, 그런 후학들만이 희망을 가져볼 기회집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아직 ‘가나안 성도’라든가 ‘탈(脫)교회’ 같은 제도교회와의 결별의 논의가 본격화 활발해지기 전이었다. 가능하다면 내가 그 길을 걸어가 그 문을 열어보기를 갈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자신의 목회가 거기에 부응할 효력 있는 메시지가 될 정도(규모)가 못됐음은 물론, 나보다 젊은 신학생들에게서 그런 희망의 단서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어느 면에서 젊은 신학생들은 목회현실의 억압에 더 쉽고 무력하게 굴복됐고 흡수됐다. 정치가 그렇듯 교계의 자정을 선도할 대안 세력은 결집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 나의 고뇌와 갈등 역시 순복음 일색에 잠식돼 비교 경쟁적 부흥에서 낙오된 퇴출자의 굴절일 뿐이란 절망감에 빠지곤 했던 것이다.


나는 자주 가까운 교우들에게 그런 절망감을 토로하곤 했다. 기껏 노심초사 애를 써 새로운 신자를 전도해 양육하면 무엇 하나. 그들의 99%는 이삼년 이래 대형교회로 흡수된다. 그 이유는 그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 자녀의 신앙교육, 대형교회 신자와의 결혼(그들은 신랑이건 신부이건 대형교회로 흡수돼 가는 걸 당연시 한다.), 스펙과 인맥을 위한 이동 등이다. 한마디로 그들 역시 다른 무엇이 아닌 매머드급 크기가 자랑하는 유무형의 선전적 구미(口味)에 압도되고 매혹되는 것이다. 나는 예전 누군가에게 대형교회는 개척교회의 설립을 환영한다는 말을 들었다. 왜냐하면 개척교회만이 새로운 신자를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손 안대고 코푼다는 식으로 개척교회 목사가 고군분투 양육한 새신자들을 앉아서 흡수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하여 개척교회들은 그 이삼년을 고비로 문을 닫는 경우가 태반이다. ‘목회 성공의 99.99%는 교회건물에 있다’는 탄식이 그냥 나온 게 아닌 것이다.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젊은 부부들은 그들대로 자녀를 둔 부부들 역시 그들대로 중장년과 노인들 역시 그들대로의 욕망과 필요 허영과 만족을 위해 대형교회로 간다. 대형교회는 이제 한국교회의 못자리가 아니라 거대한 회랑을 지닌 무덤이 되었다.


나는 언제나 이런 환경에 저항하는 것을 나의 기치이자 목표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설득되지는 않았지만 교우들에게 이점을 강조하곤 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 기치와 목표에 따라오지 않았고 결국 나를 떠났다. 슬픈 위안이자 자랑이지만 지난 10년의 목회를 통해 목사인 나나 아내나 설교나 우리의 목회철학이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교회를 떠나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나와 내 설교와 목회방식이 바람직하고 좋지만 그게 아닌 이런저런 다른 이유들로 교회를 떠났고 결국 강남과 그 주변의 대형교회들로 흡수됐다.(나는 이 점이 가장 절망스럽다.) 가끔 사석으로 모이면 어떻게 하면 순복음과 맞장 뜰 대형교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의논하기도 했다. 그러면 대개는 내 사명을 확인시켜주고 포기하지 말 것을 격려해줌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는데, 개중에는 하나님이 내게 이러한 외로운 길을 원하시는 거라는 위로를 주는 건지 슬픔을 주는 건지 모를 말들을 해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조금만 더 기꺼이 어리석은 목사가 되어 반대로 평신도인 그들을 향해 이렇게 물어보곤 했다. 그렇다면 저 순복음들은 무엇인가? 저들의 반칙과 전횡은 어떤가? 저들의 말도 안 되는 설교와 성경 해석들은 어떤가? 그럼에도 불구한 저들의 성공은 무엇인가? 저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가? 그들의 권력화, 기득권화, 정치세력화, 복음의 변질, 진리의 왜곡, 기독교 가치관의 붕괴, 설득력의 실종, 전도의 종말… 그것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그러나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러는 당신들은 무엇이냐라고 직설적으로 묻지는 못했다. 그 점이 아쉽고 후회스럽다. 어차피. 


예전엔 목회자들이 지금의 한국교회를 만든 책임 당사자들이라고 비판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게 된다. 한국교회를 이 모양으로 전락시킨 장본인들은 성도들이기도 하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 목사들은 단지 대중의 취향에 알맞은 설교와 서비스로 그들의 요구와 비위에 맞춰 따라갔을 뿐이다. 그것이 변덕맞고 욕심 많고 의미 없고 어리석고 무식하고 고집스런 그들을 교회에 붙들어 두는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D.L 무디는 평신도들을 양이 아니라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라 표현했다는데 그건 정말 기막힌 진실이다. 그들은 필요할 땐 기꺼이 목자의 도움을 청하는 양 흉내를 내며 ‘매애애~ 매애애~’ 찾아오지만 원기를 회복하고 또 다른 필요의 욕망이 생기면 야성의 늑대의 성질을 곧바로 드러낸다. 나는 이제 그 두 가지 행동의 시작됨과 끝남은 정확히 감지할 수 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하나님의 나라의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빵을 먹고 배부른 까닭(요 6:26)’이라는 예수의 말씀과 같이 그들이 원하는 게 무언지 어디까지인지.


목사가 아무리 제왕적이라 비판을 당하지만 사실 이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의 권력이 더 무서운 것이다. 그 결과는 사람이 생긴 대로 살고 끼리끼리 놀 듯 서로 속고 속이며 서로의 뱃속과 입맛대로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내게 호의를 표하는 다수의 평신도들이 내게 자기의 교회와 담임목사에 대한 괴로움을 호소하면서도 십 수 년째 그 교회를 다니고 있는 모습들을 신비롭게 본다. 그들이 그런 곳을 떠나 다시 그와 비슷한 교회들을 전전하는 사연들을 여전히 난해하게 듣는다. 그들은 늘 한국교회를 걱정하고 목사들의 인격과 설교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자신은 그럼에도 주님의 뜻(?)을 위하여 주님이 확실한 사인을 보내실 때까지(젠장, 무슨 사인을 원하는 건지) 그 자리에 충성스럽게 남아있는 매우 지성적이고 개념 있는 성도라 생각한다. 그들은 주님이 자기들을 방치해 두었거나 기대할 바가 별로 없는 자들로 치부해 놓으셨다는 생각은 절대 못한다. 자기들이야말로 위선자들이요 바리새인이요 저 비리와 추행, 전횡과 표절, 세습과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목사들의 든든한 지지세력인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여전히 헤어진 지 십년이 넘은 나의 설교를 찾아 듣고 있으며 내 책이나 설교문을 남들에게 소개하고 돌려 읽기도 한다면서 여전히 나를 존경하고 하나님께서 언젠가 한국교회를 위해 목사님(나)을 크게 쓰실 거라고 덕담을 해준다. 그럴 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속으로 비웃는다. 그리고 재빨리 마음 깊은 속에서 제발 그렇게 되기를 갈망한다고 주님께 기도드린다. 나는 지금 호리병 속에 갇힌 괴물이다. 반(半)농담이지만 누군가 나를 여기서 꺼내준다면 그를 축복할지 아주 죽여 버릴지 모를 일이다.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먼 훗날 그들 말대로 정말 내가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목사가 됐을 때 그들이 나를 진짜로 다시 찾아줄 날이 온다면, 나는 ‘거짓되고 의리 없고 교활하여 이득에 밝은 무신(無信)한 병(病)신도들이여. 


나는 당신들을 모른다. 내가 주리고 외롭고 지쳤을 때 당신들은 나에게 물한모금 준적이 없었다. 내 설교와 나를 칭찬했지만 진짜 필요한 내 사역에 돈 한 푼 도와준 바가 없었다. 당신들은 외롭고 곤란하고 근심이 가득차 위로와 격려 용기와 영감이 필요할 때는 나를 찾아오지만 그것이 다 충족된 다음 건강하고 안정되고 즐거움을 누리게 되면 그때는 다른 사람, 심지어 나의 대적이나 내가 적대하는 자들에게로 가버렸다. 나는 정말이지 이런 일을 수도 없이 당하고 속아왔다. 제발 나를 아는 척 친한척 하지 말고 내 거절의 말을 새겨듣고 나를 떠나라.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시다.’라고. 곧바로 회개하긴 하지만 그들을 아주 개무시 박살내 주리라 결심하고 결심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교회라는 조직을 통한 교회내의 반(反)기독교(나는 이게 진짜 기독교의 적이라 여긴다)에 대한 저항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나는 탈(脫)교회를 받아들였고 가나안 성도들의 시대가 왔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교회라는 조직이 거부된 시대 포스트 교회 시대 기독교 진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나는 작금 순복음 일색의 조직과 제도로서의 교회는 더 이상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아류에 불과한 작은 규모의 대형교회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성공과 압도는 가라지의 번창과 같다. 농촌에서 자란 나는 대개 곡식보다 가라지가 벼보다 피와 깜부기가 더 왕성하게 자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전체를 잠식했다는 것은 주님이 더 이상 그것을 사용치 않으신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성장과 번영은 그래도 하나님의 축복인 것이 아니라 마침내 하나님이 포기하고 내버리신 것이다. 


추수 때가 오면 가장 먼저 뽑혀져 버려질 가라지. 이런 결론을 내리고 이런 말을 하게 되기에 이른 내 마음은 누구보다 쓰리고 아프다. 이것이 단지 그들과 같이 되지 못한 우울증에 불과하다는 짐짓 사려 깊고 점잖은 평가까지 포함하여.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 오늘날의 목회자 오늘날의 평신도들이 다 그런 건 아니라는 식의 착한 말은 더 이상 내게 위로나 반박이 되지 않기에 거부한다. 그렇다고 내가 가나안 성도들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단합된 제도로서 교회의 균열 외에 가나안 성도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당장은 아니겠지만 서서히 내가 깨달은 새로운 기독교의 모습을 실천해 나갈 것이다. 내가 장래 어떤 모습일지 그것이 어떤 형태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명목과 무실(無實)인 교의신학의 독단성으로 유지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의 형태는 더 이상 아닐 것이다.




범(汎)기독교계의 홍준표 지지라는 성명을 보았을 때, 나는 이제 하나의 분투와 마침내 결별해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탄핵국면 태극기 집회의 배후에서도 그들을 보았었지.) 이영훈과 조용기와 홍준표의 만남.(그들이 열거한 단체들이 있다지만 그것들은 진짜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한국교회 최후의 몰골을 본다. 모든 내 스승과 선배와 동료와 후배와 믿음이 돈독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고 싶다. 이게 당신들이 속한 범(汎)기독교인가? 제발 아니라고 말하지 말기를. 그렇다. 나는 이들이 범(汎)기독교의 대표임을 인정한다. 이들이 우리 모두의 대표로 활동해왔고 활동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때문에 이제 나는 교회와 신학의 순복음 포수(捕囚)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회고하며 이제 그것을 청산 할 때가 왔다고 선언한다. 


다만 그것을 다시 한국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기대하진 않는다. 한 사람의 탈교회 기독교인 한 사람의 가나안 성도로서 내가 청산하고 내가 결별할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정말이지 종교개혁과 한 터럭도 상관이 없는 자들까지 개나 소나 루터와 캘빈 쯔빙글리(1531년 그는 카펠전투에서 8,000의 교황군에 맞서 2,000의 개신교 군대의 종군목사로 싸우다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를 들먹이며 비텐베르그, 제네바, 취리히 등으로 유럽여행을 떠나는 이 부패와 타락의 절정인 시대엔, 누구든 이제는 나와 같은 방식으로 청산하는 수순 외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 자기의 책임으로! 나는 오늘부로 범(汎)이든 호랑이든 더 이상 저들의 한국교회에 속한 기독교인이 아님을 선언한다.(마음을 추스르려 쓴 글이니 부디 타박하지 마시기를.)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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