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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용서의 시작과 완성

by 한종호 2017. 5. 17.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6)


용서의 시작과 완성

마태복음 6:14-15


먼저 사랑하는 사람과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그런 일은 영화에서도 아주 가끔만 일어나는 일이고 현실세계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개는 먼저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고 그에 대해 태도를 결정하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갑이 먼저 사랑을 시작했고 을이 이에 대해 태도를 정해야 한다고 상상해봅시다. 여기서 갑과 을은 거래에서 사용되는 갑을관계와는 무관합니다. 이런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갑은 왜, 어떤 이유로 을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됐을까요? 그리고 을은 어떤 경우에 갑에게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 걸까요?


갑이 을을 사랑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게 외모일 수도 있고 성격일 수도 있으며 직업이나 인품, 가족배경일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사랑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해보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한 을의 반응입니다. 을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자기는 갑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겨서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반응하는 경우입니다. 둘째로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그런데 나는 네게 관심이 없거든.”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사랑에 성공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일방적인 사랑이므로 실패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갑의 고백을 받은 을은 자존감이 상승할 겁니다. 자기가 갑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을이 갑의 사랑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신은 갑의 사랑을 받을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으니 말입니다.


을이 갑의 사랑을 받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어떨까요? 이 경우에 을이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을이 스스로 갑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자존감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겠는가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경우 을에게 갑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까요?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나중에 오늘 하려는 얘기와 상관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로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라는 주제의 시리즈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 동안 두 번 연장했는데 오늘은 정말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 말씀은 예언서가 아닌 복음서에서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어차피 대여섯 번의 설교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전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으니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에 집중했는데 그 얘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용서에 대해서 얘기하게 되어 예수님에게까지 왔습니다. 예수님은 당대 사람들에게 예언자 계열에 속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니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역할 중에 예언자의 역할을 가장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예언자와 예수님을 연결하는 것이 이례적이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죄의 용서라는 주제로 얘기할 때는 예수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굳이 죄 사함을 말씀하셔서....


마가복음 2장을 보면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는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어떤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데 그 소문을 듣고 몇 사람이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침상을 들고 집 앞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집 안팎에 사람이 하도 많아서 환자를 집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거기에 구멍을 뚫고 침상을 예수님 앞에 내려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여보시오, 그대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침상을 들고 온 친구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신 게 아니라 그를 데려온 ‘친구들의’ 믿음을 보신 겁니다.


그러자 거기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느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고 마음속으로 말했답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떻게 아셨는지 그들의 속마음을 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습니까? 중풍병자에게 ‘그대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그대의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시오.’하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쉽겠소?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그대들에게 알려주겠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내가 그대에게 말합니다. 일어나서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시오.”라고 말씀하셨고 병자가 곧바로 일어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고 나갔다는 겁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과 당시 유대교 권력자들이 왜 첨예하게 갈등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을 참칭했기 때문이고 더 구체적으로 마음대로 사람의 죄를 용서해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지은 죄는 오직 하느님만 용서하신다고 믿었는데 목수의 아들이요 갈릴리 출신 떠돌이 주제에 감히 죄의 용서를 ‘남발’하니 유대교 권력자들은 그걸 참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 권력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행위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오직 하느님만 갖고 있는 용서의 권한을 스스로 행사한 것이고 둘째로, 용서 받을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줬다는 것입니다. 유대교 권력자들은 죄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만 하실 수 있고 그조차도 용서받을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예수님은 두 가지 모두 그들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조차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얘기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인 이야기입니다. 간음은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 개입된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군중들은 왠지 여자만 데려왔습니다. 남자는 어디 갔을까요? 도망쳤을까요? 군중이 일부러 여자만 데려왔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 군중에게 예수님은 한동안 아무 말씀도 않고 땅바닥에 뭔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군중들은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고개를 들어 그들에게 “그대들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시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자를 예수께 데려온 자들은 불특정 다수인 ‘군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대들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불특정 다수인 ‘군중’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익명성 속에 숨어서 집단적으로 가학을 즐기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개인으로서 홀로 서라고 요구하신 겁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떠나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복음서 기자가 ‘하나하나’라고 전하는 데도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선을 보내십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대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까?”라고 물으셨고 여자는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도 그대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을 테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의 죄를 용서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를 죄인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하신 겁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인을 예수님은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신 겁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간음은 죄가 아니란 뜻입니까? 이런 점 때문에 초대교회에서 이 에피소드를 복음서에 포함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요한복음 사본에 이 에피소드가 제외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시지 않았습니다. 간음이 죄가 아니라고 여기셨기 때문인지, 이 여인의 경우에만 그걸 죄로 여기시지 않은 것인지 확실하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대목은 예수께서 그녀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시고 그녀를 보내셨다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신뢰를 봅니다. 이 점이 예수님에게 독특하고 비상한 점입니다. 예수님은 개개인이 갖고 있는 내면의 힘에 무한한 신뢰를 갖고 계십니다. 심지어 간음현장에서 붙들려온 사람이라도 그녀의 내면에는 참회의 능력과 양심의 힘,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지향성이 있다고 믿었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의 죄는 오로지 하느님만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믿지 않으셨다는 증거가 여럿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용서를 구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죄의 용서가 하느님뿐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용서’하는 게 권리나 권한, 권위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 또는 ‘의무’임을 보여주신 겁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대들이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그대들 하늘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을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들이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들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란 하느님과 죄를 지은 사람 사이의 양자관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죄를 지은 사람,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사도 관여된 문제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이를 테면 이는 양자관계가 아니라 삼자관계, 또는 그 이상의 다자관계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신애가 아들의 유괴살인범을 용서해주려고 교도소에 갔다가 그가 이미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졸도한 것도 용서는 하느님과 죄인 사이의 양자관계가 아니라 하느님과 가해자와 피해자(때로는 제삼자)의 삼자관계임을 보여줍니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말라!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무관하게 인간관계 안에서 저질러진 죄든, 하느님이 개입된 다자관계의 죄든 용서의 과정에는 죄를 용서하는 쪽이 있고 용서를 받는 쪽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용서하는 쪽이 늘 도덕적으로 윗자리를 차지하고 용서받는 쪽은 낮은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곧 전자는 ‘갑’의 위치에 있고 후자는 ‘을’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관계는 용서가 이루어진 후에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용서받은 쪽은 긴 세월이 지난 후에라도 용서해준 쪽을 만나면 움츠려들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용서가 이뤄졌다고 해도 관계가 완전히 회복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저는 예수님이 이런 점까지 염두에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용서하는 쪽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문제가 있다는 점 말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성서는 “나는 너를 용서한다.”는 식으로 용서를 능동태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네가(또는 네 죄가) 용서되었다.”는 식으로 수동태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하느님이 주어가 되는 경우에는 가급적이면 하느님을 입에 올리지 않기 위해서 수동태를 썼고 ‘하느님에 의해서’라는 말을 생략했다고 얘기했습니다. 이 점은 신약성서에서도 지속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는 좀 다른 의미로 수동태를 사용하셨다고 봅니다.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자를 고친 얘기에서도 예수님은 “그대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수동태를 쓰셨는데 죄의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면 하느님이든 사람이든 용서의 주체를 가급적이면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곧 예수님은 용서하는 ‘갑’의 자리에 아무도 앉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누구도 그 자리에 앉지 않아야 용서에서 갑을관계를 없앨 수 있다고 보셨던 겁니다. 용서에서 갑을관계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용서란 특정한 시점에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길고 긴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그저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갈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시 한 편 소개하고 이 시리즈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지푸라기’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잘것없다고 여겨지는 지푸라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깊은 영감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하느님과 용서를 묵상하는 우리에게 좋은 내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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