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톺아보기(35)


예수는 오늘도 여전히 길인가?

- 앨버트 놀런 《오늘의 예수》-


“예수의 하나됨 체험은 하느님 아빠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느님은 아빠이시고 공중의 새, 들에 핀 나리꽃,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돌보시는 창조주시다. 예수는 당신 자신을 자연과 자연 순환의 일부로 여겼음에 틀림없다. 예수는 자연과 자신과 하느님의 완전한 조화 속에 살았다.”(210쪽)


“예수가 바란 것과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 사이에 충돌이란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참자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근원적 자유는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자유이며,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기꺼이 창조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233쪽)


193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 타운에서 태어난 앨버트 놀런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라는 책 한 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신학자이다. 그 책을 통해 놀런은 예수가 펼친 선교 사역의 정치적 맥락을 강조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 성과물이 많이 소개되지 않던 80년 대 초 그의 책은 신학도들에게 큰 충격과 도전을 주었다. 《세속 도시》의 신학자 하비 콕스는 그 책을 가리켜 ‘역사적 예수의 생애에 대한 짧지만 가장 적확하고 균형 잡힌 서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앨버트 놀런은 자족적인 강단 신학자가 아니다. 자신의 신학과 신앙에 따라 말하고 실천하는 영성가이기도 했다. 때로는 예언자적 음성으로 그 시대를 질타하고, 때로는 상처 입은 사람들을 감싸 안았다. 그 결과 그는 2003년에 민주주의․인권․정의를 위한 투쟁과 아파르트헤이트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던 종교 도그마에 대해 도전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남아공 정부로부터 루틀리 훈장(Order of Lutuli)을 받았다. 이 훈장은 남아공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의장이었던 앨버트 루틀리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남아공의 민주화운동 하면 우리는 넬슨 만델라나 데스몬드 투투를 주로 떠올리지만 앨버트 놀런도 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를 출간한지 30년 후에 내놓은 《오늘의 예수》는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를 천착한 후 그 예수의 길을 따라 살아온 한 노신학자가 내놓은 신앙적․신학적 고백이 이 책 속에 담겨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 거대 담론의 퇴조


앨버트 놀런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징표를 살피는 일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정직하게 직면할 때라야 우리에게 만 건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앨버트 놀런은 먼저 거대 담론의 퇴조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근대화와 인류의 진보라는 이상에 감동하지 않는다. 이상에 대한 열정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불안이다. 전쟁, 살인, 학대, 구조적 폭력, 테러, 환경 파괴, 지진과 쓰나미의 공포가 사람들의 의식을 옭죄고 있다. 사회이론가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 세계의 특징을 ‘유동하는 공포’라는 말로 요약했다. 국민국가의 울타리 안에서 사회통합과 안전을 꾀하던 ‘견고한’ 근대는 이미 사라졌고, 우리는 생존 자체가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생존과 안전에만 매달리게 된다.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다는 공포, 언제든 쓰레기처럼 폐기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현대인의 삶의 조건이 되었다는 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양산되고, 삶의 자리에서 쫓겨난 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단 쓰레기로 분류되면 다시는 재활용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공포에 사람들은 가위 눌리고 있다.


과거에는 자기 나름의 문화적 전통과 관습, 그리고 종교에 기대 이런 불확실성과 공포를 타개해나갔다. 하지만 세계화라는 먹구름이 온 세상을 뒤덮은 후 전통적인 문화와 관습은 해체되었고, 종교조차 구체적 삶에서 유리되면서 사람들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술과 약물에 의존하거나 재물과 소유를 통해 불안을 극복하려 한다. 어떤 이들은 의심할 수 없는 절대 진리를 제공하는 권위 아래 즐겨 복종한다. 이것이 근본주의가 득세하는 소이연이다. 어떤 이들은 영성에 탐닉한다.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 받거나,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해 뭔가 큰 힘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빚어낸 풍경이다. 앨버트 놀런은 서구의 자기도취적 개인주의가 빚어내는 폐해와 지구적 차원에서 심화되고 있는 빈부 격차,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구 전체를 위협하고 있는 생태적 위기에 특히 주목한다. 그리고 그 모든 삶의 조건들이 빚어낸 변종으로서의 에고 숭배에 주목한다.


그러나 절망의 조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로부터 분리된 영성의 추구는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고, 미국의 이익만을 보장하는 세계화가 세상을 약육강식의 벌판으로 만들었지만 공감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반전 평화운동, 모든 희생자를 향한 연민의 세계화 말이다. 오랜 동안의 해방 투쟁의 결과로 “현실에 엄존하는 새로운 목소리, 즉 여성, 흑인, 원주민, 노동자, 소작농, 빈자,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어린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48쪽)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희망의 조짐이 아닐 수 없다. 앨버트 놀런은 기계가 아니라 신비로서의 우주를 말하는 신과학의 등장을 반기면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기계론적 세계관이 쇠퇴하게 될 것임을 내다보고 있다.


희망의 조짐과 절망의 조짐이 공존하고 있는 이 시대, 불확실성과 공포의 세계화가 연민의 세계화가 더불어 길항하고 있는 이 시대를 넘어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데 예수는 길이 되어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앨버트 놀런은 예수의 생애나 가르침보다는 그의 영성에 관심을 집중한다. 물론 이 둘을 칼로 베듯 가를 수는 없다.


• 예수의 영성


유다의 소농이었던 예수의 영성은 히브리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당대의 유대교나 시대정신과는 어느 정도 대척점에 서 있었다. 기존 질서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불온한 사람이다. 관습적 신앙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의 이면에 있는 지배의 욕망과 탐욕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가 선포한 “하느님의 다스림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죄인들, 쫓겨난 이들, 갈릴래아의 비천한 이들에게서 솟아나오는 것”이다.(78쪽) 그런 열망에서 비롯된 공동체는 서로 사랑하는 이들로 구성된 새로운 인류이다. 예수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승리자가 아니라 희생자가 되기를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갈릴리 소작농의 눈으로 시대의 징표를 읽었던 예수는 예언자의 전통 위에 서서 당시 사회와 종교 권력 체제의 관습에 대담하게 도전했지만, 그런 활동을 뒷받침한 것은 끊임없는 기도와 관상이었다. 관상을 통해 그는 자기의 에고의 뿌리를 잘라낼 수 있었고, 하나님과의 신비한 일치를 이룰 수 있었다. 앨버트 놀런은 이것을 예수의 ‘아빠 체험’이라 요약하면서 바로 그것이 “예수의 지혜와 명료함과 확신과 근원적 자유의 원천”(95쪽)이라고 말한다. 예수에게 있어 정의와 기도, 예언과 신비는 분리할 수 없는 일체이다. 도로테 죌레도 같은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죌레는 우리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려면 하느님 현존의 신비를 전할 수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혁명 곧 저항을 내포한 신비주의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저항이 없는 신비주의는 자기 탐닉의 길로 인도하고, 신비 체험이 없는 저항은 메마른 경직성으로 인도하게 마련이다.


앨버트 놀런은 예수가 치유자였다는 사실에도 주목한다. 예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죄와 허물을 보기보다는 “상처와 낙심, 아픔, 혼란, 두려움을 보았다”(104). 그들은 길을 잃은 자들이었지 도덕적으로 단죄되어야 할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기득권자들의 위선과 독선을 나무라셨지만 그들을 인격체로서 사랑하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예수는 그가 이방인이라 해서 또는 로마인이라 해서 백안시하지 않았다. 그들도 치유와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예수의 치유 사역이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 것은 피조물들의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오고 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멀기만 한 변화의 길


예수의 영성에 대한 천착이 결국 수렴되어야 할 곳은 우리 인격과 삶의 변화이다. 저자는 ‘제3부’인 ‘인격의 변혁’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앨버트 놀런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영성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큰 장애는 ‘분주함’이라고 말한다. 강박관념처럼 우리를 몰아붙이는 분주함은 삶의 실상과 대면하지 못하도록 한다. 저자는 예수를 따라 침묵과 고독의 장소로 가보자고 제안한다. 성찰과 기도를 통해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스며들 때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교류에서 얻는 통찰도 비로소 창조적인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지루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3부인데, 예수의 영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내용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의 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든지, 그러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든지, 삶의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라든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이감을 회복해야 한다든지, 집착을 여의고 하나님께 삶을 온전히 내어드리라는 등의 이야기 말이다. 저자는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이 이야기를 왜 오랜만에 내놓는 책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가 느닷없이 깨달음이 장군죽비처럼 내 의식을 강타했다. 우리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예수적 삶에 대한 이런 요약은 불필요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진부해 보이는 가르침일망정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함과 개방성이다. 수도회에 들어간 지 50년이 넘어 예수라는 존재를 향한 순례의 여정을 거의 마무리해야 할 노사제가 내놓는 결론을 ‘아는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이야말로 교만이 아닐까?


• 하나됨을 향한 여정


마지막 장인 ‘제4부’의 핵심어는 ‘하나됨’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찢기고 갈라진 세상에서 공존과 소통을 넘어 하나됨을 추구한다는 것은 일견 공허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저자가 일치, 화해, 조화, 평화, 사랑이라는 말 대신 하나됨oneness이라는 단어를 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치나 조화는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화해는 갈라진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반면에 “하나됨은 우리가 이미 하나였고 언제나 하나라는 의미를 내포”(172쪽)하기 때문에, 단순히 그 하나됨을 의식하거나 깨닫기만 하면 문제가 풀리게 된다.


앨버트 놀런은 ‘하느님과 하나됨’, ‘우리 자신과 하나됨’, ‘다른 사람들과 하나됨’, ‘우주와 하나됨’을 순차적으로 짚어간다. 하느님과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아빠 체험’이 보여주듯 하느님의 신비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발견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체험은 결국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자신의 약점과 한계와 부끄러움을 받아들여 자기 인격 안에 통합시킬 때 우리는 에고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참 자기와 접촉한 사람에게 남은 없다. 생명의 상호성을 알아차린 사람은 더 이상 사람들을 대상물로 다루지 않는다. 타인과의 동일시, 공감과 환대, 그리고 나눔은 그런 하나됨을 경험한 이들의 삶이 맺는 열매이다. 마침내 이런 일치가 당도하는 곳은 우주와의 하나됨이다. 삼라만상 속에 깃든 창조적 생명에 눈을 뜬 사람은 온 세상이 한 몸임을 자각한다. 그들에게 삶은 경이로움 자체이다. 오늘의 과학은 종교의 경쟁자가 아니다. 앨버트 놀런은 “과학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다루면서, 더 위대한 경이와 외경과 이해를 위한 창문을 열어 준다”(214쪽)고 말한다.


이러한 다층적인 하나됨 체험은 고립된 에고의 횡포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 성공에 대한 미련, 주위의 평판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모두가 다 하나됨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시간 여행자로 살아가는 인생의 근본 속성은 ‘불안’이다. 사람들은 그 밑도 끝도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용물을 만든다. 그런데 그 대용물을 얻을 힘이 부족할 경우, 자기에게 결여된 힘을 얻기 위해 자기 외부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 혹은 제도와 자기를 합일화하곤 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시작되는 것이다. 전체주의나 근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유의 길은 홀로는 걸을 수 없는 길이다. 다른 이들의 체험으로부터 배우고 지지를 받을 때 자유에의 감수성도 자란다.


그런데 자유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자유는 더 위대한 어떤 것, 즉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어는 자명한 듯하면서도 모호하다. 그렇기에 오용되기 쉽다. 앨버트 놀런은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공동선’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놀라운 제안이다. 자칫 잘못하면 공동선이라는 용어도 오용될 가능성이 많다. 우리는 억압적인 정부 혹은 기업이 개인의 권리를 짓밟거나 묵살하기 위해 ‘공공의 이익’ 운운하는 일을 너무나 자주 봐왔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 마치 모든 사람을 위한 선인 양 제시되는 것이다. 저자가 어찌 보면 이미 낡아버린 그 단어를 꺼내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옮기는 데 이보다 더 나은 용어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공동선을 “온 인류 가족이나 전체 생명 공동체, 광활하게 펼쳐진 전체 우주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한다(232쪽)고 정의한다. 오늘의 예수는 바로 이 지점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예수가 걸어간 길은, 우리가 하느님의 위대한 예술 작업에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창조적으로, 더불어 손을 잡고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자유로, 근원적 자유로 이끌어 주는 길이다.”(236쪽)


앨버트 놀런은 우리가 자각하지 못할 뿐 하나님의 일은 매우 서서히 드러난다면서 미래는 안전하다고 말한다.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 도저한 낙관론에 쉽게 공감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사제의 낙관론에 잠시나마 기대 쉬고 싶은 마음이다. 예수, 그는 여전히 우리의 길이고 구원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구체적인 삶으로만 할 수 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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