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1)


전도서의 저자 전도자는 여성일지도


구약의 지혜서를 말해야하는 이유


나는 신학을 전공학문으로 결정하고 공부하고 가르쳐왔지만, 잘한 일인지 수없이 돌이켜봤다. 나는 신학하기의 영토에서 외부자이며, 방관자적인 처지에 있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신학을 공부할수록 신학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신학이 자칫 관념적이고 논리적인 놀이로 그쳐버려 너절한 삶에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없겠다, 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구약 지혜서 연구는 세상의 갈등과 모순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신학적인 의심을 가능하게 했다. 특히 전도서는 진리와 현실 사이의 긴장된 괴리감을 좁혀 갈 수 있었던 짧지만 가장 심오한 책이요 지혜의 말씀이다.


무엇보다 전도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정경의 말씀으로서 구속 역사보다 창조의 보편적 질서에 관심을 갖도록 재촉한다. 그럼에도 A는 B다, 라는 주류 지혜 전통을 향해 A는 B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용감히 말할 줄 아는 ‘지혜자’(전도서 12:9)의 목소리가 우세한 책이다. 전도자는 우주의 보편적 질서를 관찰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모순에 관심을 두었다. 이것은 현실의 모호성을 살핀 것이며, 인류의 평등을 말하되 획일성을 강요하지 않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때문에 나는 한국교회 강단에서 소외된 구약 지혜서의 진실한 목소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동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도서를 시작으로 구약 지혜서 말씀의 숲을 산책해보려 한다.



전도자가 솔로몬? 글쎄요


구약의 책들 중에서 예언서와 지혜서(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첫 장 첫 절은 ‘표제절’로서 저자 이름을 밝힌다. 욥기만 예외다. 그런데 표제절 중에서 미묘한 수수께끼 놀이를 하는 전도서 1장1절은 흥미롭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개역개정)


‘전도자’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의 ‘코헬렛’이다. ‘전도자’라는 명칭은 고유명사보다는 직업이나 직책에 관계된 이름처럼 보인다. 현대 영어 번역본들도 “설교자”(NAS, KJV, RSV), “선생”(NIV)으로 번역되어 직능의 의미가 강하다. 실제로 코헬렛은 자료를 “수집하다”, 사람들을 “소집하다”, 라는 “카할”동사의 여성형 분사다. 말하자면, 회중이나 공동체를 소집하는 사람, 회중의 인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번역을 피하여 히브리 성경제목을 그대로 음역한 ‘코헬렛’(공동번역, TNK)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처럼 ‘코헬렛’은 고유명사인지 직책과 관련된 보통명사인지 논란의 대상이고, 여전히 모호하다.


나는 코헬렛이라는 명칭이 익명성을 고집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 선생의 직능적인 정체성을 표현한 필명이지 싶다. 왜냐하면 저자 코헬렛은 책을 마무리하는 끝맺음말에서(12:9-14) 자신이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 분명히 밝히기 때문이다.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12:9-10, 개역개정)


그는 수집의 대가였고, 성문 앞 광장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진리의 말들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가르치고, 따져보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정리하여 새롭게 잠언들을 생산한 지혜자였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본문에서 솔로몬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음에도 전도자와 솔로몬을 동일시 해왔다. 다윗의 아들 중에 ‘코헬렛’이라는 직계 아들이나 후손이 없음에도 말이다. 물론 전도자를 솔로몬과 동일시할 만한 근거는 있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었다”(1:12)라는 말은 솔로몬을 명시하지 않았어도 솔로몬을 상기시킬만한 쾌락, 거대한 토목사업과 관련한 업적, 권력이 제공한 유익들을 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2:1-10).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헛됨’(히브리말, ‘헤벨’)과 ‘바람 잡는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2:11). 이것은 솔로몬의 지혜와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권력과 영광을 ‘무’(無)로 만들어 버린다.


위대한 지혜의 모범, 건축과 토목사업, 어마어마한 부, 수많은 처첩들에 이르는 모든 것을 솔로몬 자신의 반성적 성찰이라고 말하기에는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한 마디로 고대의 지혜자 코헬렛은 솔로몬을 빗대어 ‘솔로몬 전통의 패러디’를 감행하고 지혜와 권력, 그리고 집중된 부를 문제시했다. 솔로몬의 모든 통치와 웅장함을 헛된 바람으로 일축시켜버렸다. 그러니까 솔로몬을 연상시킨 위대함의 묘사들은(1:12; 2:1-10) 문학적인 픽션인 셈이다. 마치 자신이 왕인 것처럼 왕의 의상을 걸친 저자의 ‘페르소나’로서 문학적인 장치를 활용해 솔로몬의 영광을 ‘무’로 만든 것이다. 하여 자끄 엘룰(Jacques Ellul)의 말대로 “이것은 어떤 신학적 논쟁보다도 더 큰 스캔들이다.”


그러면 “신학적인 스캔들”의 발의자 전도자가 솔로몬이 아니면 누구인가? 솔로몬의 위대함을 ‘무’로 만든 지혜자는 ‘코헬렛’이라는 필명의 여성일 수 있다. 너무 과격한가? 이유는 있다. 전도자의 말(1:1)을 서술하는 “전도자가 말했다”라는 표현이 세 번 출현한다(1:2; 7:27; 12:8). ‘코헬렛’ 자체도 모호한데, “말했다” 동사는 더 애매하다. 히브리어 단어는 남성, 여성으로 구분되는데, 두 번의 남성 동사(1:1; 12:8)와 한 번의 여성 동사(7:27)를 사용했다. 전문적인 독자들 중에는 필사자의 실수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필사자의 오류가능성, 인정한다. 그러나 말놀이를 즐기는 코헬렛의 문체를 생각하면, 이것은 여성인지 남성인지 애매하게 수수께끼처럼 처리하려 했던 의도적인 실수는 아니었을까?


동사의 이중적인 사용은 독자의 상상력을 발동시켜 언어라는 비밀의 방을 두드리도록 유혹한다. 과도한 추측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고대 사회에서 여성 지혜자의 존재 가능성은 열려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전문성을 띤 여성 지혜자들이 존재했었다(사사기5:29; 사무엘하14:2; 20:16). 예컨대, “지혜로운 시녀들”(개역개정, 사사기5:29)은 정확하게 허드렛일을 하는 시녀가 아니라 귀족 계급의 지혜로운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전문성을 갖춘 조언자들이다. 또한 요시야 왕의 개혁에 앞서 성전에서 방치되었다가 발견된 율법책의 진위여부를 묻는 제사장과 왕의 사람들에게 여자 예언자 훌다가 정경성을 확인시켜주고, 하나님의 계시를 왕에게 전달했다(열왕기하 22장). 이후 요시야 왕의 개혁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글쓰기와 읽기 능력을 갖춘 여성의 존재 가능성을 방증하는 일화다.


코헬렛이 스스로를 솔로몬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여성 동사를 사용했지만 여성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코헬렛이 잠언의 수집자요, 창조적인 생산자답게 말의 세계를 즐기려했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 전도서의 저자가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따지는 것이 해석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묻는 다면, 나는 잠언 31장에서 왕을 교훈하는 어머니(잠언 31:1-9)와 이른바 ‘현숙한 여성’(31:10-31)을 노래한 맥락을 따라 남성과 여성의 차별적 고리를 끊지 못한 사회에게 해독제요, 수많은 신앙의 여성들에게 위로가 된다고 말하련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고유한 이름을 말하지 않은 ‘코헬렛’(1:1)이라는 필명의 지혜 선생(12:9-14)의 가르침이 전도서다. 우리의 삶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아서 재미와 즐거움이 있지만, 모호함과 고통이 존재한다.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은 대중이 모이는 광장과 혼란에 맞서 투쟁하는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지혜를 말했던 현장성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고도의 수사적 전략이 녹아든 ‘해 아래’ 일어난 일들에 대한 관찰과 비평적인 코헬렛의 견해들, 곧 그의 혹은 그녀의 말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수고로운 즐거움이다. 그러나 ‘찌르는’(12:11) 고통이 있으니 조심하시길.


김순영/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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