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12)


예수가 아름다운 이유


중학생 때 프랑스로 떠났던 알고 지내던 아이가 방학이 되어 찾아왔다. 우리나라에서 너무 말썽을 피운 까닭에 더 이상 받아주는 학교가 없어 할 수 없이 부모가 낯선 땅으로 보내버렸던 아이다. 쫓기듯 떠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내게 당당하고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우리나라에서 지내던 내내 학생들과 학교로부터 제발 곁에서 떠나달라는 요청을 받아왔던 아이였다. 잘 지내냐는 의례적 인사를 건네고 나자 그 아이는 신이 나서 지나간 이야기를 시작했다. 프랑스 가길 잘했다고 너무도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기에 도대체 우리나라와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이는 크게 씩 미소를 짓더니 한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교육은 아이의 기를 죽이는 교육이라면, 프랑스의 교육은 아이의 기를 살리는 교육인 것이 차이점입니다.”


공자에게 가해진 질문 중에 참된 인간(군자)과 속 좁은 인간(소인)에 대한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눈에 두드러진다. 특히 ⟨안연⟩편은 이러한 물음들이 잘 집약되어 있다. 그 중에서 아름다움[美]과 그 반대인 어그러짐[惡]에 대한 구절이 눈에 뜨였다. 당시 미적 기준이 균형과 조화에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어그러짐의 개념이 선악의 개념과 상통했다.


“선생께서 말씀하기를 참된 인간은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어그러짐을 이루어주지 않는다. 속 좁은 인간은 그 반대다(子曰 君子 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 反是).” - ⟪논어⟫,⟨안연⟩12장 16절


참된 인간은 사람들이 조화미를 갖추도록 돕는다. 그러하기에 조화를 깨뜨려 어그러지게 만들지 않는다. 개인 내면의 조화는 물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어그러짐 없이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 것이 참된 인간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속 좁은 인간들은 그 반대의 일을 한다. 모든 관계들이 깨지고 어그러지도록 만든다.


이 말은 ⟪논어⟫, ⟨자로⟩편의 ‘참된 이는 동일하게 만들지 않지만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속 좁은 이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동일하게 만들려 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는 구절과 깊은 상관성이 있다. 억지로 획일적으로 만들고자 하면 거기에는 분명 어그러짐이 발생하기 십상이다.



동방에서는 서방의 선악 개념 대신에 미추(美醜)의 개념이 존재했다. 미추의 개념에서도 서방의 미학이 말하는 비율이나 배율과 같은 미에 대한 규정이나 산술적 법칙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이지러지거나 어그러짐 없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아름다움이라 여겼다. 동방에서는 미추 또한 존재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 하는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했다.


종종 아름답지 못한 이들을 대면한다. 내게 불편함을 주어 그를 만나거나 대화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그런 이들을 대하면 습관적으로 그가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일까를 측정하게 된다. 바탕이 나빠서 그런 건지 아니면 환경이 그를 그렇게 유도하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부딪힘 없이 원활한 것을 보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본질적으로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가 나쁜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이에게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어그러진 사람으로 비치는 경우가 더러 있기도 하다. 사람 중에는 본질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이들도 있겠지만, 때로는 관계가 나빠서 아름답지 못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창세기⟫ 앞부분에는 ‘하나님 보시기 좋았더라’라는 구절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온 우주를 창조하면서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이 구절이 등장한다. 너무도 흡족하고 아름다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좋았다’의 히브리어는 ‘토브’이다. 이것은 후에 선(善)하다로 확대 해석되지만, 원래 잘 어울린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에덴동산은 이런 아름다움의 집약체이다. 모든 것이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가장 완벽한 아름다운 상태였다. 그러나 문제가 생겨났다. 상대의 마음을 의심하고 상대로부터 마음을 분리하면서 문제가 일어난다. 마음으로부터 어그러짐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당부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맡기기 시작했다.


어그러짐은 얼른 회복시켜야 한다. 어그러짐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것은 끔찍하다. 하나님은 어그러진 인간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한다. 어그러짐 때문에 발생한 일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책임지도록 한다. 땅을 갈아야 먹고 살고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하는 아픔을 알게 하였다. 어그러짐의 결과는 수고이고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 ⟪창세기⟫3장 22-23절


처음의 사람들은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다. 에덴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나서 인간들은 더욱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살인과 도둑질,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어그러짐을 성서는 죄악이라고 한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 바벨탑의 사건, 노아 홍수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추악함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사야⟫는 아름다움이 회복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이사야 35장 1-2절).


이사야는 아름다움이 회복된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고 묘사한다. 사람과 자연, 인간과 동물이 어울려 지내는 상태가 낙원이라고 말씀한다.


예수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모든 어그러진 사람들을 바르고 아름답게 회복시켜주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을 분류시키고 더욱 어그러지게 만들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은 단숨에 단단한 어그러짐을 벗어버리고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했기 때문에 그를 향해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물론 완벽히 아름다울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아름다움을 회복하려 애쓰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분열과 어그러짐을 펼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습관화된 공동체는 예수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공동체에서는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사건이 꾸준히 일어나야 한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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