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이야기 2


그를 택한 걸 후회한다!

사무엘상 15:10-11


사울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읽기

오늘은 사울 이야기를 갖고 하는 두 번째 설교를 하겠습니다. 사울의 생애는 다윗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울 이야기 첫 번째 설교에서 저는 다윗을 만나기 전의 사울의 생을 간추려 얘기하고 설교 말미에 하느님이 사울을 왕으로 선택한 걸 후회했다고 얘기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이 내린 결정을 후회했다고 사실만도 놀라운데 성서는 몇 줄 아래에서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므로 뜻을 바꾸는 법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독자를 더욱 놀라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또 몇 줄 아래서 하느님은 다시금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반복해서 말을 바꾸니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모를 정도로 헛갈립니다. 사람도 이 정도로 말을 바꾸면 신뢰를 잃고 비난받기 십상입니다. 대선 레이스가 한창인 한국에서 사드(THAAD) 문제에 대해서 한 후보가 말을 바꿨다고 비난받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느님은 오죽하겠습니까. 사람을 비난하듯이 하느님을 비난했다가는 변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입을 닫고 있는 것이지, 속으로는 ‘하느님이 왜 이래?’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겁니다.


다윗이 등장하기 전에 사울의 주요 맞상대는 사무엘입니다. 두 사람은 이스라엘이 2백년간 이어진 사사시대를 벗어나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를 살았습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이고 사울은 첫 왕이었습니다.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를 잇는 중재자 역할을 했던 사무엘은 왕을 달라는 요구를 백성들로부터 받습니다. 외적, 특히 블레셋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면 전투를 이끌고 지속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를 자신의 지도력을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했지만 하느님은 백성들은 사무엘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거부하는 거라며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왕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그 후 사울이 보여준 태도와 행동을 보면 그는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서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지 않으므로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적폐청산’이란 말이 유행합니다.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폐해를 깨끗이 씻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저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다음 정부는 과거 10년의 적폐를 청소하는 데 임기 대부분을 보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아무리 일을 많이, 잘 해도 비난과 욕을 먹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행기를 책임진다는 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서 왕조시대로 넘어가던 시기의 첫 왕 사울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일을 잘 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무엘처럼 사사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세력과 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 모두에게 비판받기 십상입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다윗 등장 이전까지 사울의 생애를 요약했는데 얼마나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한다고 전제하고 오늘은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사울 얘기를 ‘현실적’으로 읽어보겠습니다. ‘현실적’으로 읽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사울과 사무엘을 비롯해서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얘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성서의 등장인물들을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모르는 걸 알고 있고 우리는 하지 못했던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단지 그들이 성서에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성서의 등장인물들은 천사가 아닌 ‘사람’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그 안에는 이기심도 있고 인간적인 욕망도 있습니다. 이기심과 인간적인 욕망을 억제하려는 노력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선의(善意)와 이기심이 갈등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계획과 의지가 나의 이해(利害)와 어긋날 때 갈등을 겪는다는 의미에서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둘째, 사울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읽는다는 말은 독자가 사건 현장에 주인공들과 같이 있다고 상상하며 읽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건의 당사자들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설화자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들이 뭘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를 다 아는 상태에서, 심지어 하느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행동할지도 다 압니다. 소설을 서술하는 관점에 ‘전지적 작가’의 관점이란 게 있습니다. 작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서술하는 겁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사실상 ‘전지적 독자’의 관점에서 읽고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제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일과 역사라는 것이 나중에 되돌아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보여서 역사의 ‘법칙’까지 운운할 수 있지만 당시 그 상황 속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정작 벌어진 결말은 그런 가능성들 중 하나였던 겁니다. 성서를 읽을 때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선을 가급적 버리고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주인공 곁에서 관찰하는 사람 입장에서 읽자는 얘기입니다.



사무엘은 왜 마음이 상했을까?

사무엘은 왕을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는 마음이 상했을까요? 왕을 달라는 요구가 하느님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였을까요? 그런데 하느님은 백성들이 사무엘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버린 거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백성들이 ‘감히’ 어떻게 하느님을 배신할 수 있느냐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사사로서 누려온 권한을 남에게 넘겨야 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요? 사무엘도 사람이니 말입니다. 기꺼이 홀가분하게 자기 권력과 영향력을 후임자에게 넘겨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무엘의 경우에는 이후 그의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그에게는 두 감정이 모두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백성들이 하느님을 배반한 데 대한 분노와 자기의 영향력을 잃는다는 불안과 섭섭함이 공존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경우처럼 하느님의 뜻이 내 이익과 어긋나는 경우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느님은 자기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입니다. 이런 얘기를 반복하는 것도 부끄럽지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느니, 하느님 잘 믿으면 아브라함처럼 만사형통한다느니 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으려고, 만사가 형통하는 삶을 살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하느님 믿고 예수 믿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이런 욕망을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처럼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제자로서 하느님의 뜻을 펼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와 나의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이 내 안에서 갈등합니다.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성자(聖者)가 아닌 한 이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우선 이런 갈등의 존재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갈등은 우리가 하느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득도하고 해탈해서 세상 안에 살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떨어져서 살지 않는 한 이 갈등을 우리는 안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앙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신앙은 우선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줍니다. 신앙은 ‘결코’ 우리를 만사형통한 길로 이끌어주지 않습니다. 세상에 그런 삶은 없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만사형통한다면 그것은 대개 누군가의 아픔을 딛고 서야 가능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 생이 만사형통하듯 잘 풀린다면 하느님께 감사하기 전에 혹시 내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힘들고 괴롭게 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욕망을 누르면서 사는 것, 나의 욕망보다 이웃과 더불어 잘 살거나 공동선을 우선하고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며 사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이런 삶을 즐겁게 만들거나 최소한 견딜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삶의 기쁨과 행복은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서만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나의 땀으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진다면, 나의 노력이 이웃의 삶을 고양시킨다면 나는 거기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욕망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이 어긋날 수도 있음을 인정, 인식하고 끊임없이 둘을 조화시키려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진지하게 듣고 있습니까? 다 버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나의 욕망을 공동선 아래에 두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인가, 사무엘의 말인가?

사무엘과 사울이 얽힌 얘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후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벌어질 세 가지 일을 예언했습니다. 가다가 두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암나귀를 찾았다고 알려줄 것이라는 것이 첫째이고, 세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빵 두 덩어리를 줄 것이라는 게 둘째이며, 그 후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하는 사람들을 만날 텐데 사울도 그들처럼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할 것이라는 것이 마지막입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보다 먼저 길갈로 내려가십시오. 그러면 나도 뒤따라 그대에게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릴 것이니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려 주십시오. 그 때에 가서 하셔야 할 일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예언이 실현된 때는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을 벌일 때였습니다. 두 사건 사이에 시간의 간격이 상당하므로 이 예언을 전쟁에 적용하는 게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그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울 군대와 블레셋 군대가 서로 맞서있어서 언제라도 싸움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전에 야훼 하느님이게 드리는 제사를 집전할 사무엘이 오지 않는 겁니다. 야훼 하느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는, 이른바 ‘거룩한 전쟁’에서는 싸움에 나서기 전에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제사장 역할을 맡은 사무엘이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애타는 심정으로 이레를 기다렸지만 그래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스스로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그런데 제사가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엘이 도착해서 이렇게 사울을 꾸짖었습니다.


(임금님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야훼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야훼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길갈에서 사무엘은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명령 자체에 모호한 구석이 있습니다. 조건은 ‘내가 갈 때까지’와 ‘이레 동안’이라는 두 가지였습니다. 이레가 되기 전에 사무엘에 온다면 문제가 없지만 이레가 지나도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좌우간 사울은 이레 동안 기다렸는데도 사무엘은 오지 않자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누가 잘못했습니까? 사무엘은 자기가 한 명령이 모호하다는 걸 몰랐을까요?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사무엘과 사울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모호한 명령을 한 사무엘에게도 잘못이 있고 이레를 기다렸다고 해도 사무엘이 오지 않았는데 제사를 드린 사울에게도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굳이 책임의 크기를 묻자면 사울보다는 사무엘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 더 얘기하자면 사무엘이 길갈에서 사울에게 명령했을 때 그게 하느님의 명령이란 언급이 없습니다. 자기의 명령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꾸중할 때 사무엘은 사울이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라는 명령은 사무엘의 명령입니까, 하느님의 명령입니까? 혹시 사무엘은 자기의 명령을 하느님의 명령을 혼동하는 게 아닐까요? 독자들은 사울 이야기 전체에서 대체로 사무엘은 옳고 사울은 틀렸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사무엘보다는 사울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지만 성서는 기다리라는 말이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하셨던 하느님나라 운동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운동의 중요한 부분이 하느님/예수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느님/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입니다. 과연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말씀이 진정 하느님의 말씀입니까?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하느님의 말씀인가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얘기는 목사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의 제자들 아닙니까. 우리 교회 주보표지에 ‘모든 교인’이 목회자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자기의 욕망을 다 버리지 못하고 그와 배치되는 사울을 어떻게든 주저앉히려 했던 게 아닐까요. 작은 일을 트집 잡아 그를 꾸중했던 것은 아닐까요. 더욱이 제사를 집전한 사울에게 선포한 저주는 도에 지나치게 가혹해 보입니다. 이 때문에 그의 왕조가 지속되지 않을 거라니 말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사울 이야기1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http://fzari.com/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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