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왕조사회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갑질의 향연만 반복된다. 갑질…, 결국 그건 ‘왕질’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지적하는 저자는 우리 사회의 왕조적인 모습을 이렇게 풀어간다. “우리의 공화정 도입이 시민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 행위와 자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순식간에 이식되었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의 특징을 잘 설명해 주기도 한다. 서구 사회가 프랑스 혁명(1789~1794)이라는, 시민의 힘으로 왕정을 종식시킨, 역사적 경험을 소유한 것에 반해, 우리는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강대국이 주도한 세계 체제 재편 과정의 하나로 타력에 의해 공화제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 사회 대부분의 마인드와 에토스는 임금을 모시던 때의 역사적 경험과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왕조 사회의 어르신 이데올로기’와 세월호 참사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저자는 “개신교는 ‘자영업’에 가깝다. 한국 개신교회는 사회적으로 공적 조직과 연 닿아있지 않다. 그래서 운영에 관한 일체를 신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전형적인 자영업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천주교의 경우는 전형적인 외국계 지사의 모습을 보인다. 천주교는 개신교처럼 자영업 마인드가 아니다. 뒤에 바티칸이라는 든든한 언덕이 있기 때문일까? 국내에서 영업이 좀 시원찮아도 자금력 두둑한 본사 덕분에 몇 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인지 한국 천주교의 경우 신자들에 대한 독려 행위가 개신교보다는 약하다. 반면 불교는 전형적인 공기업 마인드이다. 업무의 효율이나 생산성에 목매지 않아도 꼬박꼬박 때만 되면 계좌에 입금되는 월급의 유혹은 달콤하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종교의 상황은 그 종교가 기득권화되어 있고 그걸 지켜내고 확대하는 것에 일차적 관심을 쏟아왔기 때문이며 정작 해야 할 종교 수련의 길보다는 손쉬운(?) 세속적 영향력 확대의 길을 택하게 되고, 힘(權力)으로, 돈으로, 수(數)의 힘으로!”라는 슬로건으로 밀어 붙인다.

 

이러한 종교에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성찰,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 대중의 욕망에 대해 질타한다. 결국 종교는 기득권을 움켜쥐는 과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종교의 사망선고가 내려진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유교의 흔적을 살피면서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는 저자는 그때마다 서슴없이 “유교!”라고 답한다. 결혼을 고리로 이어진 가족주의에 기초한 유교란 종교의 가치관은 지금도 강력하다. 명절 때마다, 집안의 대소사 때마다 발길을 원적(原籍)으로 돌리게 하는 가장 강력한 에토스는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아닌 바로 유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교는 이를 사회적 제도 속에 깊이 각인시켜 놓았다. 그뿐인가? 설날이나 추석 같은 큰 명절에 집안 식구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며 가문의 영생을 축하하는 의례, 그것이 바로 제사이다. 이러한 유교의 에토스는 지금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매우 강력한 힘으로 작동되고 있다. 그러니 유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라고 할 수 밖에.

 

이에 덧붙여 한국종교가 민족주의와 어떻게 결부되어있는지, 각 종교의 경전읽기는 연애편지를 읽는 것과 유사한 성질의 것인지, 역사 속에서 종교는 어떤 행태로 파렴치하게 친일 행각을 벌였는지, 우리나라 최대 종교는 ‘수능교’라는 우스갯말까지 나올정도로 왜 ‘공부는 구도행위’가 되었는지 등등을 풀어가면서 보통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나쁜 종교’이고 ‘좋은 종교’일까? 이 물음에 대해 보통 사람이 생활세계에서 대하는 종교가 어떤가에 대해서 재밌는 에피소드를 통해 소개한다.

 

“야 니 어떤 기 참말로 좋은 종굔지 아나?”
“뭔데?”
“통일교 아이가!”
“우째서?”
“통일교는 교인이 되믄 장가보내준다 아이가!”
“참말로?”
“하모. 그라고 장가가믄 집도 준다 카더라!”
“집도??!! …야야, 그 참말로 좋은 종교네.”


“그럼 개신교는?”
“음… 그건 쪼매 애매하다. 교회 가믄 장가는 보내주는데… 뭘 쫌 마
이 내야 된다 카더라~”
“뭐를?”
“헌금! 헌금내야 된다 아이가! 교회는 기본으로 드는 돈이 장난이 아
니라 카더라.”
“그래도 장가는 보내주나?”
“하모 그래도 장가는 보내주니까 괜찮다 아이가!”

“집은?”
“… 집은 없다드라.”


“천주교는?”
“그거도 개신교랑 쪼매 비슷하다 카더라.”
“근데 문제는 신부하고 수녀는 결혼을 안 한다 안카나~”
“내는 그기 쫌 맘에 걸린다.”
“결혼을 안해보믄 사람 속을 잘 모른다 아이가.”


“그래 그람 다른 종교는 없나?”
“느그 대순진리회는 가지 마래이~”
“와?”
“거기는 장가도 엄꼬, 집도 엄꼬, 대신 들어갈 때부터 돈만 진탕 낸다 
아이가!”
“참말이가?”
“하모!”
“음… 그람 거는 안 되겠네!”

한국 사회는 왕조사회다

 

5년제 비정규직 공무원에 지나지 않는 대통령이 제왕적 군주가 되어 백성 위에 군림하고, 그의 임명을 받은 고위직 공무원들은 공복이 아니라 지배자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런 심정적 정황 가운데 정작 주권자요 납세자인 시민은 계몽적 군주만 손꼽아 기다리는 왕조의 백성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96쪽)

 

왕조 사회 속 갑질 문화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갑질의 향연만 반복된다. 갑질…, 결국 그건 ‘왕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여전히 사회적 에토스가 왕조적 마인드에 묶여 있다 보니 갑의 언사는 임금의 그것이 되어 어명처럼 서민의 심부를 찔러댄다. 이런 현상은 세월호 참사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스스로 갑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이 역사적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폄하하면서, 간단히 돈으로 해결하려고만 한다. 갑의 온정으로 두둑이 챙겨 줄 테니 이쯤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투의 훈계이다.(104, 106쪽)

 

왕조 사회의 어르신 이데올로기

 

한국 사회는 여전히 ‘왕조국가’적 성격이 강하다. 교종과 추기경에 대해 보여준 한국 사회의 반응은 왕의 즉위를 환영하거나, 혹은 왕의 승하를 슬퍼하는 왕조 사회 신민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다.(112쪽)

 

페스트, 메르스, 그리고 희생양

 

중세인들이 페스트의 공포를 유대인 죽이기로 상쇄하려 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도 메르스가 가져온 불안을 누군가를 공격함으로 무마시키려 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공격의 대상들은 사회의 약자들이다. 안 그래도 소외되고, 배척받으며, 그 때문에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사회의 다수는 날카로운 침과 바늘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21세기에도 이런 모습의 폭력을 만나니, 중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희생양 찾기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감염병의 문제는 의학과 그에 기반을 둔 정책과 시스템으로 풀어야 한다. 이를 신앙으로 섣불리 ‘해석’하려 드는 것 자체가 우리가 넘어서야 할 또 다른 감염병일 수 있다.(117쪽)

 

공부는 구도행위

우리는 공부를 종교적 구도행위의 하나로 각인하며 살아왔다. 이미 오래도록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집안 누군가가 똘똘한 머리를 지녔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데 전혀 거리낌 없는 에토스 속에 살아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생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유교 사회에서 공부는 일종의 구도 행위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가 공부로 성공해야 가문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과거’라는 국가시험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 사회는 공부에 대한 공동체적 신앙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제 공부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개인의 신앙적 책무가 된다. 왜? 그래야 영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은 한국에서는 신앙의 문제이다. 매번 입시철만 되면 이 땅위의 모든 종교를 대동단결하는 힘이 신앙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우리나라 최대 종교는 ‘수능교’라는 우스갯말까지 나올 지경이다.(157, 159쪽)

  

한국 교회와 샤머니즘

한국 교회는 편한 마음으로 샤머니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 혹은 희생타로 이용해 왔음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개화되고, 문명화되고, 심지어 정보화에도 앞서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 오히려 샤머니즘이 더욱 성행하고 있다는 이 엄연한 현실. 이것이 우리 사회와 한국 교회에 웅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 앞에 오히려 한국의 샤머니즘은 한국 교회로서는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타산지석의 대상으로 삼아야할 것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샤머니즘이 보이는 부정적 장면이 아니라 긍정의 그림들이다. 그것들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이해의 자세가 문제를 푸는 고갱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201-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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