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13)


행동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믿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하느님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고 말이다. 그 때 나는 ‘너와 나’라는 문구에서 ‘와’가 하느님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영어로 보면, ‘You and Me(너와 나)’에서 ‘and’ 같은 존재가 하느님으로 정의하고 싶다고 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사람과 자연 그리고 영원과 순간을 연결해주는 고리로서 하느님이 의미 있다고 답변했다.


철저히 존재론의 입장에 서 있는 이들이 있다. 어떤 개념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이다. 존재의 유무에 집착하여 자신들이 믿는 대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마련해야 안심이 되는 이들이다. 가치로서 또는 관계성으로서 가 아니라 개체성을 가지고 물질적인 형태를 지녀야 존재한다고 보는 이들이다.


어느 날 만장(萬章)이라는 이가 맹자에게 질문을 했다. 요(堯) 임금이 순(舜) 임금에게 천하를 넘겨주었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어쩌면 그의 물음 핵심은 선양(禪讓)에 있었는지 모른다. 유가(儒家)에서는 요(堯)가 순(舜)에게 천자(天子)의 권한을 평화스럽게 넘겨주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만장의 질문 속에는 그런 자부심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맹자는 답한다. 요(堯)나 순(舜)의 훌륭한 결단 때문에 그리 된 것이 아니라 하늘[天]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존재론에 집착하는 이들은 거푸 질문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하늘[天]은 어떤 존재냐고 말이다. 이에 대해 ‘요에서 순에게’의 매개주체가 하늘[天]이라 답할 수 있다. 영어식으로 말하면 ‘From Yao to Shun’에서 ‘from~ to~’가 하늘인 셈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하늘이 주었다.’ 만장이 물었다. ‘하늘이 주었다는 건, 상세하게 명령했다는 겁니까?’ ‘아니다. 하늘은 말[言]로 주지 않고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줄 뿐이다.’(曰 天與之. 天與之者, 諄諄然命之乎? 曰 否. 天不言, 以行與事示之而已矣.)” - ≪맹자≫,<만장장구 상> 5장 4절


음성언어가 지배적이었던 시절에는 진리가 음성언어로 선포된다고 생각했다. 하늘께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음성으로 들려줄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높은 지배계층일수록 음성언어가 익숙하다. 명령을 내리면 아랫사람들이 기민하게 움직여주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것은 낮은 계층의 몫이고 말하는 것은 높은 계층의 특권이라 생각한다.


지시하고 명령하는 이들은 결과물에 집중한다. 자신이 내린 말이 그대로 실현되었는지를 점검할 뿐이다. 어떤 마음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일의 결과가 산출되었는지 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결과물을 잘 점검하고 그것을 확장시켜 다음 결과가 생산되기만을 기대한다. 자신의 말과 그것으로 인해 산출된 결과물이 정확히 맞았는지를 비교한다.


맹자의 말은 기존의 사고를 전복시켰다. 기존의 사람들은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하늘께서는 말만 해도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늘은 황제보다 우위에 있는 절대적인 명령권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맹자는 하늘은 행동하고 실천하는 분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백성들에 의해 점검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피라미드 체계는 위로 올라갈수록 명령을 하달하는 개체는 줄어들고 권력은 강해지는 구조이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개체 수는 많아지고 권력은 약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은 가장 낮은 단계에 위치하고 있고 하늘은 가장 높은 단계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맹자는 가장 낮은 단계의 백성과 가장 높은 단계의 하늘이 하나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하셨다. 그때 유대인들이 에워싸면서 말한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고 말이다. 정통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임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임재할지에 대해서도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미리 정리해 놓고 있었다.


구약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메시야의 임재 방식이 예수의 방식과 너무도 다른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자신들의 논리에 의하면 메시야는 절대 권력을 가진 왕으로 임재하여 예전 다윗왕조의 영광을 회복시켜야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논리에 전혀 맞지 않았다. 예수의 논리는 기존의 논리 해체시켰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 ≪요한복음≫ 10장 25~27절


유대인들은 언어에 민감했던 민족이었다. 구약의 인물들이 음성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소통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모세 이후 돌이나 양피지 혹은 파피루스에 기록하는 문자언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모세의 율법처럼 음성언어를 문자언어로 바꾸는 일이 유대민족에게 특별히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이자 특권이라 생각했다.


예수께서 그들의 인식방법대로 음성언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밝혔지만 유대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민중들과 밀접하게 소통하는 예수의 모습 속에서 절대 권력을 지닌 왕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고구조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天子]은 높은 신분을 지녀야 하고 단지 음성으로 명령만 내리는 상부의 최고 권력층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공동의 저술 ≪천 개의 고원≫을 통해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을 부각시킨다. 기존의 학문체계는 나무와 같아서 수직적이며 논리적이고 위계질서가 있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수목(樹木)형 사고구조에 반(反)하는 구조가 리좀이라고 주장한다.


리좀은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관계성을 맺는 수평적 구조이다. 리좀 구조에서 존재의 의미는 관계성이 얼마나 견고하고 강하게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충분히 나누어 서로의 이해가 만나고 생각이 교차되면 결정하는 의사소통구조를 가진다.


예수는 스스로를 강력한 명령권을 지닌 왕이나 절대자의 설정하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관계에서 출발하여 결국에는 친구관계로 지내기를 원했다. 부모 형제와 같은 혈연관계도 같은 생각을 나누는 공동체 관계로 재정립하였다. 들뢰즈 식으로 표현하면, 피라미드식의 수목형 구조가 아니라, 리좀과 같은 관계성을 중심으로 한 수평관계로 재영토화되기를 원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실천행동에 대해서도 의문을 지녔다. 음성언어가 아니라 몸으로 구체화하는 태도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부정하려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말이냐 행동이냐 하는 문제가 핵심이 아니라, 예수를 신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본질적인 것임을 지적하였다.


예수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밝히 보이지만,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가리어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음을 말씀하셨다. 무엇을 볼 것이냐 하는 것에 앞서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 삶에서 중대한 의미인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대상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하늘이 내린 귀한 선물일 수 있겠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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