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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

막차를 타고 오시는 하나님

by 한종호 2015. 1. 29.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4) 

막차를 타고 오시는 하나님

 

인생은 오묘한 데가 있다. 아무리 갈증나게 원해도 끝내 얻지 못하는 것도 있고, 감불생심 바라지도 않았는데 뜻밖의 수확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던 사람의 절망과 원했던 것을 얻어낸 사람의 환희의 중간쯤에서 아직도 원하는 것을 원하는 상태로, 여태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한 상태로 지내는 사람이 더 많다. 이 게임과도 같고, 도박과도 같은 인생의 대회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누가 그 기회를 덥석 움켜잡느냐에 달려있다.’ 이런 말은 참으로 매혹적이고 감질 나는 말이긴 하다. ‘꼭 그렇기만 하다면하는 공연한 맘이 절로 나질 않겠는가. 그리고는 기대에 부풀어 손가락을 꼽으며 헤아려볼 것이다. 내 인생에 세 번의 기회란 어떤 것일까? 벌써 지나간 것인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지나갔다면 어떤 것이었고,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올 것인가? 지나간 기회를 잡지 못했다면 앞으로 오는 기회를 무슨 수로 알아보고 잡는단 말인가? 등등.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도 괜히 짜증이 나려는 것은 또 이런 이야기가 과연 이렇게 글로 쓸 만큼 가치가 있는 걸까, 하는 스스로 치사스러워 낯부끄러운 생각이 불쑥 든다.

왜 그렇게 된 것인지, 나는 본래 성공이나 출세 혹은 성공담이나 출세기 같은 간증에 무관심하게 살아왔다. 어떤 분은 나더러 뭔가 모르게 고루한 관념이 틀어박혀있다고 말했었는데 바로 그런 걸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가 성공을 싫어할 리도 없고 출세를 혐오할리도 없고 더군다나 그런 것들과 거리를 둔 은자(隱者)처럼 고고하게 살아가고픈 품격을 가진 인간도 못된다. 사람들이 가난을 싫어한다면 나야말로 그것을 끔찍하게 여기고, 사람들이 무명(無名)을 두려워한다면 나야말로 그것을 죽음처럼 여긴다.

그대는 가난하니 얼마나 행복한가?’ 이런 말이 가능키나 하겠는가? ‘그대는 빛을 보지 못하고 사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런 말이, 말이 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제일(第一)의 목표가 가난탈출이나 무명 탈출은 아니었으니, 그것은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종의 운명적 성향이라 해야할까. 고루하다면 고루한 나에게는 이렇게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향한 어떤 목적을 숨겨두고 혹은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거기에 그럴듯한 명분을 갖다 붙이는 것을 오늘날까지도 차마 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듣기 좋은 말과 착한 표정, 지나친 공손함으로 환심을 사는 것은 좌구명이 부끄러워하였고, 나 역시 그러하다. 가슴 속에 원망을 감추고 그 사람과 벗이 되는 것은 좌구명이 부끄러워한바 이고 나 역시 그렇다.” (논어, 공야장편) (이런 말을 어찌 타인을 손가락질하는 데 써먹겠는가.)

더러 나를 애석히 여겨주는 사람들을 대할 때 곤혹스럽다. 가진 것을 펼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다는 뜻일 것이다. 나 역시 스스로가 행복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무참하고 부끄럽다. 나 같이 모자라는 위인이 가진 재주가 많다는 칭찬을 듣는다는 것도 부끄럽지만, 그런 재주를 가졌든 못 가졌든 송구스런 위로를 듣도록 살아온 내가 더욱 한심하다 싶어 무참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건대 과연 내가 나에게 뛰어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를 인정한 적이 있었던가? 아닌 것 같다. 하여 혹은 내가 자기 능력을 인정치 않은 결과가 이런 것일지 모르겠다.

 

 

최근에 나는 누군가로부터 사람의 틀이 아주 작아졌다’ ‘사십대 중반이 넘어서도 고치지 못하면 변화되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옛날에는 세계를 마음에 품고 있었으나 이제는 고작 자립도 불투명한 작은 교회를 가슴에 품고 전전긍긍한다는 것이다. 그래 고작 거기서 일희일비하면서 작게 논다는 말인즉 생각을 달리하면 그런 나를 따르는 사람들까지 망치는 일이 아니냐는 딱한 사랑의 권면이었다. 나는 그만 당황하여 대꾸할 말이 없었다. 부끄럽고 화도 나고 반발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작아진 것이 아니라 내 본래의 뜻은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 있었노라 변명을 한 대야 그 말이 더욱 내가 작다는 증거가 될 판이니 입을 다물 수밖에.

그렇게 해서 나는 지쳐있고 작아졌고 열정을 잃었고 리더십에 부족함이 많고, 뭔가 특단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갑자기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성공의 아성들이 올려다 보였다. 나는 그동안 무슨 레이스를 펼쳐왔던 것일까? 다 수긍하고 인정하고 더러는 눈물을 흘리도록 뼈가 아프기도 한 사랑의 말이 아닌가. 솔직히 누가 뭐래지 않더라도 지난 수년간 이와 같은 생각이 나를 얼마나 짓눌렀었는지 내가 잘 알고 있다. 나는 기꺼이 이 모든 나를 아껴서 일러주는 사랑의 매를 맞을 각오가 돼있었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나 바라고 있음을 깨닫고 후회했다. 그리고 그런 내 자신이 통쾌했다. 이로써 너는 정말 변화되어야 한다는 결심이 서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고린도후서 11:23).

때론 야속하고 서러운 것도 살아갈 힘이 된다. 나는 그렇지 않았었다는, 그런 말들은 내가 들을 말이 아니라는, 마음 속 억울함도 발분의 믿음이 된다. 인생에는 오묘한 데가 있기에, 번영의 신학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눈물 나는 천국이 있다. 나는 그 천국이 억울해서라도 내 자신을 회개하고 위로받기를 거절했다.

세상엔 언제나 형편이 좀 나아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너에겐 뭔가 문제가 있어 이 꼴이라는 식으로 안타깝지만 냉정히 말해 그렇다는 평가가 있는 줄 안다. 그렇다. 나도 인정한다. 오늘날의 나의 형편과 모습은 그들이 자기들의 세계에서 그랬듯 내가 그것을 진실이라 여기면서 선택하고 걸어온 결과다. 나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고, 뜻을 발견했고, 인자하심도 발견했다. 차라리 내가 이 길에서 일패도지한다 할지라도. 너는 이제 변화되어야한다는 사랑의 말이 이렇게 아플 줄이야.

텔레비전을 보다 하나님은 막차를 타고 오신다라는 멋진 말 하는 것을 들었다. 세 번의 기회든 네 번의 기회든 단 한 번의 기회든 나는 지금껏 그런 기회를 바라며 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 속에서 느끼고 감수하는 고통을 통해서만 세계와 하나님을 깨닫고 이해하고 알아간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이 교회도 세계도 우리나라도 가장 고통스럽고 외로운 사람들의 현실로부터 솟아나는 신적 은혜와 사랑과 상상력이 아니라면 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부르주아의 허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역전시키는 반전드라마의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오는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오는 축복이다. 아무려나, 다시 계속 된다는 것이다. 이제 더욱 분발하여 나의 위태롭고도 풍성한 교회를 성심으로 세워나가야겠다. 신의 나라는 내 마음 속에 있음이니, 타인의 사랑의 아픈 말 보다야 성령의 따뜻한 책망 때문에 우는 게 얼마나 유익한가.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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