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영의 구약지혜서 산책(7)


왜, 지혜의 낙관적 기대를 무너뜨리는가?


지혜는 유산처럼 아름답다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전도자)은 지혜의 가치와 유용성을 말하고 가르치는 지혜 선생이다(전도서 12:9-10). 그에게 지혜는 유산처럼 아름답고, 돈의 그늘 아래 있는 것처럼 유익하다. 지혜를 소유한 자는 생명까지 보호받는다(7:11-12).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 되도다

지혜의 그늘 아래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라

(7:11-12, 개역개정)


코헬렛이 지혜의 가치를 돈과 비교하니 이 보다 더 적나라할 수 있을까 싶다. 이 말은 잠언의 지혜처럼, 지혜의 오른 손에는 장수가 있고 왼손에는 부와 명예가 있다(잠언 3:16)라는 지혜의 실용적인 맥락과 일치한다. 게다가 지혜를 얻은 자에게 지혜가 생명나무가 된다(잠언 3:18)라는 이스라엘 지혜 전통과도 꼭 들어맞는다.



그러나 코헬렛은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소득으로 만족하지 못한다(5:10)라는 가시 박힌 말도 거침없이 한다. 동시에 “돈은 만사를 해결한다”(10:19, 새번역)라며 돈에 대한 솔직한 관점도 주저하지 않았다. 코헬렛이 돈의 전능성을 말한 것인가? 아니다. 돈은 세상살이에 꼭 필요한 재화다.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서 돈의 가치를 평가한 말이다. 필요를 채우는 효용가치를 생각한 것이지, 돈을 필요 이상으로 절대화 시켜 돈의 만능성을 말한 것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현대사회에서 돈은 요술방망이 같은 환상과 성공의 잣대다. 지금 우리는 자본의 힘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자본 만능의 시대를 산다. 그러나 코헬렛은 돈의 유익을 말하면서도 지혜의 유익에 빗대어 지혜의 가치를 더 옹호했다(7:12). 돈이 주는 유익이 있지만 지혜만큼은 아니다. 돈은 결코 사람을 고상하게 만들지 않는다.


엎어진 지혜의 기획

코헬렛은 지혜와 돈이 삶의 은신처가 될 수 있지만, 돈이 지혜의 탁월성을 대신할 수 없음을 밝혔다. 이렇게 그는 주류 지혜의 전통과 결별하지 않지만,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흑과 백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는 사람의 지혜로운 행동이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는 틈을 관찰했다. ‘지혜’는 ‘전쟁 무기’보다 강하지만(9:18), 항상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지혜가 힘보다 좋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9:16, 개역개정)


인생은 우리의 기대처럼 호락호락하지도 착하지도 않다. 코헬렛은 전통적인 지혜의 생각, 곧 지혜가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보편적인 기대에 인간이 끼어들 수 없는 틈을 생각했다. 주류 지혜전통으로 통하는 잠언에서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을 가진 자는 힘을 가질 수 있다(잠언 24:5)라고 했지만, 코헬렛은 그 맥락을 이어가면서도 거기서 벗어난 다른 측면을 관찰했다. 그는 지혜가 가져올 유익과 기대를 꺾는 반전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이것은 지혜 전통과 현실 사이의 괴리, 곧 지혜의 기획까지 엎어버리는 지혜의 역설이다.


전통 지혜의 가르침은 ‘지혜’와 선(善)을 동의적 개념으로 여기지만, 코헬렛이 보기에 지혜의 가치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지혜가 전쟁 무기 보다 좋다

그러나 죄인 한 사람많은 을 무너지게 한다(9:18, 필자의 번역).


코헬렛은 많은 선을 무너지게 만드는 죄인 한사람의 파괴적인 힘과 착함의 무력함까지 콕 찍어 말했다. 착함의 무력함처럼 무기보다 좋은 지혜가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은 하찮은 어리석음 때문이다.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10:1, 개역개정).


변변치 않은 어리석음이 지혜와 영광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니. 지혜가 탁월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어리석음과 죄의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 않다. 코헬렛은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중화된 생각을 비집고 들어와 지혜의 낙관적 기대를 전복시켰다.


왜일까. 어쩌자고 코헬렛은 우리의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의 기대를 격파하고 들어오는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지나치게 떠받들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귀중한 것을 너무 귀하게 여기지 말라는 뜻인가? 끝내 코헬렛은 지혜의 우수성을 의심하는 것 같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7:16, 개역개정).


코헬렛은 먹고 마시며 노동 안에서 즐기는 일상의 가치를 드높였지만, 그의 말에는 일상의 지식을 뛰어넘는 통찰이 있다. 지혜조차 한계에 봉착하는 순간을 관찰한 그는 수립된 전통적인 체계들을 계승하면서도 대중화된 지혜의 가치와 배움을 해체시킨다. 나는 그에게서 치열하게 관찰하고 사유하는 자유를 배워간다. 인생길은 오르막과 내리막, 슬픔과 기쁨의 양극적인 사태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니(3:1-8) 형통한 날은 즐거워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면 된다(7:14). 안달복달하며 발버둥 칠 이유가 없다.



그러면서 코헬렛은 지나치게 지혜롭지 말라며 극단을 피하는 자세를 논했다. 인생의 기복에 의연해지기를 바라는 코헬렛이 ‘지나침’을 경계하며 축적된 지혜 경험의 한계, 곧 지혜의 불확실성을 말한 것이다. 보고 또 보고 묻고 또 묻는 그였지만, 누적된 온갖 지혜의 성과들을 철저하게 파헤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던 거다. 그러니 광대하고 아득한 ‘미지’의 영역, 곧 ‘영원’을 말했을 터(3:11). 이것은 온갖 지혜와 지식에 관한 한계 인식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겸허함을 터득하는 창문이며 통로다. 하여 지혜의 야심찬 기획마저 무너뜨리는 그의 말들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인간이 마치 전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준엄한 뜻의 권고다.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여기하십니까?》 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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