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23)


여러 민족의 어머니, 사라


창세기는 태곳적 역사(1-11장)와 아버지 족장들의 이야기다(12-50장).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 탄생하기까지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을 위한 약속의 담지자가 된다.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수메르의 수도 우르에서 살던 아브라함, 그에게 하나님은 땅과 수많은 자손을 약속하시면서 불러내셨다(창세기 12:1-3; 15:5; 22:17). 땅과 후손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서 멈추지 않고 그의 아들 이삭(26:3-5), 손자 야곱(28:13-14; 35:11-12)에게로 이어져 반복되고 확증되었다. 고대 사회의 장자 권리를 타파하고 작은 자를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지만, 창세기는 혈통의 부계 권리를 보강한다.


그런데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끼어들기 시작하는데, 그 첫 번째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불임이다(11:30; 16:1). 약속의 성취를 맛보기까지 아내 혹은 어머니의 상태가 묘사되지만, 여성들의 등장이 여성의 권리 옹호는 아니다. 여성들은 결정적 순간에 이야기 경계 밖으로, 관심 밖으로 사라진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로 이어지는 약속에서 어머니들은 그저 아버지의 주도권 아래 종속된 존재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는 순간에(12:1-3),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는 중대한 국면에서 아내들과 어머니들은 없다.


사라졌던 어머니들은 자기 아들을 위해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이것은 고대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의 신분 보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아들 출산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역설적으로 약속의 계보를 이어가야 할 창세기의 어머니들은 모두 불임의 문제를 안고 있지 않은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25:21), 야곱의 아내 라헬에 이르기까지(30:1-21) 아들을 원했지만 쉽지 않았다. 때문에 이들은 다른 여자를 통해서라도 아들을 얻는 방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고착시켰다. 여성들도 한 사회의 유익을 도모하는 사회적인 실체이지만, 창세기의 어머니들 묘사는 가부장적인 사회의 측면들과 일치했다.


또한 이스라엘과 이웃하는 나라들은 복잡한 아브라함 가족관계의 서술 속에서 드러난다. 이스마엘, 에돔, 암몬, 모압, 미디안, 동쪽의 아랍 족이 동일한 부계로 통일되지만(26:1-6), 이스라엘만 하나님 약속의 계승자였다. 일부다처제가 용인된 사회의 가족은 아내들 사이의 다툼을 가져왔고, 서로의 이익 충돌은 분열의 원인이었다.


때때로 남성들의 갈등과 지배력 문제들은 여성들을 통해서 결정되기도 했지만, 가족 갈등의 중심에 여성이 자리 잡게 된다. 이스마엘과 하갈은 사라 때문에 쫓겨나야했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어머니 조상들의 적극적인 행동은 자식 편애로 나타나곤 했다. 이것이 가족 관계의 갈등을 불러왔지만, 아버지들도 자유롭지 않다. 에서를 더 사랑했던 이삭, 요셉을 유달리 사랑했던 야곱의 편애는 형제들 간의 불화와 갈등을 만들었다. 여러 갈등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 위기로 이어져도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이 구속 역사의 원동력이었지만, 가족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약속의 위기를 가져오는 이야기들 중에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이 부부가 처음 등장할 때의 이름은 아브람과 사래다(12장). 그러나 17장에 이르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재확인시키면서 그들의 이름은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뀐다. 이로서 그들은 민족의 아버지(17:5), 민족의 어머니(17:15-16)로 부름 받는다. 하나님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위기에 처해지는데, 그 첫 위기는 사라가 두 번에 걸쳐 이방 나라 왕의 아내로 취해질 때다. 이들이 이집트에 머물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현지인들이 자기 아내를 탐내고 자기를 죽일까 염려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다(12장). 두 번째는 그랄 땅의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원할 때였다(20장).


이렇게 여자 조상인 사라의 위기는 하나님의 약속의 위기와 궤를 같이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룰 것과 땅을 약속하셨을 때, 어떻게 아내 사라 없이 자손을 얻을 수 있는가. 그런데 사라는 여성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남성들에 의해 주고받는 존재로 취급당한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사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12:13, 새번역)


사라가 이집트 왕에게 보내지는 과정에서 사라의 반응은 생략되었다. 사라는 아무 말이 없다. 사라는 남자들의 관계에서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사라는 자기 몸의 결정권을 갖지 못했고, 사라의 몸은 남자들끼리의 문제로 넘겨졌다. 이미 하나님의 약속까지 받은 자가(12:2-3) 자기 목숨을 구하겠다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는 것이 가능한가. 구차해 보인다. 아내를 보호하려는 일에는 관심이 없지 않은가.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통로가 될 것은 물론이고 땅을 소유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자기 아내를 다른 이방 남자에게 넘겨주는 것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런데 아브라함 때문에 발생한 위기 상황을 하나님이 해결하신다. 이 사건 이후에도 아비멜렉과 사라의 이야기 속에서 본문은 둘 사이에 어떤 성관계도 없었다는 것을 애써 밝힌다(20:4).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사라가 남편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리시고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셨다(20:4-7).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은 아비멜렉의 말과 행동으로 사라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쪽으로 진행되었다(20:16).


다행히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집트(12장)와 그랄 땅(20장)의 이방 왕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녀를 남편에게 되돌려 보냈다. 물론 두 이방의 왕들은 돌려보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것이 원인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방 왕에게 재앙을 가져왔거나 죽음과 민족말살의 위협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하여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화해의 선물로 양과 소떼, 남종과 여종, 그리고 땅을 주었다. 그는 아브라함의 은밀한 행동과 달리 공개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아내를 도구삼아 안전을 확보하려고 했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는 후대의 신앙인들에게 가부장적인 문화 안에서 생겨난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수용과 태도를 갖게 했다. 베드로 사도는 사라의 순종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언약의 담지자로서 남편과 아내의 동등함의 모범으로 사라 부부를 제시한다(베드로전서 3:6-7).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에게 사려 깊은 배려를 하지 않은 것은 비판받지만, 사라는 칭찬을 받는다. 이 칭찬은 베드로가 살았던 그리스-로마 문화의 강력한 가부장적인 질서에 익숙한 남편들에게 자기 아내를 하나님 일의 동등한 협력자로서 대우하도록 도전하는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남편 된 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아내가 여성으로서 자기보다 연약한 그릇임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은 사람으로 알고 존중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베드로전서 3:7)


이렇게 베드로 사도는 사라를 자기 시대로 끌어내어 신앙 공동체의 남편들에게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은 사람”으로 동등하게 존중하도록 요청했다. 남편 아브라함 때문에 위태로운 순간을 넘겼던 사라가 남편과 동등하게 “여러 민족의 어머니”(창세기 17:16)로서 부름 받은 사실은 후대 신앙인들의 말과 글로 재현될 때에야 묻히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신앙의 독자는 구약성경에 서술된 고대 이스라엘과 구속 역사에 묻어난 문화적인 간격들과 마주해야 한다. 이때 현대 독자의 눈에 납득되지 않는 불편함이 여럿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때로는 ‘불편한 지적질’을 하게 되는데, 불편함을 슬쩍 넘기지 않고 제기하는 것은 사소한 트집이 아니다. 거기서 질문이 생기고, 어쩌면 정곡을 찌르는 답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김순영/구약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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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6)


문장을 모두 암기한다고


이스라엘로 유학을 갔던 구약학 전공자가 한 초등학교를 들렀을 때 받았던 충격을 전해주었다. 이스라엘 초등학생들은 4학년 정도가 되면 모세오경을 외우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면 구약성서 전체를 암송한다는 것이었다. 구약전공자인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면서 이제부터 성서를 외워보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비장한 태도가 내심 거슬린 나는 슬그머니 조선시대에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예수께서 활동하던 시절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줄줄이 꿰었던 이들이었다고 말했다. 암기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단 한 문장도 제대로 실천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답했다.


“시 삼백 편을 외워도 정사를 맡아 꿰뚫어보지 못하고, 사신으로 가서 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비록 외운 것이 많아도 무슨 소용 있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 - 《논어》, 〈자로〉5절


공자께서는 중국내에서 회자(膾炙)되는 그리고 의미 있는 시(詩) 305수를 모아 분류하고 편집하였다. 고도로 압축된 의미를 단어 속에 담아두고 비유법을 통해 더욱 정교하게 만든 것이 시문장이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를 다루는 고도의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뜻한다. 단순히 암기하는 것으로 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무수한 일들이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사를 파악하는 일로부터 사람들에게 임무를 주고 그것을 점검하고 결과를 분석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모든 일들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사라는 것이 언어로 시작하여 언어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교 역시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해 설득과 계약 그리고 다툼과 쟁론을 전개한다.


그렇다면 시구를 줄줄 외우면 언어에 대해 통달할 뿐 아니라, 모든 일을 능히 대처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공자는 문장을 모조리 외운다고 능사가 아님을 지적한다. 이들 문장이 지닌 의미를 깊이 파악하여 그 문장대로 살아가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전 중국에서는 의미를 밀도 높게 압축해놓은 시(詩) 구절로 서로의 마음과 의도를 주고받는 것을 매우 고상한 일로 여겼다. 그래서 중국의 사신이 조선에 온다는 소식이 접수되면 임금은 한시(漢詩)로 응대할 수 있는 학자를 수소문했다. 조선의 한시 수준이 중국에 비해 대단히 저급하다고 자책했고, 실제로 중국 한시를 듣고 응대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나이 71세 때 지은 시 〈노인일쾌사 6수 - 효향산체〉에서 ‘노인이 되어 즐거운 일 중의 하나는 붓 가는대로 마음껏 시를 쓰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려운 한자의 운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까다로운 중국의 율과 격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면서 ‘나는 조선 사람이기에 장쾌히 조선시를 쓴다’고 선언한 것이다.



언어는 종종 사람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언어에 의해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자기중심을 가지고 세상에서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는 언어의 예속 사슬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비평작업이다. 비평은 언어 속에 감추어진 독재성과 억압성 해체하는 작업이다. 그저 문장을 달달 암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언어의 힘은 문장력에 있지 않다. 논리적인 힘으로 상대를 설득하거나 감동시키는 것이 언어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언어가 힘을 얻는 것은 언어가 그대로 실행될 때 힘을 갖는다. 머릿속에서만 머물던 관념 형태의 언어가 삶 속에 구체화될 때 힘을 얻는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하면서 ‘말씀(로고스)’라고 정의했다.


헬라어 ‘로고스(logos)’의 원래 의미는 ‘말’ 또는 ‘이야기’이다. 넓은 의미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구약의 바벨탑 사건을 통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끼리 결속을 이루고, 언어의 구별과 차별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 분열이 시작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언어다’라고 정의했을 때 쏟아졌을 반향을 우리는 쉽게 짐작해낼 수 있다.


주변을 맴돌며 끈질기게 예수를 괴롭혔던 대표적인 사회계층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리새인이다. 이들은 경건주의자로서 구약의 율법에 충실했던 이들이다. 구약을 모조리 외우는 이들이었고, 그것을 해설했던 탈무드와 관례까지 정통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율법(토라)은 곧 문화였고 역사였고 언어였다. ‘예수가 언어다’라는 은유는 예수가 율법 그 자체라는 선언이었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태복음》, 19장 20~22절


어느 날 한 청년이 예수께 와서 영생에 대해 물었다. 어떤 선한 일을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답했다. 청년은 어느 계명이냐고 물었고, 자신은 그 모든 계명을 모두 다 철저히 지켰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모두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또한 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셨다. 율법이 지닌 심층적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실천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였다. 율법의 능력은 읽기나 암기 또는 형식적인 수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실천으로부터 야기(惹起)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배드민턴을 즐긴 적이 있다. 빠른 몸놀림이 매력적으로 보여 배워보고자 했다. 라켓을 사고 셔틀콕을 샀다. 그리고 배드민턴에 관한 서적을 몇 권 구입했다. 기본자세로부터 역사와 규정, 다양한 기술들을 책을 통해 섭렵해나갔다. 누구와 배드민턴에 관해 이야기하라면 몇 시간이라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지식과 정보를 지닐 수 있었다.


몇 번의 연습을 하고 이제 입문한지 얼마 안 된다는 연세 지긋하신 분과 코트에 마주섰다. 부지런히 사방 뛰어다녔지만 몇 점 획득하지 못하고 참패하고 말았다. 머릿속에 그득한 지식들이 몸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머리가 아닌 몸이 지식을 터득하거나 적어도 몸과 머리가 동시에 습득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을 학습(學習)이라고 한다. 학(學)은 정보 또는 지식을 머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습(習)은 몸이 정보나 지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습(習)만 반복적으로 하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몸을 사용할 뿐이다. 학(學)에만 몰두하면 머릿속에서 지식이 맴돌다 또 다른 이론만 생산해낼 뿐이다. 신앙은 이론만도 관습만도 아니다. 신앙생활은 온전한 학습이요 공부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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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4)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4 다시 없을 오스카들의 노래


코랄 판타지아


첫 번째 합창곡은 오페라의 서곡과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코랄 판타지아입니다. 바흐에게 있어 판타지아는 형식에 구애 없이 작곡가의 음악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쳐냈다는 의미입니다. 서곡은 연주자로부터 청중까지 그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음악으로 모아주는 역할을 하며 전체 음악의 내용이나 주제를 함축하고 있지요. 특히 이 곡은 두 개의 4성부 합창과 리피에노 합창의 코랄까지 총 세 개의 합창이 노래를 주고받으며 어우러지는 큰 스케일의 곡입니다. 이 세 개의 합창단은 저마다의 역할이 있는데 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 이 곡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합창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따르며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예루살렘의 딸들’(누가복음 23:28)입니다. 두 번째 합창은 극 속의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십자가와 주님이 당하는 수난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채 구경꾼처럼 군중의 틈바구니에 섞여 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도 그 중에 하나였겠지요. 마지막으로 코랄을 부르는 리피에노 합창은 극 밖에서 이 모든 상황에 정서적, 신앙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성도들로 이 곡에서 코멘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이 음악을 듣고 있는 청중들이라고도 할 수 있고 판소리로 치면 감정적, 정서적, 영적 반응을 하고 맞장구를 치는 ‘추임새’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리히터의 1971년 영상을 보시면 세 개의 합창단이 나뉘어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 중 뒤쪽에 있는 소년합창단(뮌헨 소년합창단)이 세 번째 합창단입니다. https://youtu.be/dfLNM7tlSF8




전주와 함께 펼쳐지는 장면은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을 연상케 합니다. 먼저 오보에와 플롯이 함께 슬픔과 고통 그리고 비장함이 뒤범벅 된 선율을 연주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멈춤 없이 계속 되는 느리고 무거운 12/8 박자의 리듬은 이 세상 죄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는 고난의 발걸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발걸음은 2박자 계통으로 표현되는데 12/8 박자는 3박자 계통으로서 절뚝거리듯 힘겨워하시면서도 사랑과 인내로 끝까지 감내하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칼 리히터의 템포가 대부분의 다른 지휘자들이 선택하고 있는 템포보다 확연히 느린 이유와 이 곡의 템포를 너무 빠르게 잡는 것이 바흐의 의도를 거스르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1971년 녹음된 리히터의 영상판은 1958년의 녹음보다 더 느리지요. 원래 모든 음악적 템포는 빨라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지금 골고다를 향할수록 점점 지쳐가고 있습니다. 1971년의 영상에서 이 곡을 보십시오. 지휘를 위한 최소의 동작만을 가지고 템포를 지켜나가며 끝까지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 집중하는 리히터의 지휘는 실로 경탄스럽습니다. 멋진 폼으로 지휘하는 지휘자가 유능한 것이 아닙니다. 지휘자는 무용가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실제로 칼 리히터만큼 멋진 폼을 가진 지휘자도 또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1971년 영상이 11분에 이르고 1958년 녹음은 10분정도이며 리히터 이후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8분에서 9분정도에 첫 번째 합창곡을 마무리합니다. 음악적으로 굉장히 커다란 차이지요.


소리마저 뛰어넘는 음악


바흐의 교회음악은 단지 예배를 위한 부수음악이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언어적 설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거기에 음악이 덧붙여짐으로 설교에 음악의 날개를 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리마저 뛰어 넘는, 인간의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한 총체적인 설교가 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해 드리겠습니다. 


이 첫 합창곡의 가사를 보십시오. 예루살렘의 딸들은 계속 ‘보라’라고 외칩니다. 보는 것은 시각적 감각입니다. 아마 당시의 청중들은 이 음악을 들으며 알자스 어느 작은 마을에 있다던 그 유명한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바흐 음악에서는 이처럼 시각적인 감각이 매우 중요하며 때로 음악을 뛰어 넘어 예배당에 걸려 있는 성화와 같은 시각적 역할을 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 수난곡 전체가 이젠하임 제단화 같이 예수의 수난 이야기를 펼쳐 놓은 것이라면 이 합창곡은 그뤼네발트의 그림 속에서 십자가의 예수를 가리키고 있는 세례요한의 손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흐의 교회음악은 예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시각적인 감각까지 아우르는 총체적 설교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1511∼1515)부분. 운터린덴 미술관 소장



다시 첫 번째 합창곡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극중의 성도들에게 신랑을, 어린 양을, 그의 인내를, 우리의 죄를 바라보라고 독려합니다. 처음에 두 번째 합창단은 십자가와 주님의 수난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Wen? Wie? Was? Wohin?’이라고 묻는 것이지요. 하지만 곡 후반에 그들 모두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면서 사랑과 은총으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만나고 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이 구절이 마태 수난곡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 메시지입니다.


Sehet ihn aus Lieb und Huld Holz zum Kreuze selber tragen.

그를 보라, 사랑과 은총으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그 분을.


다시없을 오스카들의 노래


합창곡 30마디에서 리피에노 소프라노 파트는 당시 루터교회에서 성 금요일에 회중 찬송으로 불렸던 ‘O Lamm Gottes unschuldig/오 죄 없으신 어린양이’라는 코랄을 유니즌으로 부릅니다. 이 곡은 당시의 회중들이 다 알고 있는 곡이었기에 아마 이 부분에서 성도들은 추임새를 넣듯 나지막이 이 선율을 따라 불렀을 것입니다. 칼리히터의 1958년 녹음에서 이 부분을 부르는 뮌헨 어린이 합창의 노래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부분을 듣고 ‘경악’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인 감정적 반응에서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분명 처절한 절규의 목소리인데도 흐트러짐 없이 놀라운 절제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로테스크함과 순수함이, 공포와 위로가 뒤섞여 뭐라 할 수 없는 이 감정이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https://youtu.be/3icLbxogeV4


하지만 이 음반이 녹음된 1958년의 뮌헨을 생각하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갔습니다. 녹음 연도가 1958년이고 소년합창단은 변성기 후에는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연주에서 노래하는 소년들은 대부분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모국의 패망을 전후하여 태어났을 것입니다. 전쟁의 아픔과 비극 그리고 재건을 위한 고된 시절은 이 소년들의 보드라운 어린 마음에 이미 굳은살처럼 고스란히 배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뮌헨은 히틀러의 정치적 고향으로 전쟁의 참상이 더욱 심했던 곳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지역적 조건이 이러한 노래를 끌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한 소년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오스카’입니다. 이 소년의 이름만 들어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귄터 그라스의 소설과 동명의 영화 ‘양철북(Die Blechtrommel, 1979)’을 말씀드리면 기억하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가장 비극적이고 암울했던 시기에 스스로 사다리에서 뛰어 내림으로 육체적 성장을 멈추어 버린 소년 오스카… 뮌헨 합창단 소년들의 노랫소리는 그 참상을 겪어 내라고 일방적으로 세상에 내던져졌던 오스카들의 노랫소리, 바로 오스카들이 두드리는 양철북 소리였습니다.


어쩌면 오스카는 스스로 육체적 성장을 멈추어 버린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감당키 어려운 비극적 상황을 다 받아 내며 ‘애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영혼들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스카는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정작 전쟁에 책임이 있었던 이기주의와 위선에 찌든 평범한 소시민들의 사생아였습니다. 평화를 깨뜨리고 전쟁과 파괴를 일으키는 것은 한 사람의 악마도 아니고 집단적 광기도 아닙니다. 평범한 소시민들의 개인주의와 이기심의 악마적 연대가 증오를 낳고 평화를 깨뜨리고 그 마성이 히틀러라는 얼굴마담 한 사람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우리의 죄성 안에 보편적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현실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독일인들은 그 참혹한 전쟁 후에 마태 수난곡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동족간의 전쟁이라는 더 잔인한 아픔을 그저 덮어놓은 채 새마을 노래와 군가와 유행가를 불렀습니다. 독일인들의 죄와 아픔은 계속 용서되어지며 치유되고 있는 반면 우리의 죄와 아픔은 계속 변이되고 있으며 곪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이제 주님의 수난곡을 함께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죄악과 아픔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마태 수난곡 첫 번째 합창곡의 가사처럼 ‘ Erbarm dich unser o Jesu!/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 예수여라고 노래하며 진정 회개하고 울부짖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입니다. 진정한 용서와 치유 그리고 평화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의 노래는 남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향한 절규가 되어야 합니다. 그 노랫소리는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부르는 노래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선 우리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양철북을 마구 흔들어 쳐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주님의 수난곡을 불러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 길의 구경꾼으로 남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십자가, 우리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명음반 명연주, 1958년 리히터


잠시 무거운 주제로 흘러버렸습니다만 리히터의 1958년 음반의 위대함은 시대적인 배경과 ‘오스카들의 양철북소리와도 같은’ 뮌헨 어린이 합창단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1971년 영상보다 1958년 음반을 더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971년 영상에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 되어 들어 있습니다. 무대 구성도 파격적이고 음향과 카메라 워크가 흠 잡을 데 없습니다. 솔리스트들도 당대 최고의 성악가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독일인들은 어느새 전쟁의 참상에서 벗어나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고 있었습니다. 연주자들도 전반적으로 자신감과 화려함에 익숙해 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수난곡에서 그러한 자신감은 상당히 불편하게 들립니다. 죄인으로서, 고통을 당하는 이로서의 깊은 절규가 아니라 음악적 완벽함을 추구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이 우리가 수난곡을 부르고 듣는 근본적인 이유와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작년 성탄절 예배를 시작으로 낮은자리 믿음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비록 의정부 가난한 동네 지하에 있는 예배당에서 열 명도 안 되는 성도들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매주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져 ‘오늘은 울지 말아야지’라고 매주 다짐하며 강단에 서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이렇듯 낮은자리와 고난과 고통 속에서 비로소 빛나는 것인가 봅니다.


1958년 음반이 명반인 또 다른 이유는 에반겔리스트를 맡은 에른스트 헤플리거 때문입니다. 리히터의 1971년 영상과 1979년 음반의 에반겔리스트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독일의 거장 페터 슈라이어입니다. 아마 대중에게 알려진 정도로만 생각하면 페터 슈라이어의 에반겔리스트가 더 매력적일 것 같지만 헤플리거의 노래에는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깊은 영성과 감동이 담겨 있습니다. 헤플리거는 조만간 깊이 만나게 되실 것입니다.


이렇듯 1958년 음반이 불멸의 명반이 된 이유는 시대적 참상과 연관이 깊습니다. 또한 함께 부르는 회개와 구원의 절규의 노래를 잿더미 위에서 꽃피워 낸 음악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적인 역사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을 소망하는 마음을 섞어 말하자면, 리히터의 1958년 마태 수난곡에 필적하는 연주는 인류 역사상 결코 다시 없을 것입니다.


수난곡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


이 글을 쓰기 위해 몇 주간 계속 마태 수난곡을 듣었고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어느 날 강원도 우리 집으로 소포가 왔습니다. 어머니의 고향 섬에서 온 마늘 몇 첩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마늘을 까는 동안 마늘이 참 맵다고 굳이 얘기하시면서 연신 눈물을 닦아내셨습니다. 그 마늘은 어머니의 바로 윗 언니, 저의 이모의 사망소식과 함께 전해져 온 것이었습니다. 강원도 화천 산골에서 전라남도 신안의 섬까지 가실 수 없었던 어머니는 그렇게 마늘 핑계를 대면서 아들 몰래 울고 계셨던 것입니다.


마태 수난곡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사실 지금 이 나라의 현실과 아직도 그 한을 풀지 못한 채 세월호에 갇혀 있는 아이들 생각이 자주 났습니다. 때로는 뜬금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 절규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격 없는 저는 구레네 시몬 마냥 얼떨결에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곧 사순절이 다가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사순절은 우리 모두가 바흐의 마태 수난곡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으면 좋겠습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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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톺아보기(29)


슬픈 몸, 고마운 몸


● 몸의 말을 들으라


“오랜만이야. 얼굴 잊어버리겠네 이 사람아.”


“죄송해요. 잠 못 이루는 토요일 밤 때문에….”


“뭐야? 그러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토요일을 잘 보내야 한다니까.”


“건강은 좀 어떠세요? 얼굴빛은 좋아지신 것 같은 데요.”


“그래? 좋아져야지. 안 그래도 여러 사람한테 미안한데.”


“일 좀 줄이세요. 그 동안 몸을 너무 학대하셨어요.”


“그랬나? 어쩌면 성실함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나는 일을 적당히, 얼렁뚱땅 하는 걸 싫어하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만든 내 이미지에 자승자박 당한 꼴이었던 것 같아. 성실한 건 좋은데 그게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바뀐 게 문제지. 나는 스스로 그런 문제를 잘 풀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


“전에 마음 따라 살지 말고, 몸 따라 살라고 하신 적이 있지요? 자칫 오해하기 쉬운 말이긴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럴 듯한 말이에요.”


“요즘은 몸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사는 게 타락한 실존이라는 생각이 들어.”


“몸의 말을 듣는다는 게 어떤 거죠?”


“글쎄,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몸은 항상 소리 없이 말한대. 웬만하면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데, 우리 삶이 균형을 잃을 때면 몸이 우리에게 기별을 해주는 거지. 몸이 편치 않고, 피로하고,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라는 몸의 경고라는 거야.”


“하지만 그런 경고를 경고로 알아듣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몸의 투정을 다 들어주다가는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무시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가 병을 키우는 거고.”


“그렇죠. 병은 처음부터 드러나는 게 아니라면서요. 병의 씨앗을 뿌리는 단계, 그 씨앗에 물을 주는 단계, 그러다가 그것이 고착되는 단계, 그것이 병적인 징후로 나타나는 단계, 그 다음에 나타나는 열매가 병이래요.”


“와, 굉장히 유식하네.”


“그게 아니고요, 허준의 동의보감에 나오는 말이래요. 모든 병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병이 마음이나 생활의 문제에서부터 비롯된다지요? 문제는 '이렇게 살면 안 되는 데' 하면서도 실제로 병의 징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별 일 없을 거야'라는 자기 암시에 매달린다는 거지요.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요.”


“베드로가 들은 닭울음소리 비슷한 거겠지. 그래, 분명히 앎과 깨달음에는 차이가 있어. 앎이 곧 행동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니까. 깨달음이 필요하지. ‘깨닫다’는 말은 ‘깨다’와 ‘닫다’로 이루어진 거래. 믿거나 말거나. 바깥을 향하던 지각의 창을 닫고, 잘못된 자아가 어떤 형태로든 깨뜨려질 때야말로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거야. 깨달은 사람은 이전처럼 살 수 없겠지?”


“그렇게 잘 아시면서 몸을 왜 그렇게 방치하셨어요.”


“깨닫지 못해서지 뭐. 어느 의사 선생님이 나보고 이제부터는 ‘나는 바보다’ 하고 살래. 마음을 좀 푼푼하게 쓰며 살라는 말이겠지. 한동안 그분 말씀이 내 귓가를 떠나지 않더라. 그동안 내가 살아온 모습에 대한 중간 심판처럼 들려서 말이야.”


                    일러스트/고은비


● 몸, 의미 전달의 매개체


“성경에도 몸에 대한 가르침이 있나요?”


“물론 있지. 사람들은 기독교가 영혼에 집중하느라 몸을 소홀히 여기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히브리인들의 삶은 금욕적이라기보다는 매우 역동적이지. 구약성서를 읽다보면 경전에 담기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이는 용어들이나 구절들이 많아.”


“적절치 않다는 것은 전문용어(?)인데요.”


“그렇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을 가리켜 ‘간음’이라고 표현하지.”


“그 만큼 신앙적 순결을 강조한 건가요?”


“그럴 거야. 아직 나라가 꼴을 갖추기 전이었으니, 신앙의 문제는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와 곧장 연결되었을 테니까.”


“그렇군요.”


“또 구약의 언어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아. 우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삶의 언어가 고스란히 담겨있지. 때로는 이건 좀 너무 외설적이다 싶은 대목도 많아. 어느 교수님 말씀이 <아가서>를 히브리어 표현대로 번역해 놓으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거래.”


“그러시니까, 궁금해지네요.”


“사람하곤. 그렇게 궁금하거든 아쉬운 대로 에스겔서 16장이나 23장을 봐. 히브리인 예언자들은 파리한 얼굴을 한 지식인들이 아니야. 붉은 피가 펄펄 끓는 야인들이지. 그들은 과도한 욕망에 대해서는 준엄하게 꾸짖었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은 부정하지 않았어.”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그래서 신약보다는 구약에 더 끌린다고 했대요.”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했잖아요.”


“물론이지. 종교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니까. 경건 생활을 위한 금욕 혹은 절제는 꼭 필요한 거 아닐까?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도 자신은 금욕을 위한 금욕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잔치를 더욱 즐기시지 않았어?”


“저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는 예수님의 별명이 참 마음에 들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는 어떻고?”


“좋긴 좋은 데, 제가 그 자리까지 가려면 아직도 내공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건 자신 있고?”


“그럼요.”


“그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고, 사람들 사이에 화해가 일어나고, 낙심했던 이들이 살맛을 회복한다면 그것도 좋겠지.”


“……”


“예수님은 참 다정다감하신 분 같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기도만 하지지 않으시거든.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접촉을 시도하시지. 열병 걸린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든지,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댄다든지, 앞 못 보는 이의 눈에 손을 대고, 말이 어눌한 사람의 혀에 손을 댄다든지….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 나도 가끔 병원에서 경험하는 바이지만 어떤 때는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께름칙할 때도 있어. 그러니까 환자들을 어루만지는 예수님의 손길이야말로 말없는 기도라 할 수 있을 거야.”


“우리 배를 쓸어 내리시며 '엄마 손은 약손' 하시던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거겠지요.”


“맞아. 만짐 혹은 접촉이야말로 친밀함의 모태가 아닌가 싶어. 접촉은 ‘손으로 빚어내는 개념’(manual concept)이래. 손으로 상징되는 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의미 전달의 매개체인 거지.”


“말보다는 몸짓이 더 큰 의미를 전달할 때도 많은 것 같아요.”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 알지? 하나님의 손끝이 아담의 손끝에 닿을락말락하잖아? 사람들은 그 미세한 지향 혹은 접촉에서 창조행위를 보아내지. 손가락 하나를 통해 천지창조의 그 오묘한 순간을 남김없이 담아내는 화가의 솜씨가 정말 일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 마음이란 몸속에 깃든 마음이니까.”


● 타자화된 몸


“성경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요?”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에 나오는 구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공감은 가지만 좀 부담스럽네요.”


“그래도 나는 이 구절을 우리가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물론 이 구절은 음행을 삼가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 몸이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곳으로 의식하고 산다면, 아무 음식이나 함부로 먹어도 안 되고, 과식을 해도 안 되겠지.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하는 삶의 방식, 즉 과로나 과욕도 피해야 할 거고.”


“뭐든 과한 것이 문제군요.”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고, 족한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참 어렵지.”


“일전에 삶의 중심이 하나이면 ‘忠’의 삶을 살게 되지만, 중심이 여러 개이면 ‘患’이 된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어쩌면 우리가 건강하게 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러다 보니까 마음은 조화와 균형을 잃고, 몸도 덩달아 균형을 잃고요.”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의학자인 알크마이온은 인간의 몸이 단순한 물리학적 개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여러 요소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 건강한 것이고, 그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가 다른 요소를 침범하여 균형이 깨지면 병이 된다고 설명했어. 알크마이온은 병을 ‘모나르키아’라고 했는데, 그건 ‘파탄’ 혹은 ‘한쪽의 지배’라는 뜻이래.”


“세상의 모든 일을 음양과 오행의 원리로 설명하는 동양 철학의 원리와도 비슷하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져야 한다는 점인데,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몸적 사고에 지나칠 정도로 길들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요즘 유행하고 있는 웰빙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포장만 바꾼 소비주의가 아닌가?”


“명상이나 영성에 대한 관심은 어떤가요?”


“그것조차 자본주의 시장의 유통 경로를 통해 상품화 된 것 같아. 물론 거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그것을 통해 몸과 마음의 관계적 합리성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좋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구조로부터 먼저 해방되어야 할 거야.”


“정말 우리 시대는 몸이 상품이 되어 버린 듯한 감이 들어요. 우리 나라에 불고 있는 성형과 다이어트 열풍은 정말 병적이에요. 물론 이런 열풍의 배후에는 서구인들의 체형과 외모를 따라가도록 부추기는 매스컴이 있지요. 하지만 이건 프란츠 파농이 말한 것처럼 검은 피부에 하얀 가면을 쓰려는 것이 아닐까요? 아름다운 몸을 갖고 싶은 욕망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 욕망이 자기 생의 다른 가능성들을 억압하고 타자화한다면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지요. 언제쯤이나 우리는 타자에 대한 열등감 없이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을까요?”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요즘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 느낌이야. 언젠가 여성민우회에서 ‘세계 다이어트 반대의 날’ 행사를 하면서 ‘내 몸의 주인은 나―노 다이어트, 노 성형’ 캠페인을 했다지? 난 이런 소수의 깨어남이 결국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생각해. 한 때 ‘안티 미스 코리아 페스티발’이 열렸잖아. 중요한 것은 ‘선발대회’가 아니라 ‘페스티발’이라는 거야.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거기에 적합한 이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드러내고 또 그것을 함께 긍정해가면서 삶을 축제화 하는 것이지. 간디도 마을 공동체 운동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말했는데, 변혁은 항상 작은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고, 정신이 잠들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지.”


● 당신의 손을 사랑하십시오


“저는 요즘 몸은 정말 슬픈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학대받는 시리아나 이라크 포로들의 벌거벗은 몸을 보면서 저는 몸을 가진 자가 경험할 수도 있는 어둠의 깊이를 본 것 같아요. 일제시대에 우리 민중들이 겪은 아픔과 독재정권 시절에 민주화를 위해 싸우던 이들이 겪었다는 고통, 그리고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에서 나치에 의해 학대받고 죽어간 유대인과 집시들의 고통도 가슴이 아프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분히 추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피라미드처럼 겹겹이 쌓인 그 벌거숭이 몸이 남이 아닌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벌거벗기운 채 인간적 모멸감과 공포의 극한에 몰리면서도 어떠한 저항할 수 없다는 것, 스스로를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긍정할 수 없다는 것, 그보다 잔인한 일은 없을 거예요. 게다가 그런 그들 곁에서 웃고 있는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 이 부조화와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칼을 손에 쥔 사람은 허공이라도 베어보고 싶어하잖아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무저갱이 열리면서 사탄이 옥에서 놓여나는 장면이 있는데, 내 마음에는 자꾸만 그런 광경이 떠올라. 사탄은 우리의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도 몰라.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 속에는 이미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다고 하잖아. 어느 쪽 열쇠를 쥐고 사느냐가 중요한데, 전쟁이라는 상황은 아무래도 악마를 풀어놓을 가능성이 많다고 봐야 할 거야. 토니 모리슨의 소설 <<연인>>에 나오는 한 대목이 기억나는군.


‘오! 나의 사람들이여 그들은 당신들의 손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묶고, 구속하고, 자를 때만 손을 사용할 뿐이어서 빈손으로 끝납니다. 당신의 손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세요. 두 손을 높이 들고 두 손에 키스하세요. 그 손으로 다른 사람을 만지시고, 양손으로 서로 두드리고, 얼굴을 쓰다듬으세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일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쓰다듬고 어루만지라고 주신 손으로 묶고 구속하고 자르고 학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타락한 실존의 흉한 모습이 아닐까?”


● 몸의 윤리


“몸에 가해지는 억압과 통제를 통해 어떤 대상들을 일시적으로 굴복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분노를 영속화시키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렇겠지. 나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몸의 윤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어. 그 윤리는 ‘어루만짐’과 ‘보살핌’이야. 우리의 손이 어떤 대상을 어루만지고 보살필 때, 우리 마음도 제 자리를 찾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슬픈 몸’이 ‘고마운 몸’이 되겠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나는 살덩이와 뼈와 피와 땀, 그리고 눈물과 욕망과 꿈으로 가득 찬 자루’라고 말했지만, 그 자루를 잘 간수하지 못할 때 그 모든 것들이 땅에 쏟아질 수밖에 없지. 몸은 소중한 거야.”


“육체에 탐닉할 것도 없지만, 받은 몸을 건강하게 돌보고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잘 지키는 길이기도 하겠네요.”


“물론이지. 몸을 사용하여 마음을 이끈다지 않던가. '그늘진 얼굴, 긴장된 근육, 구부정한 자세 속에 불행과 부정적인 것들이 보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더군. 그러니까 늘 얼굴에 미소를 띠고, 몸의 긴장을 풀고, 자세를 바로 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맑아지겠지? 틱낫한 스님의 미소 명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런 원리에 따른 걸 거야.”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몸에서 힘 빼는 거 같아요.”


“워낙 긴장을 내면화하고 살아왔으니까. 자기 몸과 남의 몸을 공경하고 보살피려고 애쓰다보면 언젠가는 저절로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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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22)


의로운 매춘부 라합


‘여호와의 종’ 모세의 지도력을 계승한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이 시작되었다(주전 15세기). 여리고성을 시작으로 아이성, 기브온, 하솔 등 여러 도시와 전쟁을 치러야한다(여호수아 1-12장).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광야에서 레바논까지, 큰 강 유프라테스에서 헷족속 온 땅과 서쪽 지중해까지다(1:4). 이미 아브라함에게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신(창세기 15:18) 것처럼, 약속의 성취 시점이 임박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 본격적인 정복전쟁이 시작되기 전, 가나안 땅 여리고성에 거주하는 매춘부 라합의 드라마가 자리 잡고 있다(2:1-24).


전쟁의 거친 함성소리가 들려오기 전이다.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정탐꾼 두 명을 여리고로 보내 은밀하게 요단강 서쪽의 상황을 엿보게 했다. 이때 정탐꾼들이 유숙하게 된 집이 “라합”이라는 “매춘부의 집”이었다(2:1). 현대사회도 그렇겠지만, 고대 사회에서 매춘부는 극심한 가난과 빚에 내몰려 선택하게 되는 생존을 위한 최후 수단이었다. 그런데 하필 정탐꾼들이 유숙하려고 찾아간 집이 매춘부의 집이라는 것이 불편했는지, 주석가들 중에는 히브리말 매춘부에 상응하는 “조나”를 “여관 안주인”(hostess) 또는 “여인숙 주인”(innkeeper)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매춘부라고 번역하더라도 각주에 여인숙 주인으로 명시하곤 한다. 마태복음 1장 5절의 예수님 족보에 라합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보아스의 어머니요, 다윗의 조상이니(룻기 4:21) “매춘부”라는 것을 제거하고 싶을 만큼 불편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춘부 라합은 후대 신앙의 세대에 의해 칭송받는 믿음과 행함의 영웅이었다(히브리서 11:31; 야고보서 2:25).



정탐꾼들이 비밀리에 창녀의 집에 들어왔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파이로 잠입해 들어온 사실을 여리고 왕이 듣게 되었다(2절). 어떻게 이 사실이 알려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된 채로 여리고 왕의 부하들이 라합의 집에 들이닥쳐 스파이들을 끌어내라고 명령할 때는 이미 늦었다. 라합이 두 사람을 숨긴 뒤였다. 그리고 라합은 정탐꾼의 행방을 묻는 자들에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거니와 이미 떠났고, 성문 닫을 때쯤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라합은 그쯤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에게 서둘러 뒤따라가라며 따돌리기까지 한다(3-5절). 그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탐꾼 뒤를 추적하며 요단강 나루까지 갔고, 성문은 닫혔다(7절).


스파이를 쫒는 여리고 왕의 사람들은 성문 밖으로 나간 상황, 쫒기는 자들은 성문 안쪽 라합의 집 지붕에 숨었다(6절). 왕의 사람들을 따돌린 라합이 지붕으로 올라왔다(8절). 가나안 지역 대부분의 집들은 지붕이 평평하여 곡식을 말리거나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하니 몸을 숨길만한 곡식 자루들이 있을 법하다. 이때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고백한다.


“나는 주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이 땅의 주민들은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습니다.”(2:9, 새번역)


그녀의 말은 두 명의 정탐꾼도 놀랄 일이었지만, 독자도 놀랄만한 일이다. 이 말은 홍해를 건넌 후 하나님을 찬양한 모세의 노래에 담긴 내용 일부처럼 들리니 말이다(출애굽기 15:15-16). 그녀의 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홍해를 가르고 아모리 사람의 왕 시혼과 옥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듣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고 말하지 않는가(10절). 라합의 말의 강조점은 가나안 주민이 이스라엘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녀의 결정적인 고백은 남달랐다. 이스라엘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믿음의 고백이며 증언이었다.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위에서, 과연 주 당신들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2:11)


그런데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서 재빨리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람처럼 정탐꾼들에게 확답과 맹세를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내가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제 당신들도 내 아버지의 집안에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주님 앞에서 맹세를 하시고, 그것을 지키겠다는 확실한 징표를 나에게 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식구들을 살려주시고, 죽지 않도록 우리를 구하여 주십시오.”(2:12-13)


라합의 요구는 구체적이고 강력했다. 그녀의 말에서 그동안의 삶의 고단함과 절실함이 묻어난다. “나의 아버지의 집”과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식구들”로 표현된 가족의 범위는 친척들까지 포함한 구원요청이었다. 라합 집안의 운명이 집안을 대표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오로지 그녀에게 달렸다. 그녀의 요청이 수락된다면, 불가피하게 원하지 않은 딸의 매춘으로 비참한 삶의 결핍을 보충했을 가족은 미천한 딸에 의해 다시 생명 보존의 기회를 얻게 된다. 적어도 그녀의 말에서 가부장적인 집안의 위계질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타파되고 있는 셈이다.


라합은 이집트 제국의 억압아래 노예의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후손도 아니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었다. 오직 귀로 들은 하나님의 구원 사실만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라합은 혈통적인 정체성과 지리적 경계를 뛰어넘는 이방인의 믿음을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강도 높은 라합의 요구만큼이나 라합에 의해 위기를 모면한 정탐꾼들 역시 목숨을 내놓고라도 약속을 지키겠다는 강력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들은 여호와가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친절과 성실”(새번역; 히브리말, “헤쎄드”와 “에메트”)을 다해 대우할 것을 약속한다(14절). “친절”에 상응하는 “헤쎄드”는 언약적인 충성을 뜻한다. 라합과 정탐꾼들 사이에 신실하게 수행해야 할 계약관계가 수립된 것이다. 무엇보다 “헤쎄드”와 “에메트”는 구약에서 짝꿍 단어로 자주 사용되는데, 하나님의 견고한 사랑과 신실함 곧 지속적인 돌봄을 표현한 개념이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자비로운 행위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이렇게 라합은 자기 가족과 친척들의 안전과 보호를 보장받고 성벽에 붙은 창밖으로 정탐꾼들을 탈출시킨다(15절). 그녀의 집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성벽 사이에 거주한다는 것만으로도 변방의 소외된 신분이라는 상징성이 농후하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내려 보내면서 3일 동안 산에 숨었다가 추적자들을 따돌린 후에 돌아갈 것을 당부한다(16절). 라합의 도움으로 탈출하게 된 정탐꾼들 역시 그녀에게 마지막 당부를 한다. 그들은 라합에게 홍색 줄을 건네고 이스라엘 백성이 진군해 오는 날 창문에 매달아 두면, 이 홍색 줄은 라합과 그녀의 가족, 그리고 모든 친척들에게 희망이 될 것을 약속한다. 단, 누구도 라합의 집밖으로 나가면 안 되고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18-20절). 라합은 정탐꾼들의 말대로 “홍색의 희망”을 묶었다(21절).


그리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던 날, 라합이 요구한대로 그녀의 아버지 집안과 그녀에게 속한 모든 가족들은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이스라엘에 거주하게 되었다(6:25)라는 라합의 “홍색의 희망”과 구원 드라마는 ‘지금여기’ 우리에게 왜 전해져야 했을까?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 편입되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태생적 근거는 라합에게 유효하지 않았다. 매춘부라는 직업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었지만 라합의 드라마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히브리서 기자의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을 영접하여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히브리서 11:31)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전리품을 챙긴 불순종 때문에 ‘진멸’당한 아간과 그의 자녀들 이야기를(여호수아 7장) 대비시킨다. 이뿐 아니라 야고보 사도는 “행함으로” 라합이 의롭다함을 받았다(야고보서2:25)라고 칭송했다. 신약의 두 본문이 믿음과 행함의 강조점의 차이로 보이지만, 믿음과 행위 중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서로를 보충한 것이다.


그리고 라합의 드라마는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최고 민족으로 부추겨 자칫 승리주의적인 역사관에 매몰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구원 목적과 범위를 깨닫게 한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남성의 성적 욕구해소의 도구였기에 가나안 사회에서도 소외되고 유린당했을 라합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닿았다. 이후 먼 훗날 라합은 온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은총을 입는다. 그렇게 라합은 낮고 비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역사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작은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지금여기’ 기록된 말씀을 듣는 믿음과 행함의 치우침 없는 실행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생산되어 확장되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약자가 교회공동체 안에서 환대받고 있는가. 중산층의 교회를 열망하는 아니 이미 중산층의 교회가 된 한국 교회는 낮은 곳을 향한 연민을 잊은 듯하다. 이 땅의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지만 전리품에 눈멀어 불순종했던 아간의 진멸과 같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김순영/구약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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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3)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3 네 명의 화자(話者)와 음반소개


내러티브

지난 시간에는 대본작가 피칸더와 더불어 마태 수난곡의 네 명의 화자(話者)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았습니다. ‘내러티브, 대사, 코멘트, 기도’라는 화자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조금 더 깊은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내러티브’와 ‘대사’는 마태복음의 본문 그대로의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내러티브는 마태복음 26장 1절의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와 같은 부분으로서 에반겔리스트(복음사가)가 담당합니다. 바흐의 수난곡에서 에반겔리스트는 테너가 담당하고 있는데 선율적인 노래를 담당하지는 않지만 음악의 전체 분위기와 곡의 시종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서 자체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판소리에서의 아니리나 무성영화에서의 변사(辯士)를 떠올리시면 그 중요함을 쉽게 공감하실 것입니다.


대사

대사는 복음서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직접화법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대사는 26장 2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는 주님의 대사이며 베이스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중요한 역할이 아닐 수 없겠지요. 그래서 제가 마태 수난곡 연주를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지휘자-에반겔리스트-예수를 누가 맡고 있느냐입니다. 그 밖에 성서의 등장인물인 베드로, 유다, 가야바, 빌라도 등의 대사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남성 저음 파트인데 자주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합창 단원이나 솔로 한 사람이 모든 배역을 소화하기도합니다. 여성의 대사로는 아시다시피 베드로를 알아 본 두 여종과 빌라도의 아내가 있습니다.


대사중에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여러 사람들이 함께하는 부분들입니다. 예를 들면 26장 5절에서 가야바의 관정에 모인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분개하고 있는 제자들의 대사인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등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대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합창으로 표현되는데 여러 성부로 구성된 합창의 장점을 살려 현장의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음악적으로 매우 다채롭게 표현됩니다. 그들은 주로 한 목소리로 대변되기도 하지만 때로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자기 목소리를 내기도하는데 바흐는 이런 상황들을 다 구분하여 합창으로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마태 수난곡 음반을 처음 들으시면 어떤 음반의 경우 소년합창단의 소리가 들려 놀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인 합창단과 달리 안정적인 연주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지만 이는 바흐시대의 전통을 고려한 소위 ‘원전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HIP)’를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이유 때문에 소년합창단의 연주를 좋아하는데 그들의 노래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영적인 메시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어린 소년들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도 예외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코멘트와 기도

‘코멘트와 기도’는 성서 밖에서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인데 주로 바흐 당시의 회중 복음성가라고 할 수 있는 코랄합창이 이 역할을 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말 그대로 코멘트의 반응을 응축시켜 외적 고백과 결단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주로 솔로 아리아로 표현되며 마태수난곡에서는 알토 아리아 ‘내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 mein Gott’가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기도’의 노래입니다. 이 곡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후에 나오는 노래이지요.


제가 만든 아래의 표를 통해 마태 수난곡의 시작인 합창곡 ‘오라 너희 딸들아(Kommt, ihr Töchter)’ 부터 6번곡인 알토 아리아 ‘회개와 뉘우침에(Buß und Reu)’에서 마태 수난곡의 네 명의 화자가 어떻게 역할을 나누고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틀을 가지고 마태 수난곡을 감상하시면 아마 3시간에 육박하는 이 대작을 보다 쉽게 소화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 속으로

이제 마태 수난곡을 직접 들어보시면 어떨까요? 첫 번째 감상은 위의 표에 있는 네 명의 화자의 역할에 주의를 기울이시면서 가볍게 들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번에 마태 수난곡 전곡을 다 들으시려는 것은 새해 벽두에 창세기부터 성경 통독을 다짐하는 것과 같고 작심삼일로 끝날 확률이 높습니다. 마태복음 26장을 펴 놓으시고 우연히 들른 장터에서 모여 앉아 판소리를 듣는 것처럼 편안하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섬세한 내용들은 성서일과를 따르듯이 제가 소개하는 부분들만 들어 나가셔도 충분하실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음반을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넷 온라인으로 쉽게 들을 수 있지만 마태 수난곡 음반 하나 정도는 소장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음반 케이스 속에 첨부된 해설과 대본(리브렛토)은 그저 덤이라고 생각하기에 매우 유용한 아이템이 되어줄 것입니다.


굳이 음반 구입을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이나 비교대상으로 듣고 싶으신 분들은 유튜브에 ‘Matthew Passion'을 입력하시면 수많은 명반들과 영상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다른 음악과는 달리 유튜브에 소개 된 대부분의 마태 수난곡 음반들이 저마다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음반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태 수난곡은 헨델의 메시아처럼 대중적인 인기가 많은 곡도 아니며 연주 기법으로도 훨씬 난해한데다가 전 곡의 연주시간만 3시간에 육박하여 어지간한 지휘자나 연주자들은 연주할 수 없고, 그러기에 마태 수난곡을 녹음으로 남길 정도면 지휘자는 그 자체로 진지하고 음악적 역량이 검증된 음악가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독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여 부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나 엄청난 음악적 스케일은 음악가적 역량과 성품이 부족하고 음악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이용하려드는 대다수의 음악가들을 차단시키는 훌륭한 장벽이 되어 줍니다. 듣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영화나 소설에서는 한니발 렉터와 같은 천재적 싸이코패스들을 바흐 음악과 연결시키곤 하는데 실제로 제가 만난 마태 수난곡이나 바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깊이 있고 지성적이며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음반을 고르셔도 좋겠지만 감상하실 때 지휘자와 녹음 연도, 에반겔리스트를 노래한 테너와 예수 역할을 맡은 베이스가 누구인지는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추천하는 음반은 칼 리히터(Karl Richer)가 1958년 녹음한 음반입니다. 같은 지휘자가 71년에 녹음한 영상판이나 79년의 음반과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리히터의 58년 녹음은 뮌헨 바흐합창단과 뮌헨 어린이합창단이 합창과 코랄을 노래했고 에반겔리스트는 에른스트 헤플리거(Ernst Haefliger)입니다. 헤플리거는 신앙적 표현과 성악적 역량 면에서 단연코 최고의 에반겔리스트입니다. 모노녹음의 실황연주가 아닌 음반 발매를 위해 스테레오로 녹음된 첫 번째 마태 수난곡 연주지만 50년 전의 작업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음반은 마태 수난곡의 고전적인 연주이면서도 여전히 파격성과 탁월함을 느끼게 하는, 클래식 레코딩 역사의 가장 위대한 음반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녹음입니다. 아마 이번 여정 내내 저는 이 음반에 관한 언급을 할 것입니다.



  


(유투브링크         https://youtu.be/3icLbxogeV4)



음반소개

그 밖에 추천할 음반은 다음과 같습니다. 레온하르트의 음반은 매우 지성적이면서도 혹자의 말로는 ‘없던 신앙심마저 생기게 해 주는’ 영성 깊은 연주입니다. 프레가르디엔이 노래하는 에반겔리스트는 이야기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물 흐르듯 깨끗하게 진행됩니다. 그는 가장 군더더기 없는 에반겔리스트입니다. 또한 이 음반에서 예수 역할을 맡은 막스 반 에그몬트는 바흐음악에 가장 잘 어울리는 베이스로서 다른 음반에서 예수의 음성이 너무 무겁고 지나치게 힘이 넘치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과 달리 선하고 부드럽고 때로 흔들리는 청년 예수의 음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헤레베헤의 1984년 음반을 추천한 이유는 소프라노 바바라 슐릭 때문입니다. 그녀의 중성적인 느낌의 노래는 바흐 음악에 매우 잘 어울립니다. 특히 마태 수난곡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로서 그녀가 노래하는 ‘Aus Liebe will mein Heiland sterben/사랑 때문에 나의 주님은 죽으려하신다’ 한 곡 때문에라도 이 음반은 충분한 소장 가치가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Agnus Dei, c. 1635–1640 


  아르농쿠르의 음반은 그의 다른 곡 녹음에 비해서는 다소 아쉬움이 있지만 언제나 그의 연주는 바흐 음악에 있어서 원전연주의 표본이 되어줍니다. 특히 대학시절 그 음반이 나왔을 때 CD 자켓의 그림이 매우 충격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왔었는데 작년에 방문한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그림의 원본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습니다.


그 밖에 헬무트 릴링의 1994음반(Non HIP)이나 칼 리히터의 1971년 영상(Non HIP)도 꼭 들어야 할 연주입니다. 다만 카랴얀, 번스타인 등 잘 알려진 지휘자들의 음반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바흐의 음악은 기교가 넘치고 세상적으로 성공했다고 아무나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흐와 같은 음악가들, 장인정신과 신앙심과 음악의 종으로서의 자세가 삶에 배어 있는 사람들이 바흐를 제대로 연주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마태 수난곡의 첫 번째 곡인 코랄 판타지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첫 곡도 들어가지 못했군요. 서둘러야겠습니다.



Gustav Leonhardt(좌) - 듣기

Philippe Herreweghe(중) - 듣기

Nikolaus Harnoncourt(우) - 듣기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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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5)


무엇을 걱정하는가


걱정으로 일생을 살아오신 분을 알고 있다. 늘 각종 생각으로 마음을 불태우며 살아오신, 말 그대로 노심초사(勞心焦思)로 사신 분이다. 상당 부분의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드려도 자신이 세상의 걱정하지 않으면 사건의 의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강박관념에 잡혀있는 그런 분이었다.


여러 해 그분을 대하다가 드디어 걱정의 절정을 포착하게 되었다. 그분의 최고 걱정은 ‘걱정 없음의 걱정’이었다. 몹시 한가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분의 불안한 태도는 곁에 있는 이들에게 걱정을 끼쳤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지금처럼 아무 걱정이 없는 순간이 가장 힘겹다. 이렇게 걱정 없는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지 정말 걱정된다.’고 슬픈 표정으로 답했다.


《중국인성론사(中國人性論史)》를 쓴 대만학자 서복관(徐復觀)은 유가 특징을 우환의식(憂患意識)으로 정의했다. 여기서 말하는 우환의식은 일상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또는 종교적인 원죄의식이나 자기존재에 대한 부정과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자기성찰을 통해 온전한 자아의 완성으로 이끄는 의식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걱정이 부지런히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목표 없이 되는대로 멋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한 자극제로 작용한다면, 진리추구라는 좁고도 먼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귀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걱정의 중요한 핵심은 과연 무엇을 걱정하며 어떻게 걱정하는가 하는 것이다. 막연히 세상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부류의 걱정은 의미 없기 때문이다.


“군자는 진리를 도모하지 먹을 것을 모색하지 않는다. 농사에는 굶주림이 들어있다. 공부에는 복록이 들어있다. 군자는 진리를 걱정하지 가난을 근심하지 않는다(君子謀道不謀食. 耕也 餒在其中矣, 學也 祿在其中矣. 君子憂道不憂貧).” - 《논어》, 〈위령공〉 31장


위의 본문은 오해가 많은 문장이다. 본문의 방점이 진리추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는 것을 추구하지 않음에 초점을 두어, 공부 좀 하겠다는 이들은 생계를 무시해도 된다는 논거로 이용되었다. 본문을 공부에 녹봉이 있고 농사에는 배고픔만 있다고 해석했기 때문에 농사 집어치우고 모두가 과거급제하려 달려들게 만들었던 근거가 되기도 했다.


무엇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현재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뿐 아니라, 무엇을 향해 매진하고 있는가를 판단케 하는 척도가 된다. 공자께서는 올곧음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군자는 모름지기 진리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농사에는 늘 허기짐이 있기 마련이다. 먹고 마시는 것에 두는 관심은 늘 부족함을 동반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공부에는 복됨이 있다. 본문의 녹(祿)이란 구체적으로 복록(福祿)을 의미한다. 하늘께 제사 드리는 고기와 음료를 복(福)이라 하고, 제사 후에 관료들에게 나누어주는 고기와 음료를 녹(祿)이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하늘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한다. 군자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근심할 것이 아니라, 진리추구에 집중해야 한다.


하늘 아래 서있는 자신이 바르게 살고 있는지, 제대로 바른 것을 추구하고 있는 지를 걱정해야지, 삶이 곤궁할 것이냐 풍성할 것이냐를 근심해서는 안 된다고 공자께서 힘주어 말한다. 삶의 곤궁함을 피하기 위해 아등바등 거려봐야 만족함은 없을 것이라면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향해 자신의 전부를 던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고 있다.


                                     경전의 자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한 하늘의 뜻을 펼치기 전,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을 했다. 음식으로부터 거리두기를 실시한 것이다. 온통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이면 하늘의 뜻과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예수의 속내를 간파한 시험하는 자는 그의 거리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일깨워주려 했다. 현실의 냉엄함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 《마태복음》 4장 3-4절


예수의 시선은 돌덩이에 있지 않았다. 광야의 40일 내내 떡을 향해 관심두지 않고 있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의 입을 통해 표출되는 진리의 말씀에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떡에 관심이 있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걱정하며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조차 한동안 먹을 것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어느 날 예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시고 제자들과 호수를 건넜다. 제자들은 떡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떡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서로 의논하자, 예수께서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상기시키면서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16:11)고 하셨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하실 때, 제자들은 여전히 떡이 없다는 것을 가지고 의논하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떡에 집중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관심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다. 제자들은 먹는 것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에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걱정, 염려를 뜻하는 헬라어는 ‘메림나(merimna)’이다. ‘나누이다’, ‘분열하다’는 의미의 헬라어 ‘메리조(merizo)’의 파생어이다. 다시 말하면, 걱정이나 염려는 분열이나 나누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뜻한다. 집중하지 못하여 생각이 흩어지거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산만하게 진행하는 것이 걱정 또는 염려의 근거라는 것이다.


시험하는 자가 40일 동안 꾸준히 진행된 예수의 집중력을 흩으려했다. 예수의 관심을 먹는 것으로 돌리려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시험에도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관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시켰다. 산만하게 흩어진 관심을 궁극적인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어떻게 집중시켜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세상에 대한 걱정은 우리의 마음을 분열시킨다. 분열된 마음은 또 다른 걱정거리를 물고 나타난다. 공자께서 농사를 짓는 것에 늘 굶주림이 있다고 말한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추구함에는 하늘의 은총인 복록이 있기 마련이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분열되지 않은 마음으로 궁극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하인리히 오토’가 종교경험의 본질을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이라는 역설적인 용어로 말했다.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진리를 향한 ‘거룩한 걱정’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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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톺아보기(28)


우정을 이용하지 말라


인맥 만들기 문화


“직장이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면서?”


“예, 차 타고 한 30분쯤 가야 하지만 오히려 좋아요. 차를 타고 다니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있고, 주변에 맛있는 음식 먹을 곳도 있고, 직장 옥상에 소박하지만 정원도 있고 해서, 짬짬이 쉴 수도 있고요.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져요.”


“생명이 갖는 친화력 때문일 거야. 목적 지향적인 일직선의 시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일수록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할거야.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시간은 사실은 순환하는 시간이거든.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셨어. 사람은 이 순환 속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하지.”


“그 순환하는 시간의 리듬을 타고 사는 사람이 ‘철든 사람’이라면서요?”


“그런데 나는 오염된 ‘철든 사람’이 된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 사무실에 하루만 앉아 있으면 알 수 있어. 옆에 있는 공장에서 들려오는 소음,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냄새,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철가루…. 그런 게 호흡을 통해 내 몸 속에 축적된다고 생각하면 영 기분이 찜찜해.”


“그러니까 중금속에 오염된, 그리고 쇠가루가 몸에 쌓인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정말 우울하네요. 해결 방법이 없나요? 주택가에 그런 공장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벌써 공장이 세워진지 여러 해가 되어서 나가라고 하기도 어렵고. 좀 고약한 이웃을 만난 셈이지.”


“그래도 공해배출 업소인데….”


“구청 환경과에서 나와서 시정 명령을 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때 뿐이야.”


“불편함을 참는 것만이 덕스러운 행동은 아니잖아요? 서운할 땐 서운하더라도 행정적인 조치를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게 궁극적으로는 상생의 길일 텐데요.”


“어떤 때는 힘있는 사람이 ‘전화 한 통’을 넣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금방 그런 유혹을 떨쳐버리지. 더디더라도 공적인 시스템과 절차를 통해서 변화를 이루어야지, 바쁘다고 해서 미시적 동원 맥락(micro-mobilization context)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손쉽게 손에 넣다보면 그게 습관이 되어서 헤어 나오기 어렵게 될 거야. 열심히 노력하기보다는 인맥 만들기에 시간과 정신을 쏟다보면 출세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정신은 황폐해지는 것 아닐까?”


“살다보면 그런 유혹을 떨쳐버리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교수 임용 청탁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도 똑같은 맥락이잖아요. 사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사의 관행이 아닌가 싶어요. 학교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실력을 갖춘 사람보다는 윗사람들과의 교제가 좋은 사람들이 공부도 빨리 마치고, 일자리를 빨리 찾게 되는 게 현실이잖아요. 그 때문에 공정한 경쟁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마음에는 원망과 의심이 자라게 되고, 냉소와 환멸에 사로잡히게 되는 거죠. 또 그 폐해는 고스란히 아랫사람들에게 전가되고요. 실력 없는 교수들에게 배우는 학생들, 무능력한 상사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다 피해자들이에요.”


“참 씁쓸한 현실이야. 물론 인간관계가 중요한 요소라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야. 공동생활에 있어서는 다른 이들과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필요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필요조건이 아니라 필요충분조건으로 작용한다면 그건 곤란하지. 실력보다는 고분고분한 사람을 찾는 조직이라고 한다면, 그 조직은 사람들의 창의성이나 개성을 죽이는 닫힌 조직이라고 보아야 할거야. 우리 사회에서는 누가 좀 튄다 싶으면 그는 가혹한 눈길을 받거나 제재를 받게 되잖아. 그런 일이 반복되면 그의 개성은 귀퉁이가 다 닳아빠진 상처럼 남루해져서 파릇파릇한 본래의 매력은 간데 없고, 조직에 순응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만 남는 거지.”


“조금 튀는 사람에게는 조직의 쓴맛을 보여주는 거지요.”




무지개빛 까마귀


“그런 셈이지. 나는 신앙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상급자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몇 번 있는데, 얼마나 시달렸는지 몰라. 마치 '무지개빛 까마귀'가 된 느낌이었다니까.”


“그게 뭐지요?”


“아, 저지 코진스키의 소설 제목인데, 숲에 사는 한 남자가 심심했던지 까마귀 한 마리를 잡아서 알록달록한 색을 칠하지. 그리고는 새의 날갯죽지를 비틀어. 새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면 동료 새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날아오는 거야. 그때 사내는 무지개빛 까마귀를 공중으로 날려보내지. 억센 손아귀에서 풀려난 새는 죽어라 하고 동료들을 향해 날아오르는데, 까마귀들은 그 낯선 빛깔의 새를 용납할 수 없는 거야. 그래서 쪼아대지. 이것은 그 소설에 나오는 일화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는 그 까마귀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이 다르고 모습이 다른 이에게 가하는 동료 인간들의 불합리한 폭력과 모욕을 드러내고 싶었던 걸 거야.”


“합리(合理)가 아니라 정리(情理)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합리를 말하고, 연줄이 작동하는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 그 기제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다 ‘무지개빛 까마귀’ 신세인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몇 번 쪼여본 적이 있어서 그 아픔을 조금은 알아요.”


“시인 김승희의 <제도>라는 시 들어본 적 있지?”


“글쎄요, 어떤 시지요?”


“‘아이는 하루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칠이 나갈까 봐 두려워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시인데, 시의 화자인 엄마는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금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자문해보면서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울적해지지. 아이는 연신 엄마에게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되지?’ 묻고. 그런데 이 시의 묘미는 이 대목에 있어.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 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꽃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엄마는 어쩌면 이미 한계에 갇힌 제도인지도 몰라. ‘엄마만 아니라면/나, 이렇게, 말해 버리겠어’라는 건,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거든.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아이를 어떤 틀 속에 가두는 ‘제도’라고 ‘총독부’라고 자탄하지. 그리고 이어지는 말 한마디는 비명이나 마찬가지야. ‘엄마를 죽여라! 랄라.’”


“가슴이 찡해 오네요. 사실 저도 세상에 잘 순응하지 못하는 ‘삐딱이’여서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사는 게 쉽지는 않거든요.”


“그럴 거야. 조직생활을 하기에는 다소 감성적이고, 우리 시대의 속도를 따라 살기에는 생각이 많고. 인맥을 형성하는 것은 체질적으로 맞질 않고.”


“그렇다고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도 나름대로 잘 적응해가며 살고 있어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안 됐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한때 ‘끈끈한 정’이라는 말이 유행했잖아. 좋은 말 같지만 좀 문제가 있는 말이야. 합리에 바탕을 둔 끈끈한 정이라면 좋겠지 하지만 그게 합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작동될 때가 많다는 게 문제지.”


“함석헌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네요. ‘피는 물보다 걸다지만 건[濃] 것이 좋은 것 아닙니다. 맑아야지. 제발 핏줄 소리 하지 마셔요.’ 촌철살인이라고 하나요? 이 말씀은 짧지만 정말 정곡을 찌르는 말씀 같아요.”


“정말 그러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연줄에 집착하는 걸까요?”


“글쎄, 나라가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니까 자기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한 결과가 아닐까?. 그러니까 혈연·지연·학연 등을 통해 유사-가족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고 그 속에 머물 때라야 비로소 안심하는 거지.”


“그렇다면 인맥 만들기의 뿌리는 공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한 불신이라고 보아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그 말을 뒤집으면 국가가 공적인 기능을 올바로 수행한다면 사적 관계에 바탕을 둔 정리의 문화는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다는 말이 되나?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국가 인권 위원회의 활동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 그 동안 피해자들의 가슴에 깊이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한 맺힌 이야기들이 역사의 조명을 받으면서 실체가 밝혀지고 있으니 말이야."


특권을 내려 놓으라


“한 사회를 제도적으로 개혁해나가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언제나 문제든 인간 문제로 귀결되는 거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게 문제지. 이런 문제를 다루는 어떤 토론회를 보아도 열띤 토론 끝에 내놓는 전문가들의 결론이라는 게 기껏해야 ‘의식개혁’을 해야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뿐이잖아.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으면 답답한 거야. 어느 사회학자는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요소로 정부와 기업과 NGO를 들더군. 한 문화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종교 혹은 교회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 유감이기는 하지만 그게 현실이니까…….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힘은 결국 종교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말씀도 원론적으론 맞지요. 하지만 어떻게요? 지금의 교회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온통 정신이 교세 확장에 맞춰져 있는 지금의 교회는 의식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아닐까요?”


“참 뼈아픈 이야기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닐 거야.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제일 먼저 요구한 게 뭐였어? ‘자기 부정’이잖아. 먼저 깨어난 사람이 자기가 누리던 특권을 내려놓는 일부터 시작해야겠지.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도 나도 목사로서 누리고 있는 특권이 꽤 많을 거야. 지금부터라도 그것을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연습을 시작해야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교인들의 신세를 지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해. 그 말씀을 볼 때마다 나도 손 노동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특권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고난 당하는 특권’ 말이에요.”


“그렇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해야 우리 삶이 맑아질 거야.”


“조금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요.”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이 있나?”


"그렇지요? 고난 당하는 특권을 포기하는 것은 일도 아닌데,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잘만 하는데, 달콤한 특권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내공이 좀 쌓여야 가능할 것 같아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한다면서요?”


“맞아. 그러니까 특권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결의이지. 입원실이 없다고 하여 누군가 힘있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고, 자기 신분이나 잘 아는 이와의 우정을 이용해 어떤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싶은 욕구와도 싸워야 해.”


“뙤약볕 아래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제치고 옆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뻔뻔함도 버려야지요.”


“그렇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 전화 한 통 넣어줄 가까운 사람 하나 없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우리 행동을 돌아보아야 할 거야. ‘가난한 자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는 말이 있는데, 세상을 실체 그대로 볼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가난한 이들의 현실이라는 것이지. 미국의 눈이 아니라 지금 전쟁의 공포 속에 살고 있는 시리아, 이라크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겠어?”


“각자 자기들이 선 자리에서만 현실을 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군요.”


섬김이라는 묘약


“문제는 자기가 누리는 것이 특권이라는 생각을 아예 못할 수도 있다는 거야. 경북대학교 법학과의 김두식 교수가 쓴 『헌법의 풍경』이라는 책에 보면,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법조계에 나온 사람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살겠다던 애초의 꿈을 그렇게도 쉽게 포기하는 까닭을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아주 공감이 가더라구. <그들이 사법시험이라는 장벽을 넘어 들어간 곳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운 세계는 결코 그들에게 특권을 향유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특권과 특권의식은 가랑비처럼 소리 없이 그들의 삶 속에 젖어들었습니다.> 이게 무서운 거지. 가랑비처럼 젖어드는 거 말이야.”


“어쩌면 마하트마 간디가 아무리 일정이 바쁘더라도 경전을 읽고, 기도를 드리고, 물레 잣는 일을 쉬지 않았던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한 순간도 잊지 않기 위해서였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장 분주한 시간에도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예수님의 경우와 같은 거겠지요?”


“그렇지. 결국 구도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 나는 특권의식에 길들여진 사고를 치유하기 위한 묘약은 어쩌면 ‘섬김’이 아닐까 싶어. 예수님이 좌우명이 섬김이었잖아.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겸손해지려면 많은 모욕을 받아야 한다는 데,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소라도 특권을 내려놓은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몸으로 섬기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사실 몸이 앞서지 않으면 마음의 변화는 어렵지요. 그런데 저는 스스로를 치열하게 돌아보고 자기를 닦아나가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의 관행화 된 특권에 대해서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일도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것은 귀찮은 일이고, 때로는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지만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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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71)


하나님의 사람 가슴에는 주판이 없다


너는 이 책(冊) 읽기를 다한 후(後)에 책(冊)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河水)속에 던지며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災殃) 내림을 인(因)하여 이같이 침륜(枕淪)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衰敗)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마치니라 (예레미야 51:63-64).


오래 전에 <마지막 교실>이라는 제목의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문을 닫게 된 수몰지역의 한 초등학교 이야기다. 문을 닫기 전 마지막 날 학교 운동장, 연단에 선 교장 선생님도, 아이들 앞장에 선 세 명의 선생님도, 쪼르르 줄을 맞춰 선 스무 여명의 학생들도, 마지막으로 교가를 부르다 참았던 울음이 터져 교가를 끝까지 부를 수가 없었다.


아직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5-6학년 교실은 평소와 다르게 조용하기만 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체육시간 운동장 같았을 교실이 머리카락 한 올이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다. 아이들은 모두 제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동네를 지켜온 학교가 문을 닫게 되다니, 아이들로서도 기가 막혔던 것이다.


그 때였다. 개구쟁이 대석이가 교실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앞문을 열고 나타난 것도 대석이였다. 장난을 치려나보다 생각 했지만 대석이의 표정은 진지했고, 대석이 손에는 깨끗하게 빨아온 걸레가 들려 있었다.


대석이는 천천히 교탁을 닦기 시작했다. 교탁을 다 닦은 대석이가 미리 전학을 가 비어 있는 미경이의 책상을 닦기 시작했을 때, 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비와 걸레를 찾아 교실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건성으로 청소를 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리창이 그렇게 깨끗한 적은 이제껏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교실로 들어서려던 선생님의 걸음이 그만 교실 문 앞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을 통해 청소를 하고 있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교실 문을 한동안 열려지질 않았다. 교실 문을 사이에 두고 두 눈이 모두 젖은 아이들과 선생님이 서로를 마주 본 채, 다음 일을 아예 잊고 있었다.



마세야의 손자요 네리야의 아들인 스라야가 시드기야 왕을 모시고 바벨론을 찾을 때의 일이다. 어쩌면 유다가 여전히 바벨론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정치적인 행차였는지도 모른다.


예레미야는 스라야 편에 책 한 권을 보낸다. 스라야는 예레미야 곁에서 일을 도왔던 바룩과 형제지간이다. 바룩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름(32:12)이 스라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름과 같다.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준 책에는 바벨론에 임할 재앙의 말씀들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예레미야50:1-51:58에 기록된 내용이 책에 적혀 있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바벨론에 도착을 하면 책에 기록된 내용을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읽으라고 명한다. 바벨론에 도착하면 바벨론에 임할 재앙의 내용이 담긴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예레미야는 책을 모두 읽은 뒤에 할 말까지 일러준다.


“주님께서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나 거하지 못하게 하며 영영히 황폐케 하리라 하셨다.”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명한 것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책 읽기를 다 한 후에 또 할 일이 있었다. 책을 돌에 매어 유브라데 강에 던지라는 것이다. 위험한 내용이 담긴 책을 읽었으니, 읽고 난 뒤에 그 증거를 없애라는 뜻이었을까? 그런 게 아니었다. 책을 돌에 매어 강에 던지면서 할 말을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이렇게 일러주었다.


“바벨론이 나의 재앙(災殃) 내림을 인(因)하여 이같이 침륜(枕淪)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衰敗)하리라”


‘침륜’(沈淪)이라는 말은 ‘가라앉는다’는 뜻으로 ‘재산이나 권세 따위가 없어지고 보잘 것 없이 됨’을 나타낸다. ‘쇠패’(衰敗)는 ‘쇠할 쇠’에 ‘깨뜨릴 패’로, ‘쇠하여 패망함’을 뜻한다.


“주님께서 이 곳에 내리는 재앙 때문에 바빌로니아도 이렇게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고 쇠퇴할 것이다” <새번역>

“이처럼 바빌론은 물에 가라앉으리라. 내가 내리는 재앙을 당한 후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공동번역>

“바빌론도 내가 그에게 내릴 재앙 탓에, 이처럼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지쳐 버릴 것이다.” <성경>

“내가 내린 재앙을 당한 뒤에, 바벨론이 저렇게 바닥으로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 <메시지>


돌을 매단 책이 다시는 물 위로 떠오르지 못하는 것처럼, 바벨론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을 일러주라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전하라 하시는지 충분히 알겠다. 책에 적힌 내용도 그렇고, 책을 읽은 뒤에 하라는 말도 그렇고, 그런 뒤에 책을 돌에 묶어 강에 던지라는 것도 그렇고, 책을 던진 후에 하라는 말을 보면 그 뜻 하나하나가 명확하여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따로 없다.


한 가지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 결국 책은 물에 빠지고 만다. 그것도 돌에 매달아 빠지게 됨으로 그야말로 수장이 되고 만다. 나중에 누가 그 책을 꺼내 읽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 책을 썼다. 물에 던져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말 책, 아무도 귀 기울여 듣는 이 없을 내용, 듣는다 해도 어디 그런 일이 일어나겠냐며 웃고 말 내용, 그런데도 바벨론을 향한 주님의 뜻이 담긴 내용을 예레미야는 책에 기록했다.


어쩌면 하나님의 사람이란 내가 하는 일의 영향력을 셈하지 않는 사람일지 모른다. 오히려 내가 계산하는 영향력에 내가 묶이거나 갇히게 될까 조심하며 나 자신을 경계하며 묵묵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가슴에는 그 어떤 주판도 없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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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2)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2 피칸더 그리고 네 명의 화자(話者)


지난 주 나름 큰 포부를 가지고 여정을 시작했습니다만 한 주가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판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음악 편력이 꽤 있는 사람이지만 저의 지난 한 주간 음악적 삶을 말씀드리자면 간단합니다. 지난 화요일 선배 목사님의 차안에서 신촌블루스의 노래 몇 곡을 청해 들은 것 외에는 지금까지 칼 리히터가 58년에 녹음한 마태 수난곡만을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https://youtu.be/3icLbxogeV4)글을 쓰기 전에 음반을 한 번 더 들어 보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이렇게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마태수난곡을 깊이 만나게 되면 일 년에 두 세 번씩 이런 일이 일어나곤 하지요.


마태 수난곡은 들으면 들을수록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어느 순간부턴가는 헤어 나올 노력마저 포기한 채, 온 존재를 그 품에 맡겨 버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바다의 심연과 그 풍경에 압도되어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이제는 내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 나를 오선지에 걸쳐 놓고 읽어 내듯 마태 수난곡 앞에 내가 완전히 분해되어 버리고 그 장면을 어디서 왔는지 모를 또 다른 내가 바라보는 야릇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베토벤이 바흐를 일컬어 “Nicht Bach, Meer sollte er heissen(그는 시냇물이 아니라 바다라고 불리어져야 마땅하다)”라고 말한 것이 단순한 독일어 말장난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강원도 산골 소년이었던 저는 바다를 좋아했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늘 바다를 그리워합니다. 수영은 못하지만 여름에 바다에 가면 바다 위에 가만히 그리고 하염없이 몸을 맡기고 떠 있기를 좋아합니다. 바다의 이름은 저마다 다르고 어떤 사람들은 그 이름 때문에 싸우기도 하지만 사실 온 세상의 바닷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한 바닷물이지요. 저는 이 온 세상의 한 바닷물 전체가 자신의 온 몸을 빈틈없이 꼬옥 껴안아 주는 것을 느끼면서 마치 엄마 뱃속인 양 바다 속에 가만히 떠 있습니다. 모든 껍데기를 벗고 무궁무진한 바다 속에서 자신이 분해되고 녹아버려 그저 한 작은 생명이 되어 버린 그 본향의 편안함을 좋아합니다.


바흐라는 또 다른 바다 속에 갇혀 버린 저는 그렇게 조금 더 그 안에 머물러 있고 싶지만 이제는 바다의 품 밖으로 나와서 그 이야기를 여러분께 풀어 놓아야 합니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태 수난곡에 대한 사전적 정보나 잊혀 졌다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흔한 에피소드 등도 생략하겠습니다. 굳이 제가 아니어도 조금만 관심을 두면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은 최소화 하고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다만, 저는 목회자와 연주자의 입장에서 텍스트와 연주를 중심으로 제가 느끼는 바흐를 여러분께 소개하려 합니다.


다소 유치한 서론이 쓸데없이 길어졌지만 여러분들께선 이해해 주셔야만 합니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 앞에서는 모든 표현이 유치할 수밖에 없고 모든 찬사가 짧기만 할 것임을 여러분들도 곧 알게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칸더와 네 명의 화자

바흐는 네 개에서 다섯 개의 수난곡을 썼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마태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 두 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마태 수난곡의 초연은 1727년 성 금요일(Good Friday)에 토마스 교회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날은 4월 11일이었습니다. 마태 수난곡은 이름 그대로 마태복음에 기록된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의 수난 부분에 해당하는 모든 말씀 구절이 전 곡에 그대로 다 담겨있을 정도로 성경 본문에 충실한 대본을 기초로 작곡 되었습니다.


대본은 피칸더(Picander)라는 필명을 쓰는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헨리치(Christian Friedlich Henrici)의 것으로 성경은 루터판 독일어 성경을 사용하였습니다. 성경 본문을 그렇게 충실하게 따랐다면 대본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대본 작가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피칸더는 마태 수난곡의 숨겨진 주역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흐름 중간 중간에 추가되어 나오는 첨가된 가사에 있습니다.


그 첨가된 가사는 크게 두 가지의 내용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Comment’이고 다른 하나는 ‘Prayer’입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말 그대로 그 반응을 응축시켜 외적 고백과 결단으로 승화시킨 것이지요. 복음서 본문이 내러티브와 대사로 이루어졌으므로 정리하자면, 마태 수난곡은 내러티브, 대사, 코멘트, 기도라는 네 명의 화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코멘트와 기도가 자칫 엄숙하고 딱딱할 수밖에 없는 이 수난의 성경 본문에 ‘은혜로움’을 불어 넣어 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 네 명의 화자만 잘 구분해도 마태 수난곡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피칸더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지만 바흐는 그에게 크게 감사했던 것 같습니다. 마태 수난곡 바흐 자필악보의 표지에는 피칸더의 이름이 바흐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바흐 자필악보 표지

‘마태복음에 따른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아래에는 ‘주님을 위한 시 헨리치 피칸더, J.S. Bach의 음악 제 1부‘ 라고 쓰여 있다.


판소리와 수난곡

얼마 전 양재훈 교수의 책 ‘판소리의 신학적 풍경’을 통해 박동진 명창의 창작 성서판소리 ‘예수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마태 수난곡은 우리의 판소리와 아주 닮아 있습니다. 판소리의 구성요소는 소리(창), 아니리(사설, 말), 발림(혹은 너름새, 몸짓) 그리고 추임새인데 이런 구성요소가 수난곡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아니리는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와도 같습니다. 발림은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몸짓에서 나타나고 판소리의 추임새는 ‘코멘트’부분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 드렸듯이 ‘코멘트’란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기에 ‘얼씨구’, ‘좋다’, ‘그렇지’등으로 대표 되는 ‘추임새’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판소리에서의 ‘소리(창)’는 ‘기도’에 해당하는 합창과 중창, 솔로 아리아에서 그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태 수난곡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위대한 고전음악을 듣는 마음이 아니라 둘러 앉아 판소리를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추임새를 넣는 마음으로, 혹은 예배를 드리며 나지막이 ‘아멘’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사의 이해가 필수적이겠지요. 제가 이 여정 가운데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아마 이 부분이 될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판소리와 창작 성서판소리가 얼마나 귀한 우리의 예술적, 기독교적 유산인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서양 음악사의 가장 위대한 음악인 마태 수난곡과 같은 형식을 민중예술로서, 그것도 1인극으로서 품었기에 판소리라는 우리 음악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박동진 명창의 판소리 ‘예수전’이 음악적 토착화의 가능성을 열어 준 우리의 바흐와 같은 역할을 해 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창작 성서판소리 ‘예수전’에 한 가지 아쉬움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피칸더의 부재(不在)’입니다. 우리는 흔히 음악을 작곡가 혼자 만든다고 착각하곤 합니다만, 쉬카네더 없이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없었을 것이고 하이네의 시들이 없었더라면 슈만의 아름다운 가곡들도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면 대본 작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https://youtu.be/EZLjf_m6j0A ).


피칸더는 탁월한 시인이요 대본 작가이기 전에 성서와 신학에 깊이가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마태 수난곡을 깊이 만나가시다보면 곳곳에서 그의 놀라운 가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 수난곡의 가사는 종교 개혁의 정신이 한창 무르익었던 당시 사람들의 성서적, 신학적, 신앙적 깊이가 얼마나 깊었는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반면 창작 성서판소리 ‘예수전’은 곳곳에서 대본의 미흡함이 드러나고 너무 서둘러 완성시켰다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제 그 명맥마저 흐려진 상태라고 하니 그 슬픔이 너무나 큽니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한 여러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한국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성서와 신학과 신앙적인 기본기를 더욱 탄탄하게 쌓고 다져야 하는 것임을 단호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열매인 바흐와 피칸더의 마태 수난곡이 지금도 살아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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