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9)


길을 잘 일러주는 사람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명파초등학교 운동장에 서서 잠깐 기도를 드렸다. 지금은 남한의 가장 북쪽에 있는 초등학교, 하지만 어서 통일이 되어 우리나라 중심에 있는 학교가 되기를, 금강산 가는 길목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는 학교가 되기를, 남과 북의 어린이들이 내가 서 있는 이 운동장에서 맘껏 어울려 뛰어놀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잠깐의 기도에도 간절함이 담겼다.


기도 끝에 짧게 보고를 드리고는 첫 걸음을 옮긴다.

‘저 이제 떠나요!’


대지를 적시는 비가 먼 길 나서는 걸음을 기억하고 격려하는 하늘의 손길처럼 여겨졌다. 첫날 일정은 거진항까지다. 로드맵에 적힌 거리는 15.5km, 앞으로 걸을 길이 만만치 않으니 첫날은 가볍게 몸을 풀라는 배려 같았다.


걷는 길에는 대부분 아무도 없었다. 한적한 곳이라 그랬을 것이다, 사람도 표지판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열하루 길을 걸으며 나처럼 길을 걷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를 못했다. 앞에도 사람이 없었고, 뒤에도 사람이 없었다.


길을 걷다 만난 장승. 사람이 보이지 않는 길, 사람처럼 반가웠다.


혼자 걷는 것이 너무 외로워서 뒤로 돌아 자기 발자국을 보며 거꾸로 걸었다는, 문득 사막을 걷던 사람 이야기가 생각이 나 몇 번은 몸을 돌려 거꾸로 걸어보기도 했다.


“반갑소이다!”


사람 대신 인사를 건네는 것 같은, 길가 장승의 웃음이 반가웠다.


따로 지도 없이 로드맵만 가지고 걷는 길, 대신 자주 길을 물어야 했다. 중요한 길일수록 거듭 묻고는 했는데, 그러면서 성경의 의미 하나를 공감했다.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같을 때에만 그 증언이 인정 되었다. 중요한 갈림길에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서로의 대답이 같을 때 그 길을 택했다. 설명이 불분명하거나 서로의 이야기가 다를 때면 최종 결정을 보류해야 했다.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일 것이다. 한 과학자가 한 그 말을 나는 설교와 연관시켜 기억을 한다. 진리는 난해함보다는 평범함에,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에 가까울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니 길을 쉽고 분명하게 설명하는 이가 있고, 어렵고 복잡하게 설명하는 이가 있었다. 길을 쉽게 설명한다는 것, 인생에 있어서나 믿음에 있어서나 중요한 일이구나 싶다.


누구의 손길이었을까, 외진 곳에서 생각지 못한 인사를 받는다.


버스를 타고 명파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 안에서 할머니 한 분이 대진보건소를 간다시며 내리는 곳이 어딘지를 내게 물었다. 처음 오는 곳이라 나도 모르겠다고 하자 잠시 곤란해 하시던 할머니는 이번에는 두어 자리 앞자리에 앉은 다른 승객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초로의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다.


“저만 따라오세요. 저도 지금 그 보건소에 가는 길이거든요.”


나도 그리로 가니 나만 따라오라니, 그보다 고맙고 확실한 설명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바른 표지판을 만날 때마다 반가움과 고마움이 컸다. 길 경계에서는 더욱.


거진항을 떠나 대대리를 향할 때였다. 길은 여러 갈래로 나눠지는데 사람이 보이질 않아 난감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인지 길을 물을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가다보면 문을 연 식당을 만나겠지 하며 나선 길이었는데, 아무리 가도 식당은 보이질 않았고 식당이 나올만한 풍경도 아니었다. 바다 옆에 있는 솔밭으로 들어가 배낭 안에 있는 비상용 간식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있는데, 저만치 일을 하러 나온 사람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가 길을 물었다. 길을 정해야 하는 내 절실함에 비해 농부의 대답은 너무 단순했고 짧았다. 바로 앞 수초가 자라고 있는 작은 개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개울만 쭉 따라가면 되요.”


설명은 더없이 간단했지만 걸어보니 정말로 개울은 대대리를 향해 흐르고 있었고, 몇 번의 갈림길을 만났을 때에도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둘째날 아침, 거진항을 떠날 때 막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거진항에 거반 다 왔다 싶을 때였다. 아직 오후 해가 제법 남아 있어 여유가 있었는데, 때마침 길가에 깨끗한 찻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찻집 이름도 ‘다온’, 정겨웠다.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찻집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니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커피라떼를 주문했는데 생각지 않은 곳에서 마시는 커피였기 때문일까, 커피가 참 맛있고 그 시간과 주변 풍경과 잘 어울린다 싶었다.


걸어오며 있었던 일들, 들었던 생각들, 커피를 마시면서 배낭에 있던 노트를 꺼내 몇 가지 메모를 했다. 먼저 와 있던 단체 손님들이 빠져나가 가게 안에 다른 손님은 나 혼자뿐이었다. 어디를 가는 길이냐고 묻는 주인에게 거진항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물었더니 거의 다 왔다며 30분 정도만 가면 될 것이라 했다. 나는 조금 더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그런 망외의 느긋함도 여행의 큰 즐거움 아니겠는가.


호사를 누린 뒤 다시 길을 나섰는데 이게 웬일, 거진항은 가도 가도 나오지를 않았다. 30분이면 간다는 거진항이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분명 거진 다 왔다고 했는데… 그래서 거진항인 거야?’ 속으로 툴툴거리다가 혼자 웃었다.


괜한 여유를 부리다가 결국은 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거진항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로드맵을 전해준 장로님이 첫날 일정을 걱정하실 것 같아 잘 도착을 했다고, 그런데 거진항에 거진 다 왔다고 해서 느긋해하다가 뒤늦게 먼 길을 걸었다고, 아마도 커피집 아주머니는 내가 축지법이라도 쓰는 줄 알았던 모양이라고 장로님께 문자를 보냈더니 장로님이 답장을 보내왔다.


“영동사람들 거리감 과장은 유명합니다. ‘요기’가 엄청 먼 거립니다.” 


길을 잘 일러주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쉽고 단순하지만 명확하게 길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길을 걷고 돌아와 마음에 담아두는 것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 다짐도 있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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