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이야기 4


어쩌다 두 용사가 쓰러졌는가!

사무엘하 1:17-27


사울은 실패한 삶을 살았을까?

지난 번 글에서 다윗이 등장한 후 사울의 생을 개략적으로나 살펴봤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고 대신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을 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후로 하느님이 보낸 악한 영에 시달려 강박증 비슷한 증세를 보였습니다. 이에 신하들은 수금을 잘 타는 다윗을 소개해서 다윗은 사울의 신하가 됐는데 바로 이 다윗이 사울 대신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였습니다. 사울을 괴롭힌 강박증의 원인이 다윗이었는데 수금을 연주해서 그를 강박증에서 치료해준 사람도 다윗이었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입니까.


그 이후 얘기는 지난 글에서 얘기했으니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누가 누구를 쫓는지 헛갈릴 정도로 서로 쫓고 쫓기는 삶을 살다가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다가 자기 아들들이 죽고 자신도 부상당하자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무엘하 1장 19-27절은 사울과 요나단이 전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지어 부른 조가(弔歌)입니다.


이스라엘아, 우리의 지도자들이 산 위에서 죽었다.

가장 용감한 우리의 군인들이 언덕에서 쓰러졌다.

이 소식이 가드에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이 소식이 아스글론의 모든 거리에도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듣고서 기뻐할라.

저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딸들이 환호성을 올릴라.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는 이제부터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고

비도 내리지 아니할 것이다.

밭에서는 제물에 쓸 곡식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길보아의 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치욕을 당하였고

사울의 방패가 녹슨 채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원수들을 치고 적들을 무찌를 때에 요나단의 활이 빗나간 일이 없고

사울의 칼이 허공을 친 적이 없다.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더 재빠르고 사자보다도 더 힘이 세더니!

이스라엘의 딸들아, 너희에게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혀 주고

너희의 옷에 금장식을 달아 주던 사울을 애도하며 울어라!

아, 용사들이 전쟁에서 쓰러져 죽었구나!

요나단, 어쩌다가 산 위에서 죽어 있는가?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 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진한 것이었소.

어쩌다가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무기들이 버려져서 쓸모없이 되었는가?


이번에는 사울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얘기하고 다음번에는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여기서 하느님을 얘기할 때 그 하느님은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character)로서의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교리에서 말하는 하느님, 예컨대 전지전능하고(omnipotent) 무소부재한(omnipresent) 하느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연극에 비유하면 하느님은 사울 이야기를 그리는 연극의 등장인물 중 하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느님이란 등장인물은 실제로 무대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목소리로만 등장하지요. 하지만 연극 등장인물과 관객 모두는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하느님이 등장인물 중 하나이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란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리를 통해서 아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연극을 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하느님은 사울을 선택한 걸 후회하는 분입니다.


사울의 삶은 실패한 삶일까요? 질문이 단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사울은 실패한 사람입니까? 그의 삶을 성공한 삶으로 볼 수는 없겠습니다. 한 개인의 삶을 이분법적으로 성공과 실패로 나눌 수는 없겠습니다. 또 성공한 삶은 무엇이고 실패한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서가 그와 대립했던 다윗에 지나치게 우호적으로 서술되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사울의 삶을 성공적이고 본받을만한 삶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분명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는 왜 실패했을까요? 그는 한 개인으로 하느님에게 부여받은 왕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었기에 실패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가 처한 환경이나 외부에서 가해진 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패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스로의 결함 때문입니까, 아니면 외적 요인 때문입니까? 둘 다 틀렸다는 양비론이나 둘 다 옳다는 양시론 모두 비겁하긴 하지만 사울의 경우에는 두 가지 요인이 모두 작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어떤 학자는 “사무엘서를 읽어보면 다윗에게는 ‘섭리’(providence)였던 야훼가 사울에게는 운명(fate)이었다.”라고 말했는데 이 짧은 문장은 얽히고설킨 두 사람의 생을 잘 요약했다고 보입니다.



그게 모두 사울 탓일까?

사람은 누구나 객관적이기 어렵습니다. ‘나’라는 이성을 가진 주체가 사고하고 평가하고 행동하는데 어떻게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객관적’이라는 말이 당사자 아닌 관찰자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평가한다는 뜻이라면 의미가 있을 겁니다. 저는 사울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읽을 생각도 의도도 없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사울 편에 서서, 곧 가급적이면 사울에게 우호적인 입장에서 읽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힙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오랫동안 사울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되어왔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서는 다윗에게 지나치게 우호적인 관점에서 쓰였습니다. 이 입장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감암하고 사울 이야기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잘못된 일의 책임을 모두 사울에게 전가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을 가급적 공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사울 편을 들려고 애를 써도 이미 사무엘과 다윗 편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는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1등인 다윗만 기억하고 추앙하는 현실에서 1등 아닌 사람도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사울이 하느님에게 드리는 제사에 소홀했던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는 사무엘, 또는 그가 대리한 하느님의 명령을 두 번 어겼는데 둘 다 제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두 경우에 사울만 탓하는 것은 공정치 않아 보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리라고 했는데 정작 그는 이레가 되도록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군인들이 속속 탈영하므로 스스로 제사를 집전했는데 그걸 사울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이렛날에는 왔어야 하지 않았나 말입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물론, 동물까지 몰살하라는 ‘헤렘의 규율’을 어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원해서 그랬다는 사울의 말이 거짓핑계가 아니라면 왕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리품을 챙겨가자는 백성들의 요구를 사울이 무시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백성들이 사무엘이 사울에게 ‘헤렘의 규율’을 지키라고 명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 모든 일이 사울의 잘못이고 책임이라고 해도 그가 저지른 잘못과 그에게 부과된 처벌에 균형이 맞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하다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해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빵을 제사장도 아니면서, 그것도 부정한 몸으로 먹었습니다. 이 역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행위였지만 그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게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말씀의 예로 이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다윗의 행위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다윗 시대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빵을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먹는 행위는 명백히 계명 위반으로서 무거운 처벌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헤렘의 규율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 규율은 영구히 지켜진 ‘철칙’이 아니었습니다. 다윗도 전리품을 챙겨서 부하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규율이 사울에게만 지나치게 가혹하게 적용됐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제가 사울에게 너무 관대한 걸까요? 다윗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합니까?


사울의 질투와 하느님의 편애

사울의 생을 비극으로 몰아간 결정적인 요인은 다윗에 대한 그의 ‘질투’였습니다. 자기 대신 다윗이 왕으로 선택됐음을 알게 된 후부터 사울은 다윗에 대한 질투심의 포로가 됐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윗은 사울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사울이 보기에도 그랬습니다. 우선 능력은 사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윗이 월등했습니다. 사울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대중적 인기도 다윗에 비하면 사울이 크게 뒤처졌습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였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면서 여인들이 환호했을 때 사울은 질투심에 불타서 다윗을 죽일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사울보다 능력도 뛰어나고 대중적인 인기도 높았던 겁니다. 사울이 질투심을 품지 않기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사실은 하느님이 다윗을 편애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 아닌 하느님이 궁극적인 원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이 다윗을 더 사랑해서 자기를 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사울이 다윗을 질투했던 겁니다. 그러니 그는 다윗과 다투지 말고 다윗을 편애해서 자기를 버린 하느님에게 따졌어야 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레 동안 사무엘을 기다리다가 오지 않으니 스스로 제사를 집전한 후 사울은 사무엘에게 심하게 꾸중 들었습니다. 이때 사울은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다는 얘기를 사무엘에게 듣습니다. 그 말은 들은 사울은 기분이 어땠을까요? 그 말이 이후 그의 생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여러 가능성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선 사울이 사무엘의 말을 믿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을 리 없다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선언을 들은 다음에도 블레셋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했으니 말입니다. 요나단의 기습공격이 효과적이었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블레셋 군대가 자기들끼리 싸우고 죽이고 했는데 하느님이 전투에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일로 이보다 더 확실한 게 있습니까. 그러니 사울은 자기가 버림받았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헤렘의 규율을 어기고도 그는 한 동안 살아있었습니다. 사무엘의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을 정도로 간절했지만 그 후로도 한 동안 그는 왕좌를 지킬 수 있었으니 확신과 의심 사이를 오갔을 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볼 수 없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 선언을 들은 후로 사울은 다윗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를 추격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처음에는 인기 높은 부하에 대한 질투심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이상으로 커졌습니다. 점점 더 집요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대신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가 누군지 모르다가 다윗임을 차차 알게 되면서 그는 어떻게 처신했어야 할까요? “이제는 네가 나대신 왕 노릇해라.”라고 선뜻 왕위를 넘겨줬어야 할까요?


만일 내가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자기가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사울은 다른 종류의 생을 살았을까? 자기가 버림받았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실패자가 됐던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해 각자 나름의 답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게 정답인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에게 버림은 경험이 있습니까? 엉뚱한 질문인가요?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면 왜 하느님을 예배하겠느냐고요? 그럼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각자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써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많습니다. 뭐 큰 것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별 것 아닌 것을 바랬는데, 그걸 들어주신다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것까지도 외면하실 때는 속상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속을 끓이고 실망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깨달았습니다. ‘아하,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거구나.’ 하느님이 내 소원을 다 들어주실 리도 없지만 반대로 내 관심과 기도에 관심도 없는 분도 아니라고 믿게 됐습니다. 다만 인생은 그런 거다, 나는 바라고 기도하지만, 그리고 하느님도 내가 뭘 바라는지 기도를 들어 아시지만 언제나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응답하시지는 않는다, 나는 그 이유를 모르지만, 거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그냥 그런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마음을 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하겠습니다. 사울이 소유한 왕권은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게 아입니다. 그의 의지나 능력과 무관하게 하느님에게서 주어진 것이라는 뜻에서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왕이 되는 걸 원치 않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왕권에 대한 사울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집착이 생겼습니다. 그럴 놓기가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대신 선택된 다윗을 죽이려고 애썼습니다.


사울이 하느님의 버림을 받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에게서 왕권을 빼앗겠다는 뜻이 아니었겠습니까. 왕권은 본래 사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원치도 않았고요. 그럼 그는 왜 본래 자기 것도 아닌 왕권을 그토록 내놓지 않으려 했을까요? 그게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본래 자기 것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울은 본래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붙잡고 있으려다가 강박증에 시달렸습니다. 반면 다윗은 어땠습니까? 그는 사무엘에게서 자기가 사울을 대신해서 왕위에 오르리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가 사무엘의 말을 어느 정도 신뢰했는지는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윗은 자기에게 선물로 주어진 왕위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실현해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다윗의 성품을 별로 좋게 보지 않지만 그와는 별도로 이런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왕권은 사울에게도 다윗에게도 하나의 권리요 축복이자 동시에 의무요 미션이었습니다. 사울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왕의 의무와 미션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물론 그걸 모두 그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울 이야기라는 연극에서 무대 위에 등장하지는 않고 기껏해야 목소리로만 존재하지만 그 어떤 배우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사울의 실패는 이런 하느님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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