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1)


숨겨두고 싶은 길


아직 휴가철이 아니어서 그런지 십이선녀탕 입구는 한산했다. 아예 문을 열지 않은 식당들이 많았는데 다행히 문을 연 식당이 눈에 띄어 들어가니 할머니가 맞아 주셨다.


걷는 시간을 통해 덤처럼 누렸던 즐거움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을 때마다 누렸다. 식당에서 만난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손님이 없어 자연스럽게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자식들 이야기, 농사짓는 이야기…,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은 물론이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이렇게 시골에 살면 외롭지 않으세요?”


할머니에게서 묻어나는 표정을 보면 전혀 외로운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여쭤보았다. 할머니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전혀요. 저는 이곳이 참 좋아요. 실은 친정이 바로 옆 동네예요.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셈인데 여전히 좋아요. 공기 좋지요, 물 맑지요, 마음 편하지요, 사람들 순하지요, 도시에서 복작거리며 사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순간 나는 지복(至福)을, 천복(天福)을 누리며 사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이었다. 자족(自足)하기를 배운 이에게는 그가 서 있는 그 자리가 하늘과 잇닿은 자리이자 은총의 땅, 세상에 부러울 것이 따로 없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숨기고 싶은 길, 알리고 싶지 않은 길이 있었다.


점심식사 후에 걸어야 하는 길을 두고 로드맵에는 ‘반드시 강을 따라가는 옛 국도 고원통로를 찾아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로드맵에 ‘반드시’라는 말이 나오면 긴장을 해야 한다.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대가를 치를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고원통로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을 했지만 그 일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식당 주인 할머니의 친정 동네가 그 쪽이기 때문이었다. 젊어서 원통까지 걸어서 다녀오기도 했다는 할머니는 길을 손금처럼 떠올리며 자세하게 일러주었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고원통로 초입을 찾을 수가 있었다.


고원통로는 열하루 일정 중에서 만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길이었다. 세상에서 서너 걸음 물러난 듯, 사람들의 눈길에서 벗어난 듯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 아래로 맑은 계곡물이 시원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도로와 계곡 사이에는 미끈한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은 마냥 푸른빛이었고, 떠가는 흰 구름은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린 것 같았다. 게다가 도로를 지나는 차들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 맘 놓고 걸어갈 수도 있었다.


너른 바위 위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햇볕과 바람은 마음까지를 말려주었지 싶다.


계곡 옆 소나무 그늘 아래에는 용케 그곳을 알고 있다 싶은 이들이 텐트를 치고서 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두고서 계속 걷기만 하는 것은 고지식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싶었다. 걸음을 멈추고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계곡 아래로 내려가 너른 바위 위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지고 있던 배낭은 물론 스틱, 모자, 신발과 양말까지 벗었다. 목을 두르고 있던 스카프와 손에 끼고 있던 토시도 물에 빨아 바위 위에 펼쳐 놓았다.


물이 흐르는 곳으로 내려가 편한 바위를 찾아 발을 담갔다. 깨끗하고 맑게 흘러가는 물에 발을 담그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깨끗한 물이 지친 발을 씻어주는 것 같았다. 수고했다고, 기특하다고 자꾸만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걷느라 발에 남았던 모든 피곤함이 모두 씻겨 나가는 같았다. 옛 선비들이 즐겼다는 ‘탁족’(濯足)이 이런 즐거움이었구나 싶었다.


둘러보니 산과 물과 바위와 나무와 하늘이 막힘없이 어울린다. 그 무엇 하나 어색한 것이 없다. 숨을 고르게 쉬고 있자니 나 또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맞다, 나도 자연의 일부, 자연의 한 조각일 뿐이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탁족의 즐거움을 맘껏 누렸다.


너른 바위로 돌아와 앉아 발을 치료한다. 물집 잡혔던 곳을 둘렀던 밴드를 모두 떼어내고 햇볕을 쬔다. 새로 생긴 물집의 물기도 빼내고 바람을 쐰다. 다시 길을 떠나기 전에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일 것이지만, 정말로 발을 치료할 것은 약이 아니라 바람과 햇볕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 볕은 따가웠지만 바위 위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본다. 세월도 저리 흘러가는 것이겠다 싶다. 아래로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가면 되는 건데 무엇 그리 순리를 역행하며 살까,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온갖 일들이 문득 어리석고 어색하게 여겨졌다. 불쌍하고 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바위에 앉아있는 시간은 마음까지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느라 날이 저물고 소나무 아래 어디선가 하루를 묵어도 좋겠다 싶지만 아직도 남은 길이 있다. 햇살이 배어 가볍게 느껴지는 배낭을 다시 메고, 햇살이 말린 뽀송뽀송한 양말을 신고, 햇살이 눅눅함을 모두 지워낸 신발을 신고 일어서니 걸음이 새롭다.


이름도 위치도 다 말했으니 이런 어리석음이 어디 있을까만, 그래도 그 길은 끝내 숨겨두고 싶은 길 중의 하나였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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