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8)


인민군 발싸개


돌산령터널 안에서 만나 하루를 꼬박 동행했던 정 장로님 내외분과의 일정은 방산에 도착하면서 마쳤다. 폭염 속 땡볕 아래를 종일 같이 걸었던 시간과 나눴던 이야기들은 두고두고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으리라.


방산에 도착을 했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독일을 처음 찾았을 때였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집회를 마치고 그곳 목사님의 안내로 독일 안에 있는 종교개혁과 관련된 곳을 돌아보던 중 벨기에를 찾았다. 독일 국경에서 가까운 곳에 유명한 성지가 있다고 했다.


독일에서 벨기에로 들어가는 길, 국경을 넘는 일이니 당연히 겹겹의 철조망과 총을 든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방금 국경을 지나왔어요.” 목사님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독일 땅을 달리고 있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국경을 그냥 넘다니! 국경을 이렇게 쉽게(?) 넘어도 되나 싶었다. 마치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접어들 듯 아무 일도 없이 통과를 했으니, 내가 다 걱정이 될 정도였다. 여권 검사도 없었고 총을 든 군인들을 만난 것도 아닌데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들어가다니, 나는 내 앞에서 일어난 일을 보며 뭔가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이게 뭐지, 마음속으로 이어지던 충격과 혼란은 지금도 새롭다.


방산을 찾으며 불쑥 그 때의 경험이 떠올랐던 것은 ‘방산’이라는 지명 때문이었다. 방산이라는 지명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防産’으로 이해를 했었다. 방산이라는 이름의 박물관이 있으니 당연히 온갖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나 보다 했다.


그러고 보면 분단 시대의 산물은 의외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의식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방이 산이어서 얻은 이름일까, 방산(方山)은 도자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 흙이 좋아 예로부터 백자로 유명한 곳이었다. 조선시대 왕실 도자기를 공급하던 경기도 광주 분원에 원료를 공급했던 곳으로, 방산 일대에서는 40기의 옛 가마터가 확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옛 명성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방산자기박물관을 세운 것이었다.


하루의 피곤과 여전한 더위를 달랠 겸 콩국수를 하는 식당을 찾아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뒤엔 정 장로님 내외분과 인사를 나눌 참이었다. 그런데 막 식사를 마칠 때쯤 전화가 왔다. 이 장로님이었다. 방산 가까이 왔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전화였다. 



돌산령터널 안에서 만나 방산자기박물관까지 동행한 정장로님. 장로님은 일정을 모두 마칠 때까지 내 배낭을 내려놓지 않았다.


정 장로님도 그랬고 이 장로님도 그랬다. 시간과 장소 등 만날 곳을 약속한 것도 아니었고, 만날 것을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길을 떠나며 미리 전화를 한 것도 아니었다. 두 분 모두 불쑥 찾아온 걸음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 그래서 그랬을까 반가운 마음과 고마운 마음은 새롭고도 컸다.


떠나려던 걸음을 늦춰 정 장로님 내외분도 이 장로님 일행을 만났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의 만남, 우리는 다 같이 방산자기박물관 뒤편에 있는 평상에 둘러앉았다. 한낮의 무더위와는 달리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함께 웃으며 나누는 이야기가 더욱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이런 시간이 다 허락되는구나,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우리가, 이런 것이 함께 믿음의 길을 걷는 길벗이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자꾸 마음에 새겨지는 시간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웃은 일이 있었다. 걷기에 나선 뒤 몇 몇 교우들의 전화와 문자를 받은 일이 있다. 특히 나이 많으신 권사님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는데 어떻게 뙤약볕 아래 길을 걷느냐며, 전화를 해서 울먹이기도 했다.


교우들에게 걱정을 끼칠까 싶어 길을 떠난 뒤 아무 소식을 전하지 않기로 했던 생각을 바꿔 교회 홈페이지에 짤막한 근황을 올리기로 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걱정을 더는 길이다 싶었다. 글과 함께 몇 장의 사진을 함께 올렸는데, 올린 사진 중의 한 장을 눈여겨 본 이가 있었다.



쓰러지면 안 된다며 오집사님이 놓아준 링거는 몸보다도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발바닥에 생긴 물집을 가라앉히기 위해 두툼한 폼 드레싱 한 장을 발바닥에 깔고 압박붕대로 칭칭 감은 사진을 올린 것이었는데, 그 사진을 보고 폼 드레싱과 압박붕대를 전해준 오 집사님은 왈칵 눈물이 났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났다. 오 집사님은 그런 모습의 사진을 보고는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차를 수소문하여 동행을 한 것이었다.


우리가 함께 웃었던 것은 ‘인민군 발싸개’라는 말 때문이었다. 물집 잡힌 발을 처치한 사진 속 모습은 영락없이 ‘인민군 발싸개’였다는 것이다. ‘인민군 발싸개’라니, 그 말은 너무도 적절했고, 너무도 실감이 났고, 너무도 재미있었다.


오 집사님이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인민군 발싸개. 나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났다.


하긴, 나는 지금까지 폼 드레싱이 있는 줄도 몰랐고, 압박붕대를 써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쓰는 것인지를 배운 적도 없다. 그저 상황에 맞춰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서 처치를 했을 뿐인데, 전문가가 보기엔 아니어도 영 아니었던 것이다.


걱정을 하며 내려온 집사님께 여전히 풀지 않고 있던 인민군 발싸개를 내보이며 그렇게 처치를 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집사님은 참 잘했다며 내가 한 서툰 처치를 인정해 주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넓게 잡혔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그런 것인지, 내 쑥스러움을 덜어주려는 것이었는지 나는 지금도 진실을 모르고 있다.


잠깐 사이 시간은 흘렀고 아쉽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들 돌아갈 길이 멀었다. 돌아서는 길에 집사님과 장로님이 숙소로 찾아왔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오 집사님은 먼 길을 내려오며 그냥 내려오지를 않았다. 몇 가지 약품과 함께 영양제 주사를 챙겨왔다. “걷다가 쓰러지면 안 되잖아요!” 세상에나! 얼마나 걱정이 되었으면 영양제를 다 챙겼을까.


영양제는 몸 속으로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덕분에 링거를 꽂은 채로 방에서 인사를 나눴고, 링거를 꽂은 채로 잠이 들었다가 핸드폰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를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주사기를 빼냈다.


사방이 고요한 깊은 밤, 몸은 젖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잠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많은 생각을 했다.


먼 길을 찾아왔던 분들은 다들 잘 돌아갔을까, 그처럼 좋은 믿음의 벗을 주신 은혜가 참으로 크고 감사했다. ‘어렵게 준비된 잔치가 아름답다’고 했던 생텍쥐페리의 말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을 두고 한 말이었겠다 싶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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