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9)


산양의 웃음


양구를 떠나 화천까지 가는 날이다. 길을 걷기 시작한지 엿새째, 절반쯤을 지나고 있는 셈이었지만 아직은 긴장의 끈을 풀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이른다. 숙소 1층에 있는 식당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는 곧바로 길을 나섰다. 로드맵에 ‘전 여정 중 가장 난코스’라 적혀 있는 날이었다. 38.3km, 걸어야 할 거리 또한 가장 긴 날이었다.


동네 앞을 흐르는 큰 개울을 따라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멋진 수묵화를 누군가가 맘껏 그리고 있었다. 저 한없이 부드럽고 막힘없는 붓질이라니! 문득 단강에서 물안개를 보며 썼던 ‘두 개의 강’이 생각났다. ‘좋은날 풍경’ 박보영 씨가 곡을 붙인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다까지 가는 먼 길

외로울까 봐

흐르는 강물 따라

피어난 물안개

또 하나의 강이 되어

나란히 흐릅니다

나란히 가는 두 개의 강

벌써 바다입니다


전날 밤, 장로님 일행이 다녀간 이야기를 들은 함광복 장로님은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참 하나님은 그렇게 절묘하십니다. 전 내일 해산을 넘으실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해산은 태산이거든요. 이제 육군으로 전역하세요. 성도님들도 그 감동을 나눠 갖게 하셔도 좋을 것 같아서요. 뭘 드시겠냐고 물으시면 닭이나 오리를 선택하세요. 마라토너 딘사모와 세계랭킹 3위권 친구들에게 저녁을 산 일이 있었는데 닭고기를 사달라고 하더라고요. 에너지를 순발력으로 발산하는데 그게 최고라면서요. 아, 장로님들 오늘밤 행복하겠다!! ㅎㅎ”


'하늘 꼬리'라는 뜻을 가진 '천미리'는 그냥 얻은 이름이 아니었다. 첩첩산중 저 아래로 가르마 같은 길이 지나고 있다.


금악리를 떠나 천미리로 가는 길, 이번엔 오천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산이 많은 강원도라 그런지 곳곳에 터널이 많았다. 1,296미터의 오천터널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돌산령터널을 지난 경험 때문일 것이다. 돌산령터널은 2,995미터였다. 하지만 오천터널이 5,000m가 아닌 것은 참 다행이었다.


‘하늘 꼬리’라는 뜻을 가진 ‘천미리’(天尾里)는 그냥 얻은 이름이 아니었다. 오천터널을 빠져나와 고개 위에 서니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집 몇 채는 개미집처럼 작고도 아뜩해 보였다. 눈이 모자랄 만큼 장엄하게 겹겹이 둘러선 산봉우리들, 가히 하늘 꼬리라는 이름을 얻을 만한 지형이었다. 가르마처럼 산과 산 사이를 지나는 도로는 우람한 산맥에서 삐져나온 실뿌리 같았다.


천미리를 향해 내려오면서 보니 도로 옆으로는 낙석을 방지하기 위한 철망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철망에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 지역은 천연기념물 217호로 지정된 산양의 주요 서식지입니다”


바로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듯, 산양 한 마리가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현수막을 보고선 산세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아찔한 높이로 솟은 산과 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너럭바위와 선바위들, 산양이 살기에는 적지겠다 싶었다. 아니, 깎아지를 바위도 무서워하지 않는 산양만이 살 수 있는 곳이겠다 싶었다.


천미리 일대는 산양이 사는 서식지이기도 했다. 지나가는 발걸음도 괜히 조심스러워졌다.


설마 산양이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랄 일은 없겠지만, 현수막을 보고나니 나도 모르게 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나는 산양이 어디 있는지 볼 수 없어도 어디선가 산양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고갯길을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을 때, 튀어나오듯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 있었다.


자동차 행렬이었다. 저 아래 산모퉁이를 돌아서는 자동차 한 대가 보인다 싶었는데, 자동차는 연이어 나타났다. 뱀이 좌우로 몸을 흔들며 앞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자동차들은 꼬리를 물고 달려왔다.


모두가 죽어라고 내달리고 있었다. 방금 들었던 굉음은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에서 나는 소리였다. 바람처럼 내 앞을 스쳐 지나간 자동차 행렬은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을 단번에 치달려 요란한 소리만을 남긴 채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벤츠, BMW, 렉서스, 포르쉐 등 모두가 외제차였다.


잠깐 사이에 눈앞에서 벌어진 일, 내가 뭘 잘못 봤나 싶을 정도였다. 산양이 살고 있는 하늘 꼬리, 고요함과 장엄함이 산맥 가득히 배어 있는 심심유곡, 산양이 놀랄까 발걸음도 조심스레 옮기고 있는 터에 저, 저, 지랄 같은 짓거리라니!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욕이 터졌는데, 그 때 슬그머니 떠오르는 한 모습이 있었다. 조금 전 현수막을 통해서 본 산양의 모습이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허연 수염, 산양이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이르는 것 같았다.


‘내버려 두소. 모두들 자기 걸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니.’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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