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40)


어머니의 마중


아흐레째 일정은 철원 고석정에서 시작했다. 게르마늄 온천수가 솟는 호텔이 있다고 로드맵에는 적혀 있었지만, 호텔 인근에 있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빨래 말리는 건조대까지 구비가 된 좋은 숙소였다. 입구에 걸려있는 달력을 보고 주인에게 반갑게 인사를 나눴던 것은 성지교회 청년들이 수련회를 다녀오기도 한 구수감리교회 달력이 벽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펜션 주인은 구수교회 권사님이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는 내게 권사님은 작은 플라스틱 병에 담긴 꿀을 전해주었다. “정말로 좋은 꿀이에요. 걸으면서 드세요.” 따뜻하고 진심어린 응원이었다. 권사님이 주신 꿀을 배낭에 넣고 물을 마실 때마다 섞어서 마셨다.


걸음을 서둘렀다. 전날 희준 형(兄)이 전화를 해서는 한 번 찾아오겠다고 한 터였다. 길을 걷는 동생을 위해 점심을 사겠다는 형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백마고지역에서 점심때쯤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철원으로 들어가는 다리. 옛 다리와 새로 놓은 다리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철원은 곳곳에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 땅이었다. 한탄강을 따라 길을 걷다 보니 숨은 비경들이 한참 이어졌다. 시간만 된다면 천천히 걸으며 곳곳의 경치를 여유 있게 즐기고 싶었다. 가야할 길이 있고 점심 약속도 있는지라, 주마간산(走馬看山)처럼 지나가야 하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도피안사를 거쳐 철원제일교회 앞을 지날 때쯤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쯤 오고 있는지를 물었다. 생각보다 형은 일찍 도착을 했던 것이었다. 열하루 일정의 후반부, 그렇지만 걸음을 재촉했다.


철원이면 그래도 익숙한 지명, DMZ과는 무관하지 않을까 싶은데도 긴 철조망이 도로 양쪽으로 내달리고 있었고, 철조망에는 지뢰가 묻힌 곳임을 알리는 경고판이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있었다. 이 땅의 아픔은 그렇게도 길고 질긴 것이었다.


철원은 곳곳에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 곳이었다. 

주마간산처럼 지나가는 것이 무척 아쉽게 여겨졌다.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길 저쪽 끝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가만 보니 형이었다. 백마고지역에서 기다리는 대신 내가 걷는 길을 짐작하여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니 형은 혼자가 아니었다.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아직 거리가 멀어 누군지를 알 수가 없었다. 형수님이 동행을 했나, 아내가 같이 왔나 짐작이 안 됐다.


거리가 더 가까워지며 보니 어머니였다. 멀리서도 흰 머리가 보였다. 어머니가 형과 동행을 하여 찾아오신 것이었다. 저 앞에 걸어오는 분이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왈칵 눈물이 솟았다. 뜨거운 눈물이 나도 모르게 솟았다. 내일 모레가 아흔인 어머니가 이 뙤약볕 아래를 걸어 마중을 나오실 줄이야.


군에 입대했을 때가 떠올랐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막 자대에 배치를 받은 어느 토요일, 갑자기 내부반장이 내 이름을 불렀다. 면회를 온 사람이 있으니 속히 옷을 갈아입고 위병소로 나가보라는 것이었다. 자대에 배치 받은 것을 아직 누구에게도 알릴 새가 없었는데 누가 면회를 온 곳일까, 떨리는 마음으로 위병소로 갔을 때 저만치 눈에 들어온 사람도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큰 형 가족과 함께 면회를 온 것이었다.


그 때도 왈칵 눈물이 솟았었다. 입대하던 날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이 나도 모르게 터져나왔다. 전라남도 광주, 광주에서 떨어진 송정리, 그곳에서도 한참 떨어진 평동, 어찌 그 외진 곳에 배치 받은 것을 알고 찾아오신 것일까. 더없이 고마우면서도 돌아서는 어머니께 다시는 면회를 오지 마시라 신신당부를 드렸다. 면회를 다녀가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먼 곳이기 때문이었다.


1946년 북한정권하에서 지역주민들의 강제 모금과 노력동원으로 지어진 건물.

전쟁 중 내부는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벽체는 남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길을 걷는 내가 어머니께 눈물을 보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싶었다. 목사의 어머니로서 가뜩이나 아들과 아들의 목회를 걱정하고 계신 어머니께 눈물을 보이는 것은 괜한 걱정만 끼치는 일이다 싶었다. 그래도 거리가 저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얼른 눈물을 삼키고 감정을 추슬렀다.


“애도 아닌데 무슨 마중을 나오세요?” 밝은 웃음으로 어머니와 형을 만나 인사를 나눈 뒤 함께 길을 걸었다. 마중이 길었던 만큼 함께 걷는 길도 길었다.


백마고지역까지 걸어가며 젊은 시절 어머니가 남쪽으로 넘어오실 때의 일을 다시 한 번 여쭤 들었다. 새댁 시절, 일 년 전 서울로 먼저 떠난 남편을 만나기 위해 홀로 남쪽으로 내려오셨던 어머니, 내려오면서 겪었던 무용담 같은 일들,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렸을까, 어떻게 그런 담력과 용기를 가지셨을까,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면서도 다시 한 번 어머니의 용기와 결단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런 경험을 어머니는 손자 손녀들에게 들려주시고는 한다. 군에 가는 손자에게,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는 손자 손녀들에게 당신의 젊을 적 이야기를 들려주며 얼마든지 용기를 내라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고 격려를 하시고는 한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를 걸어온 어머니의 마중과, 생각지 않았던 곳에서 만나 어머니와 함께 걷는 길, 어디 그런 시간 그런 길이 흔할까, 그 하나만으로도 그날의 일정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정이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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