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me to Kill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누가 10:29-37)


“그 날도 역시 햇살은 눈부시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 소녀는 구릿빛 피부를 햇살에 노출시키며 가게로부터 집으로 오던 길이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의 뒤를 추적하던 트럭이 아이의 길을 막아섰고, 그곳에서 내린 두 명의 건장한 사내는 아이를 노리갯감으로 만들며 자신들의 욕구분출을 위한 대상으로 삼아버립니다. 아이를 폭행한 이 두 사람은 이내 구속되었고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의 폭행사건으로 이성을 잃은 아이의 아버지는 재판을 받기위해 법원으로 들어서던 2명의 남자에게 기관총을 난사합니다. 이제 역으로 피해자의 아버지였던 이가 새로운 피의자가 되어서 차가운 감방 속에 갇히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존 그리샴(John Grisham, 1955~ )이라는 작가가 쓴 한 소설의 도입부입니다. 그리고 그의 소설은 같은 이름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과도 같은 “A Time to Kill”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전히 백인 우월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는 미 남부 미시시피 지역을 무대로 해서 그리샴은 법정소설이라는 틀 속에서 미국사회의 매우 민감한 문제들 중의 하나인 흑백문제를 긴장감 넘치게 그려냈습니다.


조엘 슈마허(Joel Schumacher, 1939~ )감독이 연출한 영화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감독은 치밀한 법정공방과 양자의 심리 대결 등을 적절히 배치하며, 영화 내내 긴장감이 약해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덕에 관객들은 영화 전편에 흐르는 법 판정의 진실성과 미국사회 내 흑백이 공생할 수 있는 길에 대한 고민을 덤으로 선물 받게 됩니다. 그렇게 영화는 단순한 법정 드라마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연속된 두개의 사건 때문에 촉발된 인간사회의 ‘함께 하는’ 혹은 ‘함께 해야만 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한 고민을 관객들은 끊임없이 강요받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두 차례 관람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눈에는 어김없이 성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 10장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예화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매질하여 반쯤 죽여 놓고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느 제관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도 피해 지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레위사람도 그곳에 오게 되었는데 보고서 피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던 중 그곳에 와서 보고는 불쌍히 여겨,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그의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사람을 제 짐승에 태워 그를 여인숙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인숙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당신에게 갚아드리겠어’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의 이 대목은 예수에게 영생의 문제를 질문하는 한 율법학자의 대화록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에 대한 질문을 받자 예수는 곧바로 그 물음을 되받아 치십니다. “성서에 무어라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러자 질문자는 거침없이 예수의 물음에 답을 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네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율법학자의 대답은 두개의 중요한 성서적 전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전반부 하나님에 대한 부분은 신명기 6: 4-5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인데, 일명 ‘셔마’로 불리는 유대인들의 ‘신앙 고백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고백문을 아침, 저녁으로 암송합니다. 그리고 후반부 이웃사랑에 대한 부분은 레위기 19: 18의 인용문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영생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임을 천명한 율법학자에게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꾸하십니다.


“바로 대답했습니다.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살게 될 것입니다.”


거의 동일한 대화록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12:28-34은 대충 이 부분에서 예수와 율법학자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자신이 채집한 예수에 대한 특수 자료를 이 대화록에 삽입시킴으로써 이 부분에 대한, 즉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나님과 이웃사랑에 대한 예수 자신의 생각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누가의 배려 때문에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아주 매력적인 예화를 선물로 받게 됩니다.


이 예화는 영생의 방법을 알았지만, 구체적인 실천행위에 대해서 막막했던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세상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최선의 방법’임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도 율법학자의 질문은 좀처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의 질문은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사랑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자의식은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에 대한 대상으로 야훼 하나님에 대한 목적의식 역시 또렷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 쪽으로 가면 좀 애매해집니다. 유대인의 선생임을 자임했던 율법학자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매우 분명했고 확실했던 것에 반해, ‘이웃’이라는 대상은 무언가 ‘규정’과 ‘제한’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제 주변의 모든 사람을 제 이웃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들 중에는 가족도 있고, 친척도 있고, 때로는 사업상 만나는 이들, 공적인 만남 외에는 특별한 관계를 지속시킬 필요조차 없는 사람들. 그리고 개중에는 이웃이라고 보기에는 경쟁자, 대적자, 혹은 원수에 가까운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는 저의 이웃을 어떤 영역 안에 규정해야 합니까?”


율법학자의 ‘이웃규정’에 대한 반문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답변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누가 ‘이웃’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그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후 등장하는 예수의 답변을 추적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바로 ‘누가 내 이웃인가?’라고 하는 이 율법학자의 질문입니다.


이 점을 직시하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의 예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무게중심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제관·레위인·사마리아인”으로 점증되어가는 드라마틱한 인물성정에 더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이웃사랑’을 업으로 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이웃을 등한시하고, 오히려 유대계 이웃들로부터 이웃으로서의 관심마저 빼앗기고 사는 일종의 버림받은 이웃인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통해, 보다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는 현장, 그래서 우리는 쉽게 구호처럼 이렇게 외치게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따르자!!”


그러나 여기에서도 여전히 문제는 남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웃은 누구였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예수의 예화 속에 등장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만난 이웃은 제관의, 그리고 레위인의 이웃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혹 “누가 내 이웃이냐?”라는 애초의 질문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누가가 전하고 있는 예수의 최종선언은 이 부분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어 줍니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대화를 정리하려는 예수의 최후 질문입니다. 예수의 이 질문은 애초에 제기되었던 율법학자의 질문에 문제가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입니다. 율법학자는 “어느 대상이 자신의 이웃이 되는가?”를 물었지만, 예수는 이웃이란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상의 이웃’이 되어줄 때 형성되는 ‘관계의 결과’임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이웃이란 이미 주어져 있는 ‘타자적 대상’이 아니라, 내 밖에 서있는 저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이 아니라, 그를 이웃으로 ‘고백’하고 그에게 다가서는 나의 구체적인 ‘행위’와 ‘실천’ 속에 ‘이웃관계’가 이루어진다고 예수는 선언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의 예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기 극적인 반전을 도모키 위한 작위적 설정일 뿐, 그 인물들 자체의 본래적 비중 찾기는 별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제관이든, 레위인이든, 사마리아 사람이든 간에 보다 이 예화를 값지고,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쓰러진 강도만난 이에게 이웃으로 다가서고 있는 ‘한 인물’일 뿐이지, 그 인물의 신분이나 지위는 결코 아닙니다.


오늘 예화 속에 그 인물은 사마리아 사람으로 옷 입고 있지만, 때로 그 인물은 레위인이기도 할 것입니다. 제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 자신이기도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이의 고통에 사무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과연 누가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타인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바로 그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이웃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의 신음소리가 단지 묻혀 지나는 잡음으로만 멈추어 있을 때, 그에게 이웃이란 너무도 멉니다. 저기 쓰러져 피 흘리는 누군가가 단지 대상으로만 읽혀진다면 그에게 더 이상의 이웃이란 찾아내기 곤란할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 구석구석에서, 지구 골목골목마다 신음하며 쓰러져 있는 이들의 고통을 읽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이웃이란 머나먼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시 영화 ‘A Time to Kill’로 돌아옵니다. 피의자를 살해한 칼리의 변호사인 브리갠스는 사건 종료 시까지 단 한 가지 사실만을 위해 백방으로 애쓰게 됩니다. 백인우월의식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또 보수적인 남부지역에서, 그리고 심지어 배심원 전원이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딸아이의 폭행 앞에 이성을 잃고 살인을 저지른 한 흑인 아버지의 심정이 읽히도록 하는 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리갠스의 노력은, 흑백의 이념적, 인종적 갈등과 날카로운 편견과 대결의식에 파묻혀 점점 힘을 잃게 됩니다. 사람들은 갈수록 거대담론에 파묻혀 한 인간의 모습보다는 조직과 이념의 대표자로서 칼리를 해석하려 합니다. 치고받는 법정에서의 공방은 때론 피의자에게 때론, 검사측에 유리한 방향이 서로 오가는 형국입니다.


드디어 최후진술만이 남아있습니다. 이미 자신감을 잃고 절망의 늪에 빠져있던 변호사 브리갠스는 최종변론을 위해 입을 엽니다. “법의 눈도 사람의 눈을 가져야 한다”고 운을 뗀 브리갠스는 짧지만 매우 강렬한 최종변론을 이어갑니다.


“한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제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모두 눈을 감아주세요. 그리고 제 이야기와 더불어 여러분 자신의 소리를 들어주세요. 그래요 눈을 감아주세요. 어느 날 오후, 가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소녀가 있습니다. 갑자기 트럭이 서고, 트럭에서 내린 건장한 두 남자는 그 아이를 잡습니다. 근처로 그 아이를 끌고 가 그 애를 묶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옷을 찢어냅니다. 그리곤 번갈아 가면서 그 아이를 성폭행합니다. 술과 땀 냄새에 절인채로 말입니다. 그 일이 끝난 후 아이는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됩니다. 그 아이 이후의 생명들과 자손을 잉태할 기회가 더 이상 그 아이에게는 없게 됩니다. 일을 처리한 두 명의 남자는 아이를 표적삼아 먹고 난 맥주 깡통들을 집어던집니다. 얼마나 세게 던지는지 아이의 살은 찢기고 뼈는 드러납니다. 심지어 두 사내는 아이에게 오줌을 갈깁니다. 그리고 나선 아이의 목을 매답니다. 밧줄이 있습니다. 올가미를 만듭니다. 순식간에 아이의 목은 졸리고 허공 속에 끌려 올라가 발버둥 칩니다. 그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나뭇가지는 튼튼하지 못해 부러지고, 아이는 떨어집니다. 다시 두 사내는 아이를 트럭에 싣고, 다리로 가서 아이를 아래로 내던집니다. 아이는 다리 밑 9미터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 아이가 보입니까? 성폭행 당하고, 매 맞고, 부러진 몸이요, 그들의 오줌에 젖고, 자신의 피에 젖어 죽도록 남겨진 것이 눈에 보입니까? 그 어린 소녀를 그려보십시오, 신음 속에 죽어가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브리갠스의 구체적인 사고묘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심지어 울고 있는 배심원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떨어지는 브리갠스의 마지막 한마디는 지금껏 받고 있던 그들의 동정심을 무더기로 싸잡아 끝 간 데 없는 골짝으로 집어던지게 합니다. 사고당시를 리얼하게 묘사한 브리갠스 변호사는 길지 않은 침묵을 끝낸 후.. 마지막 말을 청중에게 던집니다.


“그 아이가 보이십니까? 성폭행 당하고, 매 맞고, 부러진 몸이요.. 그들의 오줌에 젖고, 자신의 피에 젖어 죽도록 남겨진 것이 지금 눈에 보입니까? 그 어린 소녀를 그려보십시오.”


“그 아이를.... 그 아이는 바로 한 백인 소녀였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브리갠스의 최종 변론은 끝이 납니다. 그리고 브리갠스의 마지막 멘트는 커다란 망치가 되어 배심원과 청중들의 가슴을 흔들어 깨우게 됩니다. 폭행당한 아이가 흑인이 아닌, 백인 소녀라고 생각해 달라는 브리갠스의 최종변론은 그저 먼 남의 이야기로 저 구석에 방치되었던 한 아이의 모습을 바로 내 자신의 이웃으로 끌어오게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신문기사의 한 토막 소식으로 잊혔던 아이의 신음소리가 자기 자식의 아픔이 되어 지금 그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잔디 깎는 기계의 굉음소리나, 지나치는 자동차의 경적소리, 혹은 힘차게 돌아가는 엔진소리 같은 정도의 의미부여밖에 받질 못했던 한 흑인 소녀의 신음 소리가 이제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고통스러워 토해내는 ‘내 자식의 소리’로 들리게 된 것입니다.


브리갠스의 마지막 멘트는 이제 더 이상 아이를 ‘그것’이 아닌 나의 ‘이웃’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알량한 피부의 색깔이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세계는 돌변하고, 요동치며 진동한 것입니다.


저 아이가 내 딸이었다면, 저 아이가 내 조카였다면, 저 아이가 내 누이였다면!!!


기껏 동물보다 조금 나은 존재로만 치부하던 흑인의 딸아이가 백인소녀가 되는 순간 그들은 잃어버렸던 이웃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전 오늘 예수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제관이든, 레위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쓰러진 이웃의 고통 소리에 응답하는 이가 바로 이웃이며, 그런 이들 야말로 영생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


따라서 예수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웃들의 신음소리에 민감할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신앙인의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내가 이웃의 신음소리에 예민하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를 통해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수많은 이웃들이 신음소리를 듣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도처에, 다양한 사연들로 울고 있고, 신음하고 있는 이웃들. 그들의 신음소리에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도움을 주고 있는 우리의 손길과 다짐들 속에 바로 영생은 자리합니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수많은 신음과 호소의 웅변들.. 전에 그것을 단지 “그것”이라는 제 3자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면, 예수로 인해 변혁된 우리의 새로운 시각은 그들을 단지 그들로만 국한시켜서는 안 되고, 그들에게 ‘인간의 이름’을 붙여주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먼발치, 그저 3자로만 머물러있던 그들을 나의 의식과 책임의 영역 안으로 끌고 오는 일, 모셔 오는 일. 바로 그런 우리의 행위 속에 ‘이웃’은 제 얼굴을 하고 우리 앞에 있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제 지금이 "a Time to kill"이 아니라 "a Time to love", 그리고 “a Time to be loved”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생각해보면, 우린 사랑하며 살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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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과 허비의 사이, 영혼이 따라올 시간

- 김기석 목사님 신간 《인생은 살만한가》를 읽고 -


서평을 부탁 받고 책을 읽기 전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저자의 글쓰기였다. 김 목사님을 생각할 때면 늘 떠올라 내게 반성과 분발로 겸손히 허리를 굽히게 하는 그분의 일상적 성실성(誠實性). 그것은 사실상 글쓰기에 앞선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일관된 절제의 태도다. 차라리 10년이 지나도 못 쫓아오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우스개가 들어맞지 그분을 가외(可畏)케 할 후생(後生)이 있을까.


가끔 만나 뵈면 이렇게 함께 쉬어 가는가 모종의 안심이 될듯 싶은데, 보이지도 않는 말(馬)과 능히 경주라도 하는 듯 또 저만치 앞서 달음질을 놓으신다. 날짜와 시간과 날씨와 컨디션을 망라한 일체의 핑계가 소용에 닿지 않는 이 가혹한(!) 성실성. 이것이 그분의 진정한 설교의 출처로서 그 모든 부분 일관되게 게으른 후생들로 거기에 대면하면 일체의 변명을 깨끗이 포기하고 기꺼이 항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공부 못하는 학생이 방학을 만난 듯 오히려 그 앞에 후련해지는 항복이다. 나로 말하면 여전히 게으른 채로 항복했으면서도 탐내며 존경하고 있는. 첫 장을 펼치니 그런 내 첩경에 미리 가 있는 것처럼 이런 말씀을 하신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모래 속에 묻힌 사금을 찾는 것과 유사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의 경험을 체로 거르고 또 거르는 일이고, 글쓰기의 보람은 인식의 지평에 떠오른 낯선 광휘와 마주치는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그 빛과 마주치는 순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깨단하게 된다”(5쪽).


‘깨단하다’(어떻게 이런 말들을 깨알같이 알고 계시는지)는 찾아보니 ‘오래 생각나지 않다가 어떠한 실마리로 말미암아 깨닫고 분명히 알다’라고 돼있다. 모래 속에 묻힌 사금, 특별할 것 없는 일상, 거르고 거르는 체질, 거기서 떠오른 금빛 광휘와의 낯선 만남, 그러니 그의 글쓰기(삶의 전체적 성실성)란 계속하여 이 사람들의 생활이라는 것 속에서 오래 생각나지 않는 중인 어떤 것을 생각하는 중인 것이고, 그것이 걸러져 마음에 남은 금알갱이의 반짝임처럼 떠올라 그것이 금(金)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보람을 위한 끝없는 체질인 것. 떠오른다 했지만 실은 연금(鍊金)이고 제련(製鍊)인 끝없는 노동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쯤은 알고 있다. 그 성실성이나 인식의 지평 위에 떠오른 금싸라기의 보람이란 여전한 체질의 과정인 일상의 부분이지 그것의 한가로운 열매가 아니라는 것을. (물론 가소로운 말이지만)정말 나로선 여기서 문맥(文脈)을 놓치면 영 놓치게 되어 따라가기는커녕 딴 길로 가리라는 것 정도는 간파했다고 믿고 싶다.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잘 속는지!) 이 문맥은 그렇게 쓰여진 글의 맥락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이의 절제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속이는 사람도 없는 데 속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역시 깨단함이 없기 때문이고, 거르고 걸러 오래 생각나지 않다가 어떠한 실마리로 말미암아 깨닫고 분명히 알게 되는 살아감에 관한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껏 보여주었는데도 못 보고 기껏 보고서도 도루묵인.


“텔레비전을 통해 정치인들을 보면 괜히 우울해져요. 그들은 절망과 환멸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자기들의 역사적 소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들을 정치인이 아닌 맨 얼굴의 이웃으로 만나도 마찬가지 느낌일까요? 그들은 가족들 앞에서도 그런 가면을 쓰고 살아갈까요?”


“글쎄다. 하지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어떤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전칭명제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


“아빠도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잖아요?”


“그랬나? 하지만 그것은 일반화의 오류인 동시에 정신적 폭력이야. 감정적으로는 나도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한통속으로 몰아붙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고, 또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그건 나의 미성숙의 증거일 뿐이야.”


“하지만 사람이 이것저것 다 가리면서 어떻게 살아요? 가끔 실수도 하고, 오버도 하면서 사는 거지요.”


“물론 그래. 하지만 타인이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돼. 그의 가면 속에는 분명 말랑말랑한 맨얼굴이 있지 않겠니? 게다가 시간의 지평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실의 실체를 온전히 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거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근본주의의 뿌리야. 타자에 대한 폭력은 흔히 자기 생각의 절대화에서 비롯되는 걸 거야.”(「가면과 맨 얼굴」, 24쪽)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그것들은 다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 같다(전도서 12:11).


젊은 날에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누군가의 말에 양심이 찔려 의기가 소침해지고 약간의 항거를 하고 싶지만 결국 기가 꺾이는 경험을 자주 한다. 그런 말들은 사람도 사람 나름이라서 아는 사람이라면 되려 가소롭거나 아니꼬워 내 기가 살고 양심이 담대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카운터 펀치를 허락하고 의문의 여지없는 일패를 더하기도 한다. 며칠씩 혹은 더 긴 날들을 절치부심으로 끙끙 앓으며 내 의기와 양심 사이에서 괴로워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나는 이제 수락을 괴로워하지도 않고 의기와 양심 사이의 갈등을 고통스러워하진 않게 됐다. 괴로웠던 것은 내가 수락할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고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소하다면 소소한 이런 대화 속에서 나는 나의 오랜 분투의 핵심을 깨단하게 된다. 가면과 맨 얼굴이 타자들의 얼굴에 관한 게 아니라 내 얼굴에 관한 것임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근본주의의 뿌리이며 내 사고의 절대화에서 나는 벗어나질 못했던 것이 아니던가. 더 높고 중한 하나님의 원리에는 둔감하고 알량한 내 자존과 아집의 위상만을 걱정해온 게 나의 의기소침이고 항거가 아니었던가. 하여 나는 이런 말을 듣기만 했지 이런 말을 해 본 일이 없고, 대개 이런 말들을 불신만 했지 내 영혼에 닿는 채찍으로 수락할 줄 몰랐던 것이다.



김 목사님에게는 진리의 첨예함에 입각해 있는 진보성과 함께 얼핏 보수적으로 느껴지는 고전성이 있다. 진보적이면 일반화의 오류나 정신적 폭력에 편벽되기 쉽고(아니 편벽되고 싶고) 고전적이면 위선적이거나 고루하기 쉽다. 나는 아마 그런 모양만 보고 그런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늘 치우치는 경향을 주체 못하며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반성이나 성찰의 여지없이 그 길로 쭉 나가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대개는 선배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그 모든 진보성과 보수성의 고루함에서 벗어난 모종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나는 나의 결과를 알면서도 멈추고 싶지 않은 편협으로의 행진을 기꺼이 자발적으로 멈추고 싶어진다. 이쯤 되면 나는 아마 이런 것이 내겐 없는 것으로 내게 주어진 선물처럼 그것을 탐내보려 하는 것 같다. 허허(虛虛)! 선물을 탐내다니.


가령 또 이런 부분.


“다만 내가 겪어왔던 어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거지. ‘당신들 때문에 내가 몹시 힘들다. 두 분 다 소중한 분들이지만, 이런 점은 공동체에 부담이 된다.’ 그러면 그분들은 처음으로 자기들의 틀을 깨고 제3자를 의식하게 돼. 그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야.”(「영성의 깊이란 무엇인가」 35쪽)


교회에서 각자 충성스럽고 소중한 두 사람이 싸우고 반목할 때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옳고 그름도 있을 테고 옳음과 그름의 우열도 있을 터이다. 이럴 때가 내게도 있다. 이럴 때 나는 대개 기계적 중립의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 분명 옳고 그름에 대한 내 나름의 분명함을 어떡하든지 어필하려고 했을 것이다. 아니 나타내지 않으려 노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태도는 내겐 불가피한 처신으로 일종의 자기를 부인하는 희생적이고 의로운 태도로 까지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당신들 때문에 내가 몹시 힘들다. 두 분 다 소중한 분들이지만, 이런 점은 공동체에 부담이 된다.’라는 말을 해보지 못했을까? 혹은 나는 왜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 4:25)라는 말씀을 담대히 믿지 못했을까?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노라는 나의 용기는 사실 과장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흔들리지 않는 생의 토대는 결국 진실일 텐데, 우리가 진실한 걸까?”(38쪽).


김 목사님은 ‘흔들리지 않는 생의 토대는 결국 진실이다’라는 말을 ‘진실일텐데, 우리가 진실한 걸까?’라고 하시는 분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생의 토대는 결국 진실입니다’라고 말한다.


연전 내가 몹시 앓고 있을 때 목사님으로부터 안부를 묻고 위로하는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날은 비가 내렸고 날씨만큼이나 내 심경은 복잡하고 우울했다. 목사님의 곡진한 위로의 몇 마디가 나를 흔들었던 것일까? 나는 응석처럼 구구절절의 편지를 써 보냈다. 한 번 더 내 마음을 위로해 줄 곡진한 말씀을 내심 기다렸던가. 그러나 목사님으로부터는 ‘마음과 몸 잘 추스르시라’는 간단한 답신이 왔다. 그때 나는 뭔가 내둥 안 하던 짓을 처음 해놓고 막급의 후회를 하는 사람의 심정이 되어 약간은 참담하기까지 했다. 고백건대 나는 사실 누군가에게 내 괴로움을 토로해 본적이 별로 없다. 


‘인생은 혼자 가는 먼 길’이라 아내에게도 내 괴로움에 대해 속속들이 알려 하지 말라고 권한다. 직업상 타인들의 괴로운 고민을 듣고 성실로 답변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내 대답이 답변이 되리라 믿질 않는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이므로. 결국 해답은 당사자 자신에게서 나와야하는 것이고 어차피 겪을 것은 온전히 자신이 겪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내가 왜 이미 문자를 받고 또 뭔가를 갈구하는 글을 써 보냈던 것인가 말이다. 아내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아내는 나를 위해 서운한 모양이었다. 아픈 남편에게 위로가 가득한 답신을 보내주셨으면 좋았을 걸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알았던 것이다. 김 목사님의 짧은 답신. ‘마음과 몸 잘 추스르시고 빨리 일어나시라’는 그 말씀의 의미와 그 의미의 진실과 그 진실을 지키려는 노력과 그 노력의 고뇌와 그 고뇌의 외로움과 그 외로움의 슬픔 같은 것? 그렇다! 그것은 모든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존재들에 대한,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그 자신들이 감당하고 가야하는 진실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동병(同病)의 아픈 연민이자 상련(相憐)의 깊은 슬픔. 그러니 내 맘이 부끄러운 건 내 맘의 굳세지 못함 때문이지 김 목사님의 문자 때문이 아니라고 아내를 달래주었다. 병으로 쇠약해진 나를 본래 나의 태도로 다시 일으켜 주는 안수의 말씀으로.


“결국 인간은 최악의 고통에서만이 진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추운 사람이, 질병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결코 점잖을 수도 없고, 성스러울 수도 없고, 거룩할 수도, 인자할 수도, 위엄이나 용기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찾는 자는 제 목에 오랏줄이 감긴 그 사람뿐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심신의 고통을 지금 맛보고 있는 그 사람뿐입니다. 가장 절실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장군이나 성직자가 아닙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 지금 병으로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온갖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밤을 사람들은 각양각색으로 새우고 있을 것입니다. 밤은 평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치와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이 오덕, 권정생 선생 서간집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에서 인용, 「영성의 깊이란 무엇인가」, 39쪽).


권정생 선생의 말이라는 이 말을 인용하신 뜻은 고통하는 사람에 대한 옹호와 지지일지라도 그의 자존(自尊)을 자기의 의로서 위해하게 되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닐까. 내 일찍이 ‘문장의 핵심은 함축’이라는 말을 들었거니와 이쯤 이르면 ‘인생 전반에 대한 태도의 핵심이 함축’이 아닐까 싶다. 모든 과장과 헛된 위로의 갈구를 간파한 침묵의 응축으로서의 함축. “거기에 비하면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말은 너무나 창백해 보여.” 같은 문장을 만나면 나는 웃음이 난다. 그 정도라면 나 같았으면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말은 죄다 거짓말 같아, (혹은)거짓말이야.’라고 ‘쾅쾅쾅’ 못을 박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또 이런 고백에 이르면 그 절제의 함축과 성실성이 한가로운 사색의 낭만이 아니라 가혹한 노동이라는 내 짐작이 증명된다.


“그랬나? 어쩌면 성실함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나는 일을 적당히, 얼렁뚱땅 하는 걸 싫어하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만든 내 이미지에 자승자박 당한 꼴이었던 것 같아. 성실한 건 좋은데 그게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바뀐 게 문제지. 나는 스스로 그런 문제를 잘 풀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슬픈 몸 고마운 몸」, 47쪽).


“나는 덜 떫은 우리 젊은이들을 보면 좀 안타깝더라.”


“그래도 좀 떫게 굴면 싫어하시잖아요?”


“그건 그래.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것은 상생을 위한 떫음이 아니라 자기 욕망충족을 위해 떫다가는 버림을 받기 십상이 라는 거지. 떫음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는 말이야. 가을이 되면 단맛을 품어야지. 인생의 가을이 되었는데도 떫기만 한 사람들도 있거든.”


“작정한다고 단맛이 품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경계를 넘어」, 91쪽)


흥미로운 대목이다. 떫음에는 상생을 위한 떫음과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한 떫음이 있다는 이 분류법은 떫음의 반듯한 필요와 그 필요의 분명한 목표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선생의 훈계처럼 윤리적인 게 아니라 시인의 시구처럼 시적이다. 나는 궁금해진다. 가을이 되어 단맛을 품기는 사람은 누굴까? 가을이 됐음에도 떫기만 한 사람은 누구일까? 갑자기 땡감의 식감이 느껴지면서 목울대가 꽉 메인다.


“겸손은 자존심의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해주고, 봉사는 강박관념을 씻어주고, 공부는 자기 자신을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고 하셨지요?”(「쉼 평화의 시작」, 111쪽)


여기에 이르러 꽉 막힌 듯한 목이 스르르 풀어진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스스로가 대견해지는 법이다. 겸손이 해방이라니, 봉사가 자유라니, 책은 자기라니. 쉼이면서 평화인 곳 언저리에 나도 이른 것 같기도 한 안심에 나도 좀 쉼이 되고 평화가 되는 것이다.


“양해하겠지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면 제가 알아서 자리를 비워줘야지요.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왜 자꾸 한숨을 내쉬세요, 산에까지 오셔서?”


집사인 듯한 성도는 목사와 산을 오른다. 매사 불만스러운 그녀는 쉴목에 앉아 쉬어가자는 말에 그런 쉼조차 산새들을 방해하는 것이라 불평을 토한다. 도저한 평화주의자이자 의로운 심판관이지만 그 도저함과 의로움으로 다함없는 불만족과 긍휼 없는 짜증을 되돌려 받고 있는. 목사는 여유로운 위트로 성도의 조급한 마음의 숨을 돌린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이제 일어나 가지요. 해 지겠어요”(「인생은 살만한가」, 134쪽).


“그런 경우를 저도 간혹 본답니다. 전 이렇게 생각해요. 진리의 길에서 멀어진 사람일수록 남의 허물을 잘 들추어낸다고요.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지만, 더러운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더러운 법이거든요. 예수님에게는 버릴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이들은 모두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그런 사람들은 점점 무분별하게 되고, 헛된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불의한 행실로 세상을 어지럽혀요. 그들은 가증하고 완고하고 선에 무능력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삶이잖아요? 사람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정직할 때가 많아요.”(「타락한 영혼의 징표」, 184쪽)


옛날 같았으면 불만스런 성서해석이 됐을 것 같다. 아니 아직도 그런 불만이 다 해소된 건 아니다. 마치 이미 훌륭한 사회인이 된 사람이 초등학교 성적에 불만족스러워하듯이. 그것은 간혹 보이는 김 목사님의 보수적 단호함에 대한 오해가 아닐까 싶다. 금방 잊어버렸던 것이다. ‘겸손은 자존심의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해주고, 봉사는 강박관념을 씻어주고, 공부는 자기 자신을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던 말을. 이 모든 말들이 김 목사님 자신이라는 텍스트를 통과해 나온 자기 제련의 체질에서 얻은 일상의 성실이 걸러낸 경건의 광휘인 것을. 그러니 이런 말씀을 흔히 홍수 때 마시지 못할 물처럼 범람하는 교훈가(敎訓家)들의 도덕설교로 듣게 되는 건 곤란하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에게서 가장 긍정적인 것은 자기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고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억이 다 사라지기 전에 세계민들 앞에 서서 그는 자기의 병세를 고했고, 사람들의 이해를 구했어. 나는 그것이야말로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고귀한 메시지라고 생각해. 그는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결국 유한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증언한 셈이지.”(「우리는 신성함을 믿어야 한다」, 210쪽)


그리하여 이런 진리에 이른다.


“망설임은 성실성의 증거이고 확신은 사기의 증거라지요?”(「일상으로 그리는 이야기」, 272쪽)


“만물이 일어나도 막지 않고, 생겨도 잡아두지 않으며,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머물지 않는다〔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크리소스토모스를 그리워하며」, 283쪽).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으니 무릇 아낌을 일컬어 빨리 돌아감이라 한다. 빨리 돌아감을 일컬어 덕을 거듭 쌓는다고 한다. 나는 이군처럼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젊은이들이 이 답답한 세상에 작은 틈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몇 해 전에 텔레비전에서 수십 년을 한결같이 바위를 쪼며 우물을 파들어 가는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값진 보화를 얻으리라는 그분의 바람은 허망해 보였지만 그분의 수도자적인 몸짓에서 나는 서늘한 감동을 느꼈습니다”(「아낌 만한 것이 없다」, 315쪽).


최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를 ‘허비(虛費)(혹은 탕진)’로 설명하는 설교를 했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은 그것을 ‘아낌’으로 표현하고 있다. 허비든 아낌이든 같은 말이지만 이 두 표현법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결이 다름을 발견하게 된다. 허비이면서 아낌인, 허비와 아낌의 사이, 자기 자신에게는 허비인 듯 하지만 세상과 타인을 향해서는 아낌으로 옮아가려는 나를 본다. 그것은 수십 년 바위를 쪼아 우물을 파들어 가는 이의 허망 같은 어리석음이나 자기 공에 머물지 않고 자연과 우주를 따르려 망설이는 수도자의 경건이리라.


본문 어딘가에서 김 목사님은 인디언들이 가던 길을 쉬며 기다리는 이유는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라고 썼다. ‘인생은 살만한가?’ 대답은 영혼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시간, 기다림의 지체(遲滯)에 있으리라.


“어리석음이 없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고,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 생명의 몫을 누리는 참 세상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의 꿈을 하늘이 외면하지는 않겠지요. 나는 이군의 답답한 마음을 일시에 해결해줄 수 있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다만 그 길에서 나는 이군이 예수의 마음, 즉 ‘아낌’이라는 단어 하나를 화두처럼 붙들고 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평화를 빕니다”(「아낌만한 것이 없다」, 317쪽).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하는 노래가 있었지. 정말, 나도 그런 평화를 사모한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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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지혜서 산책(14)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은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실까.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구별 없이 느닷없이 닥치는 자연 재해나 대형 참사들, 그리고 대학살(홀로코스트)같은 어마어마한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까. 때때로 인생과 세상사는 인간의 빛나는 지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곤 한다. 때문에 누군가는 고통과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 사이에서 방황한다.


해롤드 쿠슈너(Harold S. Kushner)라는 랍비는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라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책으로 남겼다. 8개월 된 아들 아론의 ‘조로증’ 때문에 겪었던 고통과 내면의 문제들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젊은 랍비는 인생의 고통의 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아들의 질병 때문에 무자비한 시간을 견딘다. 그는 아들의 질병이 조로증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듣고,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라며 몇 번을 되 내었다. 그러고서 그는 아들 아론을 위해 생일 마다 축하파티를 열지만, 젊은 랍비 부부에게 아들의 생일잔치는 아들의 살아갈 날이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부부는 부모보다 먼저 늙어가는 아들을 바라보아야 했던 순간들을 견뎌야했다. 그리고 끝내 아들 아론은 14번째 생일 이틀을 앞두고 부모 곁을 떠났다(1963-1977). 젊은 랍비가 아들을 회고하며 책을 쓴 이유는 단순했다. 고통에 대한 전문적인 신학적 해석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고통을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젊은 랍비는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악이 발생하는지를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고통의 문제를 자신의 신학적인 지식으로 설명하려들지 않았고, 고통의 신비를 그대로 남겨두었다.


지극히 의로웠던 의인 욥에게(욥기 1:1), 생애 어떤 날도 부끄럽지 않기를(27:6) 원했던 그에게 닥친 재앙들은 완벽했던 그의 삶을 산산조각 냈다. 경건한 욥은 왜 자신에게 이러한 고통이 닥쳤는지 알 수 없었다. 흔들림 없이 견고했던 욥은 끔찍한 육체적 고통과 사회적인 고립 앞에서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죽음을 갈망하기에 이른다(3장). 열 명의 자녀들이 혹시 모를 마음의 죄까지 염려하며 번제를 드릴정도로(1:5) 신중했던 그였지만, 아니 너무 지나치게 강박적 신앙인 같았던 그였지만, 그도 흔들렸다. 죽기를 갈망하며 자신을 저주하는 욥의 탄식 앞에서 욥의 친구들은 인간의 고통은 죄 때문이라는 판단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더군다나 친구들은 욥의 죄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도시의 오물더미처럼 버려진 욥이(2;8) 깨진 우정 앞에서 얼마나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끝까지 그는 자신의 결백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도 하나님은 왜 충실한 종에게 고통을 허락하셨는지, 고통은 죄의 결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고통의 원인자는 하나님


하늘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욥이지만, 적어도 자기의 고통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의 말은 과감하다. 솔직하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6:4, 개역개정)


욥은 자신이 전능자의 원수 같다고 느낀다. ‘욥’이라는 이름의 뜻이 ‘핍박 받는 자’, ‘미움을 받는 자’, ‘대적자’라는 뜻 말도고 다양하게 전해지긴 하지만, 그의 이름이 그의 존재 자체가 된 셈이다. 욥은 고통당하며 친구로부터 위로를 얻지 못하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최후의 은총을 기대할 뿐이다. 거룩하신 분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하는(6:10) 욥. 친구들은 이런 욥이 건방져 보인다.


욥도 자신이 왜 고통당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다. 친구들의 집요한 추궁, 숨 막히듯 조여드는 통증의 괴로움, 깨진 우정의 상처는 하나님을 향해 거침없는 항의로 이어졌다. 욥은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 사이의 긴장 속에서 양가적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하나님을 규탄하면서 동시에 절대적인 통치자 하나님을 찾는다. 욥은 왜입니까? 라고 묻기도 한다(7:20).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님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7:20, 새번역)


욥은 고통을 견디며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지만, 친구들은 다르다. 고통이 하나님의 심판과 정의라고 확고하게 믿는 빌닷은 전통주의자였고, 신학적인 전통이 모든 것을 구원할 것처럼 말했다. 빌닷은 욥에게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우라’(8:8) 한다. 빌닷의 말처럼 지혜 전통과 유산은 귀하다. 하지만 그 유산을 빛내줄 새로움이 없다면 전통주의만 남을 뿐이다. 기독교 역사학자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Jan Pelikan, 1923-2006)이 “전통은 죽은 자들의 살아 있는 믿음이지만, 전통주의는 살아 있는 자들의 죽은 믿음”이라고 했던 한 문장, 깊이 새겨 봄직하다. 전통은 새로운 환경에서 재해석되지 않으면 가치를 잃게 된다.


빌닷은 욥에게 청결하고 정직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돌보실 것이고(8:6),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9, 개역개정) 말하기도 했다. 너무도 유명한 이 한마디! 말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도 때에 맞는 말이어야 가치 있는 법. 욥에게 어떤 위로도 주지 못하는 친구들의 말 말 말! 욥은 친구들이 가하는 보응교리 때문에 괴로워하며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없음을 탄식한다(9:32-33). 욥의 솔직한 발언을 문제 삼아 친구 소발도 회개를 촉구한다(11장). 친구들에게 욥은 고난당하는 자가 아니라 죄인이다. 그러니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11:14) 그러면 ‘네 생명의 날이 대낮처럼 밝은 것이라’(11:17)는 등등의 약속을 한다. 엘리바스도 욥에게 회개하면, 겸손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며 약속의 말들을(22:21-30) 쏟아낸다.


욥의 친구들처럼 우리가 한 가지 신학적인 확신만 있다면, 그런데 그 확신이 틀렸다면 어떡할까?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신비한 일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죄 없이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들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의 신비를 인식할 수 없다면, 내가 아는 진리에만 지나치게 자기 확신에 빠져 모르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에게 비난과 혐오로 맞대응하게 된다.


경건하고 착한 사람에게 닥치는 곤경을 누가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것 하나 있다면, 고통은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지 간에 만사가 잘 돌아간다는 환상을 깨고, 사람이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자립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리는 시간 아닐까. 인간중심적인 사고에 균열을 가져오는 시간 아닐까. 하나님의 손이 짧아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통에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듯, 고난은 하나님의 버려둠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또 하나의 길 아닌가.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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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님꼐(13)


저마다 선 자리에서 등불 하나 밝히라는 것이지요


처음 책을 받아 보고는 훅 빨려 들어갔습니다.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라는 제목 때문이었겠지요. 자고나면 눈 뜨기가 겁나는 세상에, 오늘은 또 무슨 일이 터지나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세상에서,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라니요. 그 책은 마치 저 같은 이들 보라고 쓰인듯하여 책을 잡자마자 냉큼 머리말부터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당신은 초장부터 이렇게 빠져 나가시더군요. 


“어떤 경우에도 내가 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7쪽).


‘흠, 그러면 그렇지. 목사라고 별 뾰족한 답이 있을라구…’


약간은 심드렁한 기분으로 책을 읽어 나가다가 이 대목에서 눈길이 멈추었습니다.


“… 세월이 갈수록 그 엄정함과 서늘함으로부터 점점 멀어진 채 순치된 동물처럼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제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아뜩해집니다. 조금 지친 듯한 느낌입니다. 삶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41쪽).


‘어라? 목사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 삶이 지루하다고?’


혹세무민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교회


그러나 사실은 이 이야기가 참 반갑고 위로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저 자신, 젊은 시절 스스로에게 다짐하였던 많은 것들이 어느덧 세월 따라 흐물흐물해져 가는 것을 눈앞에 보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을 곧추세워 보려고 노력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낡아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됩니다. 분노는 여전하지만 열정은 식어가는 것 같습니다. 승리보다는 패배의 기억이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싸웠던 독한 권력은 이제 상대하기 어려운 복잡한 권력들에 자리를 내어 줬습니다. 정치를 앞장세우고 자신들은 나서지 않으면서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옭죄는 거대자본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그들의 은밀한 손을 통해 법이 바뀌고 제도가 바뀌었고, 국민의 피땀으로 세워진 멀쩡한 공기업들이 민영화됩니다. 국민 전체의 행복을 추구해야 할 국가가 소수 재벌들과 그에 결탁한 관료, 정치인들의 전유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국민은 점점 개·돼지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겠지요. 국가의 기강을 유지해야 할 사법부 종사자들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포로가 된지 오래일 뿐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공직을 이용한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건지, 죽은 귀신이 된지 오래였어야 할 “유신의 망령”이 다시 현실 속을 배회합니다. 5년짜리 계약직 공무원인 대통령이 전지전능, 만기친람萬機親覽의 절대군주 같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나라와 국민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드 배치 같은 문제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이게 왜 논란이 될 사안이냐?”고 오히려 국민을 향해 호통을 칩니다. 그런 대통령 아래 있는 고위공직자들이 국민을 개·돼지와 같이 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OECD 평균을 훨씬 웃도는 노동시간을 감내하며 열심히 일해 온 이 땅의 노동자들, 그들의 형편은 여전히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재벌들은 수백조 원을 현금으로 쌓아두고 있지만 그 돈을 만들어 준 많은 국민은 이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기도 어렵고, 일을 한다고 해도 사는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습니다.


세상이 이러한데도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은 그 세상 속을 뚫고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모세의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천당, 불신지옥”같은 혹세무민의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돈이 거의 절대 신앙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종교도, 국가기관도 모두 부패와 무능, 무책임에 얽혀 제 역할을 못하는 현실, 그 총체적이고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자신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무능해 보이고,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겉모양으로나마 숨 쉬고 살아가는 이 삶이 참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있음 그 자체’로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까?


갑자기 흥분을 한 것 같군요. 그런 자리가 아닌데 분노의 게이지가 급상승합니다. 어디에 마음 줄 곳도 없고, 마땅히 하소연 할 데도 없는 상태에서 목사님께 글을 쓰다 보니 이렇게 폭발하는 것 같습니다.


새삼 목회자로서 갖게 되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살이의 고민과 힘듦을 목사님께 하소연 하겠지요? 때론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느냐는 항의도 들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데 하느님의 정의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대드는 젊은 청춘은 없나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이라고 해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다 갖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말씀하신대로 그저 고민을 함께 나누는 정도가 대부분이겠지요. 그러자면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듯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그 우울함과 피로감은 누구의 몫이 되는 걸까요? 그런 우울을 떨쳐 버리려는 목소리를 이 책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둠을 모르는 빛은 불완전하고, 절망을 모르는 희망은 공허”(97쪽) 하다든가, “성숙한 사람은 흔들림과 젖음을 물리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통해 자기의 유한성을 깊이 자각할 뿐 아니라 그것을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수용합니다”(97쪽). 도종환 시인의 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를 인용하면서 한 말입니다. 흔들리는 자신과 우리들을 위해 바울사도의 서신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라디아서 6:9). “절망의 심정이 깊어지면 그때가 정말 올까 하는 회의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든든히 붙들어야 합니다. 움씨를 뿌리는 농부는 자기 속에 있는 절망을 애써 다독이며 희망을 뿌리는 것입니다”(98쪽).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삶의 문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삶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문법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131쪽)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결국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마다 선 자리에서 천년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 하나를 밝히는 마음으로 산다면 이 어둠의 땅에도 결국 새벽이 오지 않겠습니까?”(131쪽)


저는 이 대목에서 뜬금없이 서산대사의 선시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눈 덮인 들판 걸어갈 때에 踏雪野中去

발걸음 함부로 내딛지 마라 不須胡亂行

오늘 걷는 내 발자국은 今日我行跡

뒤에 오는 이의 이정표가 될지니 遂作後人程


자기만의 삶의 문법으로, 선 자리에서 천년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자! 이 자못 비장하게도 들리는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이웃을 외면하고 제 앞가림에만 급급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과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많은데 ‘있음 그 자체’로 길을 찾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는 이들은 많지 않”다 (142쪽)라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가운 세상에 온기를 나르는 사람들”(143쪽)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목사님의 절친(!)이신 법인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향기를 파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이 땅의 지식인과 정치인, 노동운동가 등 이른바 사회지도자들이 평소의 가치와 신념을 저버리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정반대의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역사는 지조를 버린 이들을 변절자라고 부른다. 간혹 서울 나들이를 갔다가 보게 되는 종합편성채널에는 변절자들의 해괴하고 교묘한 논리가 판을 친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분노를 넘어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조용히 생각해 본다. 왜 변했을까. 방법은 바꿀 수 있어도 길은 바꾸면 안 되는 것인데, 왜 자신이 평소 걸어오던 길을 바꾸었을까. 결코 놓을 수 없는 권한 행사, 더 풍족한 경제생활, 아니면 그보다는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법인,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293쪽).


속이 뜨끔했습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향기를 파는 일에 유혹을 느꼈던 적은 없었던가?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가? 과연 내 자신, ‘있음 그 자체’로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내가 지금 이 차가운 세상에 온기를 나르고 있는가? 하는 물음 앞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분노는 여전하지만 열정도, 낙관도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밝히는 등불 이전에 자기 마음속을 밝히는 등불 하나도 제대로 켜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습니다.


앞에 인용한 서산대사의 선시는 김구 선생이 인용하여 더 많이 알려지기도 한 시이지요. 선생은 성공 여부가 매우 불투명한 가운데 많은 이들의 반대 속에 남북정치협상을 위해 북행길에 오르면서 이 시를 읊었습니다. 친일파들의 비호 속에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냉전의 기치를 내세우며 정권장악에 매달렸던 이승만과 달리, 그는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시계視界 제로의 북행길에 올랐습니다. 눈발만 휘몰아쳐 올 뿐, 사방에 인적이 끊어진 허허벌판을 걷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뒤에 오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놓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을 행할 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옳은 일인가, 옳지 않은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그의 고집스러운 행보와도 닮아 있습니다.



순례자의 길


백범 김구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 가슴이 먹먹해져 옵니다. 과연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선지자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선지자의 삶을 존경하고 동경하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그런 길을 걷기는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순례자의 길을 떠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지자의 흔적을 따라 길을 떠나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 속에서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보려는 이들을 저는 순례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 길 위에 서 있는 이들은 물론이요, 비록 현실에 몸담고 있지만 끝없이 그 길을 동경하는 이들 모두를 저는 순례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김 목사님 책에서 순례자들에 대한 언급이 많이 눈에 띄더군요. 특히 이런 구절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시간과 이익을 다투는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지만, 순례자들은 길을 잃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입니다”(220-221쪽).


“떠나는 이들은 언제나 주류적 가치에 사로잡히기를 거절하는 이들입니다.”(222쪽)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하지요.


“중심부에 속하려는 가련한 노력이 사람을 피폐하게 만듭니다”(222쪽).


아마도 김 목사님이 사람들과 나누고자 했던 이야기의 핵심은 이런 이야기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집요하게(?) 반복되고 있거든요.


“내려놓지 못해 누추해진 이들을 우리는 정말 많이 봅니다. … 찬바람에 하나 둘 떨어지는 낙엽을 봅니다. ‘방하착放下着.’ 때가 되면 홀가분하게 떠나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328쪽).


“욕심을 내려놓으면 비루해지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을 내려놓을 수 없어 삶이 남루해집니다”(354쪽).


“맑은 향기를 풍기며 사는 이들은 거의 다 자기 비움의 명수들입니다”(383쪽).


이제 이 편지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책은 저자의 것이 아니고 독자의 것이라고 한 말을 이 책을 읽는 내내 곱씹어 보았습니다. 제가 김 목사님의 책을 오독한 것이 아니라는 근거 없는 확신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 편지의 마무리 역시 목사님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희망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숨은 불씨를 찾는 것이라 생각합니다”(108쪽). 


그 숨은 불씨로 저마다 선 자리에서 등불 하나 밝히라는 것이지요? 내내 건강하시길 빕니다.


정범구/전 국회의원,  주 독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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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의 말씀 안으로(5)


부자, 낙타, 바늘귀 그리고 천국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 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가 10:17~27)


사람들은 왜 종교를 선택하는지요, 그리고 왜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이란 것을 선택하는지요. 목사가 되어서도 저는 잊지 않고 이런 유의 질문을 반복해서 해보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교회를 비롯한 여러 종교기관에 문을 두드리고 있고,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종교라는 것에 연결되어보고자 애쓰는 이들의 모습을 주변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종교에 귀의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타인에게 전하길 원하는 것인지요.


바로 오늘 우리는 함께 읽은 본문 속에서 이렇게 종교적 갈증을 해소하고자 무던히도 애쓰고 있는 사람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그를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이 사람은 이제 막 새로운 길을 떠나려는 예수 일행의 발걸음을 묶어두고 자신의 깊은 갈증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자 애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마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길을 떠나실 때에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물었다.”


이제 당연히 이 본문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이 그처럼 숨차게 예수의 앞길을 막았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계속해서 마가는 당시의 정황을 옮깁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생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 분명해졌습니다. 이 사람의 고민은 바로 ‘영생(永生)’입니다. 영생이라 함은 ‘영원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어법에 따르자면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와도 동의어가 됩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9장 43, 45, 47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조금 살벌한 내용을 담고 있긴 하나 죄악에 빠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 구절들 속에서 예수는 분명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있다고 전하고 계십니다.


흔히 영생하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 ‘죽은 다음에 지옥에 가지 않고 천당에 올라가 영원히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틀린 이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앞서의 설명 중 두 번째 부분, 즉 죽은 이후 천당에 올라가 천사들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이라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고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라는 개념 하에 어떠한 왕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뜻합니다. 따라서 온전히 주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하겠습니다. 이 모두를 통괄하여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생과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단어만 다를 뿐 동일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앞길을 막은 이 사람의 당면한 최고의 문제는 바로 이 영생, 구원,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임을 우리는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고민은 영생이었습니다. 이승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코 이 땅의 부패할 것들에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처럼 썩어질 속세의 것이 아닌 영구한, 영원한 그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가 속해있던 전통에서는 그것을 영생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훌륭하다고 칭송 받고 있던 저명한 랍비를 찾아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묻고 물어 찾아온 것이 예수란 분입니다. 드디어 그는 예수를 만나게 되었으나, 불행히도 그는 말씀을 이미 마치고 발길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인생 최대의 난제를 해결할 분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예서 포기한다면 지금껏 숙성시켜온 자신의 고민 앞에 볼 낯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지체 높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넓죽 예수의 앞길을 온몸으로 막아서게 됩니다. 그리곤 질문합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생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사람의 질문처럼 어쩌면 우리 모두도 이 영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교회에 발길을 옮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직 신앙적 도전 내지는 설정이 미숙한 이들은 마음의 평온을 위해서, 혹은 우리 식구가 잘되기 위해서 등등의 지난한 그리고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연을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자의식적인 신앙인’이라 자임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바로 오늘 예수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 이 사내의 고민에 어느 정도 공감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처럼 구원의 문제로 예수의 앞에 버티어 서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과 내포하는 구체적인 뜻이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우리는 세속의 문제만을 위해서 이곳, 바로 교회에 발길을 옮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애초의 발걸음은 바로 그러한 속세적 내지 아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촉발되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신앙이 몸에 배이게 되면 저도 몰래 우리는 이승보다는 저 세상을 말하게 되고, 이 땅 보다는 저 하늘을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짧고 짧은 인생을 말하기보다는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의 비밀을 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곳 피안에, 저 하늘에 있는 영생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예수의 발걸음을 묶어놓고 있는 한 사내의 질문이며 또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저의 지난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나? 무엇 때문에 신앙을 갖길 원하나? 도대체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위에 언급한 질문들에 예민한 사람들이라면, 오늘 이 부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 사내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바로 그와 동일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멋진 해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예수의 해법을 옮겨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손해 끼치지 말라,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는 계명을 당신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일러스트/고은비


“어찌해야 영생을,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사내의 질문에 예수는 무척 전통적인 해법을 내어놓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십계명입니다. 예수는 질문의 대답으로서 십계명의 후반부에 대한 내용을 제시하십니다. 십계명의 후반부는 주로 이웃 사랑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중 손해 끼치지 말라는 명령은 십계명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신명기 24장 14절에 나오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도 이 조항 역시 크게 보아 이웃사랑의 울타리에 포함되므로 예수의 의도는 십분 살려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의 답변은 평소 그분의 언행과도 일치합니다. 우리도 이미 알고 있듯이 첫째가는 계명을 묻는 서기관에게도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이루어지는 현장 속에 영생과 구원이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고 보고 계십니다. 이제 거의 대답은 완성된 셈입니다. 부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내는 예수의 이 언어를 실행에 옮기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이 사내의 입을 통해 새어나옵니다.


“선생님, 그런 것은 제가 소년시절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그는 이미 영생을,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를 온 몸으로 체득했을 터인데?! 또 무엇이 필요해 예수를 찾아온 것일까요? 만약 예수께서 하신 답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오늘 예수의 발 앞에 꿇어 엎드린 이 사람은 영생을 얻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여전히 영생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면 분명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계명의 본 내용을 잘못 이해했거나 혹은 예수의 답변이 완전치 않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상을 넘어서는 사내의 대답에 예수의 반응 역시 무척 흥미롭습니다. 마가는 당시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시고 그를 사랑스레 여기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구원의 문제로 전념하는 이 사내에 대한 예수의 따뜻한 마음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스레 여기는 예수의 태도로 보아, 어린 시절부터 그 모든 것을 완벽히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이 사람의 증언은 거짓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후에 등장할 예수의 답변은 영생, 구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숨죽여 예수의 답변을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도록 하세요.”


예수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명료합니다. 이제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씀. 이 정도의 말씀이라면,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 증언하지 않고, 손해 입히지 않고, 부모 공경하기를 목숨처럼 하는 일을, 그것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킨 사내라면 그야 말로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그런 삶을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예수의 마지막 권면이 꽤 부담스럽기도 할 것이겠지만, 계명을 철저히 지키고 살았다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답변에 대한 이 사내의 태도는 또한 뜻밖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 말씀 때문에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물러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의 증언은 여기서 끝나고 있습니다. 이 부자로 알려진 사내는 평생을 계명을 지키고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예수의 마지막 권고에는 근심으로 빠져들 정도로 허약한 모습을 노출시키고 맙니다. 아니, 그렇다면 이 부자가 앞서 예수께 고백한 내용은 거짓이었단 말인가요?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로 이 사내는 계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애를 써왔고, 또 나름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의 이 사내에 대한 포근한 시선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늘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어쩌면 이 부분, 즉 부자가 근심하게 된 이유를 밝히는 것이 애초에 던졌던 저의 질문에 대한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어떻게 사람들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바로 그 질문 말입니다. 물론 이 질문은 다시 그 사내의 지고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대답에 의지해본다면, 영생은 계명의 내용을 힘써 지키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계명을 힘써 지키는 것에는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바로 이 부자의 경우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됩니다. 분명히 부자는 이 모든 계명을 힘써 지켰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끓어오르는 구원에의 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답변대로라면 그는 이미 영생을,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를 확보한 사람이어야 할 텐데, 오늘도 그는 구원에 대한 갈증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 외에 또 필요한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인지요? 바로 이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 오늘 우리 모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예수의 두 번째 대답을 곱씹어 보면 의외로 문제는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도록 하세요.”


예수는 이 부자에게 딱 한 가지만 부족하다고 말해줍니다. 바로 그것을 준행하면 부자는 구원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부족한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예수는 이 부족한 한 가지가 곧 ‘자신의 재산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음’이라고 지적해 줍니다. 그가 여전히 부자인 것이 부족한 바로 그 한가지라.... 이 부분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게 잘 다가오지 않습니다. 혹자는 후반 절에 “나를 따르도록 하라!”는 추종명령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건 조금 억지인 것 같습니다. 예수의 답변을 그대로 따라가자면 부자에게 부족한 딱 한 가지는 당연히 예수를 추종하지 않음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 부자는 이미 예수를 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생업을 포기하고 그처럼 선한 선생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오늘 우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의 그 한마디, 바로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또 고민합니다. 아, 역시 그런 것인가? 교회는 있는 재산을 다 팔아야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곳인가? 예수의 답변이 가지고 있는 축자적 의미가 남다른 지라 사실 많은 이들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많은 묵상과 기도 후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늘 그렇듯이 구체적인 행위 하나하나를 규정합니다. 따라서 계명의 내용은 지극히 실천적이요 구체적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체적인 행위의 실행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행위들을 규정하고 있는 ‘계명의 정신’입니다. 이 얘기는 계명의 조항을 아무리 열심히 준행한다고 하더라도 계명의 정신이 빠져있으면 그 계명에의 준행은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와 부자와의 대담이 조금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분명 이 사내는 계명의 규정을 잘 준행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계명의 정신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것을 어릴 적부터 지켜왔는데도 여전히 구원에의 갈증을 일으킬 정도로 딱 한 가지 부족한 그 무엇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지적해주고 계시는 그 딱한가지는 바로 ‘계명의 조항’이 아니라 ‘계명의 정신’입니다.


그것은 ’구원은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이라는 말로도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즉 ’공동체성에 대한 실질적인 확보‘가 구원에 이르는 전제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부자는 계명을 준수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였지만 여전히 그가 속한 세계에 그가 함께 해야 할 공동체는 없었습니다. 즉 그는 이웃 없이 홀로 계명 수행에만 열중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 없는 생활과 세계 속에 있었던 그에게 계명수행은 오히려 쉬웠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살인할, 간음할, 도둑질 할, 거짓 증언할, 손해를 끼칠 만한 이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갖춘 그는 이웃 없이도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정말 이웃에게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으며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혼자 하는 삶에 익숙한 그는 그 이외의 다른 이웃을 자신의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기가 오히려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혼자였고, 그러면서 여전히 계명을 성실히 준행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이웃이 전제되어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인데도 그는 이웃을 잃어버리고도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여전히 목마릅니다. 여전히 구원의 갈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단독자로서는 불가능한 구원의 문제를 홀로 해결하려 했기에 그는 끝없는 갈증에 허덕이게 됩니다.


“이 정도면 법 없이도 사는 나인데… 이 깊은 데서부터 솟구쳐 나오는 갈증의 정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사내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만 끝내 자신의 주변에서 사라져 버린 이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 예수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도록 하세요.”


부자인 사내가 가진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누어주라는 예수의 말씀은 실제로 자신의 전 재산을 포기하라는 내용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는 이 권면의 언어로 그에게 잊히고 있는 이웃의 모습을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일 겁니다. 이 말씀을 던지신 예수께서는 부자 사내가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바로 그것을 원하고 있는 이웃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길 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배부르면 그 누군가인 당신의 이웃도 배부르고 싶고, 당신이 배 골을 때에는 당신의 이웃 중 그 누군가도 굶주려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재물이라 여기는 것도 그 수없이 많은 관계 속에서 얻어진 것들이기에 결국 그것들은 함께 나누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유해야할 것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독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도적질 한 것과 진배없고, 결국 그러한 독점적 삶으로는 결코 영생의 길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이 사내가 잃어버린 이웃을 되찾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내는 또다시 근심으로 대답합니다. 여전히 그는 이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는 자신만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 속에 영생은 요원합니다. 영생은 여전히 수천 수만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주변의 이웃을 외면하고는 결코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생을 얻고,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이들은 바로 그 이웃들을 회복한 이들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 다양한 얼굴을 하고 스쳐 가는 모든 이들을 나와 동일한 사람으로 느끼고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자세에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여전히 우리 스스로 직접적으로 맺어진 관계에서만, 혹은 기호나 선호에 따라 조성된 편벽적 모임 속에서만 신앙을 운운한다면, 그러한 우리의 모습도 예수의 눈에는 여전히 부족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 가운데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경험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같이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한 고백의 존재로서 서로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또 그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애쓰는 공동체이기를 빕니다.


우리가 말하는 영생-구원-하나님의 나라는 이기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의 ‘특별함’과 나의 ‘편함’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수천수만의 얼굴들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나와 나의 가족만의, 혹은 나와 친한 얼굴들만 있다면 여전히 부족합니다.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이웃에 대해 가급적 최선을 다해 책임지려는 모습, 그것이 바로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부자 사내와 예수의 대화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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