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말씀 안으로(5)


부자, 낙타, 바늘귀 그리고 천국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 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가 10:17~27)


사람들은 왜 종교를 선택하는지요, 그리고 왜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이란 것을 선택하는지요. 목사가 되어서도 저는 잊지 않고 이런 유의 질문을 반복해서 해보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교회를 비롯한 여러 종교기관에 문을 두드리고 있고,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종교라는 것에 연결되어보고자 애쓰는 이들의 모습을 주변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종교에 귀의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타인에게 전하길 원하는 것인지요.


바로 오늘 우리는 함께 읽은 본문 속에서 이렇게 종교적 갈증을 해소하고자 무던히도 애쓰고 있는 사람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그를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이 사람은 이제 막 새로운 길을 떠나려는 예수 일행의 발걸음을 묶어두고 자신의 깊은 갈증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자 애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마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길을 떠나실 때에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물었다.”


이제 당연히 이 본문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이 그처럼 숨차게 예수의 앞길을 막았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계속해서 마가는 당시의 정황을 옮깁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생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 분명해졌습니다. 이 사람의 고민은 바로 ‘영생(永生)’입니다. 영생이라 함은 ‘영원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어법에 따르자면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와도 동의어가 됩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9장 43, 45, 47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조금 살벌한 내용을 담고 있긴 하나 죄악에 빠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 구절들 속에서 예수는 분명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있다고 전하고 계십니다.


흔히 영생하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 ‘죽은 다음에 지옥에 가지 않고 천당에 올라가 영원히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틀린 이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앞서의 설명 중 두 번째 부분, 즉 죽은 이후 천당에 올라가 천사들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이라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고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라는 개념 하에 어떠한 왕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뜻합니다. 따라서 온전히 주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하겠습니다. 이 모두를 통괄하여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생과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단어만 다를 뿐 동일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앞길을 막은 이 사람의 당면한 최고의 문제는 바로 이 영생, 구원,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임을 우리는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고민은 영생이었습니다. 이승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코 이 땅의 부패할 것들에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처럼 썩어질 속세의 것이 아닌 영구한, 영원한 그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가 속해있던 전통에서는 그것을 영생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훌륭하다고 칭송 받고 있던 저명한 랍비를 찾아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묻고 물어 찾아온 것이 예수란 분입니다. 드디어 그는 예수를 만나게 되었으나, 불행히도 그는 말씀을 이미 마치고 발길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인생 최대의 난제를 해결할 분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예서 포기한다면 지금껏 숙성시켜온 자신의 고민 앞에 볼 낯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지체 높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넓죽 예수의 앞길을 온몸으로 막아서게 됩니다. 그리곤 질문합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생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사람의 질문처럼 어쩌면 우리 모두도 이 영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교회에 발길을 옮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직 신앙적 도전 내지는 설정이 미숙한 이들은 마음의 평온을 위해서, 혹은 우리 식구가 잘되기 위해서 등등의 지난한 그리고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연을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자의식적인 신앙인’이라 자임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바로 오늘 예수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 이 사내의 고민에 어느 정도 공감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처럼 구원의 문제로 예수의 앞에 버티어 서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과 내포하는 구체적인 뜻이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우리는 세속의 문제만을 위해서 이곳, 바로 교회에 발길을 옮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애초의 발걸음은 바로 그러한 속세적 내지 아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촉발되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신앙이 몸에 배이게 되면 저도 몰래 우리는 이승보다는 저 세상을 말하게 되고, 이 땅 보다는 저 하늘을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짧고 짧은 인생을 말하기보다는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의 비밀을 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곳 피안에, 저 하늘에 있는 영생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예수의 발걸음을 묶어놓고 있는 한 사내의 질문이며 또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저의 지난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나? 무엇 때문에 신앙을 갖길 원하나? 도대체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위에 언급한 질문들에 예민한 사람들이라면, 오늘 이 부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 사내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바로 그와 동일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멋진 해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예수의 해법을 옮겨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손해 끼치지 말라,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는 계명을 당신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일러스트/고은비


“어찌해야 영생을,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사내의 질문에 예수는 무척 전통적인 해법을 내어놓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십계명입니다. 예수는 질문의 대답으로서 십계명의 후반부에 대한 내용을 제시하십니다. 십계명의 후반부는 주로 이웃 사랑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중 손해 끼치지 말라는 명령은 십계명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신명기 24장 14절에 나오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도 이 조항 역시 크게 보아 이웃사랑의 울타리에 포함되므로 예수의 의도는 십분 살려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의 답변은 평소 그분의 언행과도 일치합니다. 우리도 이미 알고 있듯이 첫째가는 계명을 묻는 서기관에게도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이루어지는 현장 속에 영생과 구원이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고 보고 계십니다. 이제 거의 대답은 완성된 셈입니다. 부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내는 예수의 이 언어를 실행에 옮기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이 사내의 입을 통해 새어나옵니다.


“선생님, 그런 것은 제가 소년시절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그는 이미 영생을,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를 온 몸으로 체득했을 터인데?! 또 무엇이 필요해 예수를 찾아온 것일까요? 만약 예수께서 하신 답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오늘 예수의 발 앞에 꿇어 엎드린 이 사람은 영생을 얻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여전히 영생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면 분명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계명의 본 내용을 잘못 이해했거나 혹은 예수의 답변이 완전치 않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상을 넘어서는 사내의 대답에 예수의 반응 역시 무척 흥미롭습니다. 마가는 당시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시고 그를 사랑스레 여기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구원의 문제로 전념하는 이 사내에 대한 예수의 따뜻한 마음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스레 여기는 예수의 태도로 보아, 어린 시절부터 그 모든 것을 완벽히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이 사람의 증언은 거짓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후에 등장할 예수의 답변은 영생, 구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숨죽여 예수의 답변을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도록 하세요.”


예수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명료합니다. 이제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씀. 이 정도의 말씀이라면,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 증언하지 않고, 손해 입히지 않고, 부모 공경하기를 목숨처럼 하는 일을, 그것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킨 사내라면 그야 말로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그런 삶을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예수의 마지막 권면이 꽤 부담스럽기도 할 것이겠지만, 계명을 철저히 지키고 살았다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답변에 대한 이 사내의 태도는 또한 뜻밖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 말씀 때문에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물러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의 증언은 여기서 끝나고 있습니다. 이 부자로 알려진 사내는 평생을 계명을 지키고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예수의 마지막 권고에는 근심으로 빠져들 정도로 허약한 모습을 노출시키고 맙니다. 아니, 그렇다면 이 부자가 앞서 예수께 고백한 내용은 거짓이었단 말인가요?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로 이 사내는 계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애를 써왔고, 또 나름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의 이 사내에 대한 포근한 시선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늘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어쩌면 이 부분, 즉 부자가 근심하게 된 이유를 밝히는 것이 애초에 던졌던 저의 질문에 대한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어떻게 사람들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바로 그 질문 말입니다. 물론 이 질문은 다시 그 사내의 지고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대답에 의지해본다면, 영생은 계명의 내용을 힘써 지키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계명을 힘써 지키는 것에는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바로 이 부자의 경우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됩니다. 분명히 부자는 이 모든 계명을 힘써 지켰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끓어오르는 구원에의 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답변대로라면 그는 이미 영생을,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를 확보한 사람이어야 할 텐데, 오늘도 그는 구원에 대한 갈증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 외에 또 필요한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인지요? 바로 이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 오늘 우리 모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예수의 두 번째 대답을 곱씹어 보면 의외로 문제는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도록 하세요.”


예수는 이 부자에게 딱 한 가지만 부족하다고 말해줍니다. 바로 그것을 준행하면 부자는 구원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부족한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예수는 이 부족한 한 가지가 곧 ‘자신의 재산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음’이라고 지적해 줍니다. 그가 여전히 부자인 것이 부족한 바로 그 한가지라.... 이 부분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게 잘 다가오지 않습니다. 혹자는 후반 절에 “나를 따르도록 하라!”는 추종명령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건 조금 억지인 것 같습니다. 예수의 답변을 그대로 따라가자면 부자에게 부족한 딱 한 가지는 당연히 예수를 추종하지 않음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 부자는 이미 예수를 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생업을 포기하고 그처럼 선한 선생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오늘 우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의 그 한마디, 바로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또 고민합니다. 아, 역시 그런 것인가? 교회는 있는 재산을 다 팔아야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곳인가? 예수의 답변이 가지고 있는 축자적 의미가 남다른 지라 사실 많은 이들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많은 묵상과 기도 후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늘 그렇듯이 구체적인 행위 하나하나를 규정합니다. 따라서 계명의 내용은 지극히 실천적이요 구체적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체적인 행위의 실행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행위들을 규정하고 있는 ‘계명의 정신’입니다. 이 얘기는 계명의 조항을 아무리 열심히 준행한다고 하더라도 계명의 정신이 빠져있으면 그 계명에의 준행은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와 부자와의 대담이 조금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분명 이 사내는 계명의 규정을 잘 준행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계명의 정신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것을 어릴 적부터 지켜왔는데도 여전히 구원에의 갈증을 일으킬 정도로 딱 한 가지 부족한 그 무엇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지적해주고 계시는 그 딱한가지는 바로 ‘계명의 조항’이 아니라 ‘계명의 정신’입니다.


그것은 ’구원은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이라는 말로도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즉 ’공동체성에 대한 실질적인 확보‘가 구원에 이르는 전제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부자는 계명을 준수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였지만 여전히 그가 속한 세계에 그가 함께 해야 할 공동체는 없었습니다. 즉 그는 이웃 없이 홀로 계명 수행에만 열중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 없는 생활과 세계 속에 있었던 그에게 계명수행은 오히려 쉬웠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살인할, 간음할, 도둑질 할, 거짓 증언할, 손해를 끼칠 만한 이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갖춘 그는 이웃 없이도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정말 이웃에게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으며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혼자 하는 삶에 익숙한 그는 그 이외의 다른 이웃을 자신의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기가 오히려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혼자였고, 그러면서 여전히 계명을 성실히 준행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이웃이 전제되어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인데도 그는 이웃을 잃어버리고도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여전히 목마릅니다. 여전히 구원의 갈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단독자로서는 불가능한 구원의 문제를 홀로 해결하려 했기에 그는 끝없는 갈증에 허덕이게 됩니다.


“이 정도면 법 없이도 사는 나인데… 이 깊은 데서부터 솟구쳐 나오는 갈증의 정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사내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만 끝내 자신의 주변에서 사라져 버린 이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 예수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도록 하세요.”


부자인 사내가 가진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누어주라는 예수의 말씀은 실제로 자신의 전 재산을 포기하라는 내용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는 이 권면의 언어로 그에게 잊히고 있는 이웃의 모습을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일 겁니다. 이 말씀을 던지신 예수께서는 부자 사내가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바로 그것을 원하고 있는 이웃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길 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배부르면 그 누군가인 당신의 이웃도 배부르고 싶고, 당신이 배 골을 때에는 당신의 이웃 중 그 누군가도 굶주려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재물이라 여기는 것도 그 수없이 많은 관계 속에서 얻어진 것들이기에 결국 그것들은 함께 나누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유해야할 것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독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도적질 한 것과 진배없고, 결국 그러한 독점적 삶으로는 결코 영생의 길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이 사내가 잃어버린 이웃을 되찾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내는 또다시 근심으로 대답합니다. 여전히 그는 이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는 자신만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 속에 영생은 요원합니다. 영생은 여전히 수천 수만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주변의 이웃을 외면하고는 결코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생을 얻고,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이들은 바로 그 이웃들을 회복한 이들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 다양한 얼굴을 하고 스쳐 가는 모든 이들을 나와 동일한 사람으로 느끼고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자세에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여전히 우리 스스로 직접적으로 맺어진 관계에서만, 혹은 기호나 선호에 따라 조성된 편벽적 모임 속에서만 신앙을 운운한다면, 그러한 우리의 모습도 예수의 눈에는 여전히 부족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 가운데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경험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같이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한 고백의 존재로서 서로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또 그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애쓰는 공동체이기를 빕니다.


우리가 말하는 영생-구원-하나님의 나라는 이기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의 ‘특별함’과 나의 ‘편함’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수천수만의 얼굴들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나와 나의 가족만의, 혹은 나와 친한 얼굴들만 있다면 여전히 부족합니다.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이웃에 대해 가급적 최선을 다해 책임지려는 모습, 그것이 바로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부자 사내와 예수의 대화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이길용의 '말씀 안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A Time to Kill  (0) 2018.01.17
부자, 낙타, 바늘귀 그리고 천국  (1) 2018.01.03
산타가 홍포를 두른 까닭은?  (0) 2017.12.21
성탄전야의 유혈극  (0) 2017.12.16
빼앗긴 성탄절  (0) 2017.12.11
예수를 따른 다는 것  (0) 2017.12.09
posted by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