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 그리고 서지현 검사

- 어디서 구원은 올꼬?


최근 ‘미투’ 운동을 확산시키는데 기폭제가 된 서지현 검사의 지난 1월 29일 JTBC 뉴스룸에서  “가해자가 최근 종교를 통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고 한 비판은 새삼 영화 <밀양>을 떠올리게 했다.


영화 <밀양>은 절망의 끝자락에 선 한 여인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려 하는가를 보여준다. 주연 배우 전도연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래 새삼 주목받은 작품이라는 점을 빼놓고, 이 영화는 사실 영화적 재미나 흥행의 기대를 갖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이 대체로 어두운 삶을 드러내면서 관객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희망의 출구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쪽은 아니기에 영화를 보고나서도 사실 답답함을 숨기기 어렵다. 영화 <밀양>도 태양이 빛나는 하늘에서 시작해서, 쓰레기가 뒹구는 땅으로 카메라 앵글을 옮기지만, 그것이 반드시 명쾌한 돌파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적어도 기독교에 보내는 메시지만큼은 그저 지나칠 수 없다.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 밀양에 온 주인공은 그곳에서 다시 자식을 유괴당하고 자식의 죽음 앞에서 혼이 나간다. 밀양에 왔을 때만 해도 그녀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있었고, 그녀에게 교회는 (겉으로는) 전혀 다른 인생의 출구가 된다. 하지만 자식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찾아간 자리에서 편안한 얼굴로 이미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말에 그녀는 절대자에게 항거하는 존재로 뒤바껴 버린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이청춘의 소설로, 광주 학살 이후 이 시대가 과연 이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하는가라는 고뇌가 담겨 있는 글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는 그런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고 다만, 한 인간이 좌절의 극점에 서서 어떻게 다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또한 영화 <밀양>은 그런 고통에 휩싸인 존재에게 교회가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물론 구체적인 면모로 들어가자면 다소 유치하고 이해가 너무 일반적으로 편향된 바가 있긴 하지만, 영화는 교회가 고통을 겪고 있는 이의 고통 보다는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일에 더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이 점이 영화 <밀양>에서 교회가, 기독교가 직시해야 할 자신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물론, <밀양>은 보는 이에 따라 다층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교인들은 주인공의 고통과 슬픔에 동정적이다. 그러나 상대의 고난을 불행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가 하면, 그 고통의 깊이에 함께 스며들어가는 방식보다는 교회에 나오면 다 해결된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리고는 교인이 되어 변모한 모습에 열광한다. 이 세상 도처에 깔린 고통과 슬픔의 정체에 그대로 다가서기보다는, 예수를 믿으면 그런 고통과는 결별하게 되고 그저 행복한 감정에 푹 빠지게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교인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상대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상대가 교회를 나오든 아니 나오든 관계없이 같이 있어주려는 마음이 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영화는 그러나 이보다는, 교인 하나가 생겨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교회의 실상을 드러낸다. 이러한 영화적 서술은 사실과 백 퍼센트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기에는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도 냉랭해졌다.


교인의 수를 늘리는 총동원 체제가 여전히 가동하고 있고, 그 안에서 각종 프로그램으로 정신없이 밀어붙이는 현실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는 현실과 발을 붙이며 함께 가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아니라, 천상의 조직이 되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그 천상의 조직에 속한 장로는 여인의 유혹에 위선의 가면을 쉽게 벗어버린다. 이 장면은 논란거리가 확산될 조짐이 있다는 점에서 적당히 타협해버린 인상을 주지만 어쨌든 간에 영화 <밀양>에서 우리는 인간의 고통 그 내면에 진실하게 자신의 몸과 영혼을 스며들게 하는 존재는 목격하지 못한다.


도리어 어찌 보면 껄렁패처럼 여겨지는 카센터 주인이 주인공의 아픔에 동참한다. 물론 그 여인에 대한 사랑이 이러한 상황을 주도하지만, 교회는 이 사나이가 보이는 사랑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해력과 감성으로 고통의 문제를 대면하고 있다. 그러니 결국, 자식의 유괴와 살해라는 충격적인 사태 앞에서 교회는 아무런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슬금슬금 눈치나 보면서 뒤로 물러나고 만다.


정신 요양원에서 나온 주인공이 머리를 자르러 갔다가 미장원에서 만난 미용사, 그러니까 유괴범의 딸과 만나는 장면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긴 하다. 주인공이 이 유괴범의 딸을 만났을 때 그렇게 독기를 품고 뛰쳐나오게 하기보다는, 그 딸도 소년원에서 나와 기술을 배우고 생존의 현장에 서 있다는 사실은 아픔의 공유가 최소한 가능한 대목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영화 <밀양>은 영어 제목이 Secret Sunshine으로 되어 있다. ‘밀양’ 의 한자풀이로는 ‘빽빽한 볕’이라고 할까. 어느 쪽이든, 햇빛이 스며들지 않는 어두운 인생과 대조되는 역설적 반어법으로 다가온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는 자신의 출발점을 다시 점검해봐야 할 필요성 앞에 직면한다. 천상의 조직이 아닌, 지상의 공동체로서, 그리고 가장 아프고 험난한 삶의 자리에서 교회는 자기가 서 있어야 할 곳을 찾는 깨우침이 있어야 한다.


상처 받아 신음하고 있는 자를 위해 얼마나 위로와 치유의 능력이 있는지, 절망의 나락에 빠진 이에게 뜨겁고도 실질적인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앞을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빛이 되는 지혜를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인지, 미움과 대결의 현실에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로서 여러 가지 비평과 함께 아쉬운 점을 지적하기는 쉬우나, 오늘날 교회가 고난에 처한 이에게 비밀스러운 햇볕으로 다가가 그 인생에 빽빽한 광명을 채우는 힘을 갖지 못하면 영화 <밀양>의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영화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 되풀이 되는 슬픔이다. 교회는 그 자신이 곧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햇볕 또는 빽빽한 빛, “밀양(密陽)”이 되어야 한다는 걸 망각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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