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말씀 안으로(9)


예수는 먹보요, 술꾼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태복음 11:18-19)


오래된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때는 저의 대학원 시절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그때 조교장이던 한 선배의 물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학기 초가 되면 조교장이 있는 방에서 새로운 학기를 준비하는 전체 조교 회의가 열립니다. 당시 막 대학원생이 된 저는 처음으로 학과 조교를 맡게 되었고, 당연히 조교장이 있던 연구실에 처음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조교 연구실은 5~6명 정도가 함께 사용하는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때 선배의 책상 앞에 걸려있던 예수님 초상화가 제 눈에 빨릴 듯 밀려들어왔습니다.


선배의 책상 앞 예수의 초상화는 제가 보아오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양이었습니다. 그림 속의 예수는 아끼던 송아지를 후한 값에 팔아넘기고 시원한 음료 한 잔 걸친 시골 아저씨처럼 호탕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다짜고짜 저는 선배에게 그림의 진원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선배가 말하기를, 그 예수님 초상화는 미술을 전공하는 동생이 연필로 그려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뒤늦게 신학을 시작하는 자신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 선배의 자리를 노려보고 있던 그 호탕한 예수의 모습은 제 뇌리에 강하게 자리 잡았고, 기존 예수의 대한 저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림이 제게 준 충격은 작지 않았습니다. 신자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 그림을 보기 전까지 제가 품고 있던 예수의 이미지는 언제나 근엄했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교양을 갖추신 분이고, 머리에는 언제나 빛나는 아우라가 자리하고 있어 뭍 시장잡배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분이며, 얼굴에는 모나리자의 뺨을 때릴 정도의 은은한 미소가 가득하며, 또한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인류를 향한 고귀한 슬픔마저 마다치 않는 납덩어리처럼 무겁고 쓸쓸한 모습의 사나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선배의 앞자리에 걸려있던 예수의 초상은 그런 기존 이미지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림 속 예수는 버스 정류장에서도 쉽게 만나는, 골목길 어귀에서 늘 마주치는, 공원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우리 이웃의 얼굴이었습니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회색빛 가득한 쉽게 범접하기 곤란한 심각한 분이 아니라, 언제나 쉽게 그리고 가벼이 스치듯 만날 수 있는 예수의 얼굴이 그 그림 속에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집으로 돌아와 복음서를 뒤적이며 그 안에 그려지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열심히 훑어보았습니다. 그러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의 한 구절 속에 너무도 생생한 그분의 얼굴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분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경건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언제나 예수의 주변엔 죄인이라 불리던 세리와 거리의 여인들이 끊이지 않았고, 또한 세례자 요한처럼 정기적으로 금식하기는커녕 신랑과 함께 있는 자의 즐거움으로 포도주와 음식을 즐겼던 바로 그 분, 예수를 복음서 기자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분의 타고난 질박한 심성은 언제나 주변에 아이들이 끊이질 않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소박하고 맑은 심성을 지닌 이들을 좋아합니다. 언제나 그늘진 모습으로 얼굴에 쌍 십자를 그리고 있는 이들에게 좀 채 아이들은 마음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은 저마다 한 목소리로 자신의 자녀에게 축복을 빌어주길 원하여 아이들을 예수에게로 데려오던 부모들의 극성을 절대로 막지 않았던 예수의 너그러움을 적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몰려드는 것을 싫어하기는커녕, 그들을 막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시는 그의 다정함을 성서는 증언합니다.


또한 그분은 유머와 재치가 넘쳐나던 분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에서 넘쳐흐르는 수많은 예화를 생각해 봅시다. 마치 시인처럼, 때론 연인처럼 그분은 수채화를 그리는 화가의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을 웃기고 또 울렸습니다.


세리와 죄인들 앞에서 그는 일장의 연설을 토해냅니다. 100마리의 양 중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때문에 고민하는 목자, 헌데 얼마 못가 그 잃은 양을 찾고 감격하는 기쁨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은화를 다시 찾고 행복해 하는 한 부인네의 심정을, 그리고 잃은 아들을 찾은 후 손가락의 가락지를 빼어 그의 손에 끼우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아버지의 모습을 비유로 던지시는 그 분의 감각!(누가복음 15:1-32)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의 처벌을 원하는 사람들의 험상궂은 원성을 앞에 두고도 몸을 굽혀 땅위에 천연덕스럽게 낙서를 하시는 그분의 여유! 그 밖에도 많은 곳에서 그는 웃고 마시고 즐길 줄 아는 여유 있는 사람의 얼굴로 우리 앞, 뒤, 옆에 와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어떤 예수의 이미지를 전해주건 간에 우리는 또 여전히 그늘진 예수를 고집하려 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들의 고집스러운 성향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 봅니다.


우리의 고정된 신앙관 속에 형성된 선입견이 오히려 생생한 예수의 모습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의 웃음 가득했던 즐거운 모습은 뒤로 한 채 오로지 ‘그에 대한 우리의 포장’만이 남아 납덩이처럼 무거운 그분의 겉모습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쩌면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모습이 사실 그렇기도 합니다.


저의 신학교 생활은 이러한 기억들의 확인으로 연속되었습니다. 신학교에 갓 들어온 신입생들은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갓 스물을 넘긴 풋풋한 청년들입니다. 그러나 신학교의 분위기가 그런 것인지, 혹은 교회에서 제공하는 신앙의 모범이 그러한 것인지… 너나 할 것 없이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사람들은 이내 목사가 되고 맙니다. 깔끔한 짙은 색 계통의 양복에 반짝이는 구두에 화려한 넥타이로 온 몸을 치장하고, 이미 음성은 하늘의 목소리인양 저음만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리고 사용하는 언어도 시정잡배들은 감히 다다를 수 없는 수준으로 ‘형제님, 자매님’을 연신 되 내이며 틀에 박힌 일정한 멜로디 섞인 음정으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신학교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일반 교회에서도 이와 동일한 모습은 비일비재합니다. 물론 저는 이 자리에서 그 분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폐지를 요청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형의 모습과 행위에만 집중되는 우리의 자세는 고쳐야 하지 않을까 반문하고는 있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정직한 고백에 기초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언어도, 어떤 행위도 그 정직한 고백 위에 서지 못하면 맹목적일 따름입니다. 저는 단지 근거를 알 수 없는 어설픈 선입관이 우리가 예수의 참된 모습을 읽는데 장애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상대방 군인의 부상당한 귀까지 치유해주는 넉넉한 분이셨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의 고민을 들으시고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심성을 어루만져 위로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위로는 가식 없는 순수한 이해에서 비롯되었지, 정형화된 행위의 형식이 제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우리에게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유와 평강은 하나님을 향한 굳은 신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최후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의지하는 그분의 곧고 분명한 신앙이 그분으로 하여금 자유와 평강의 설교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어설픈 형식이 아니라, 그분의 철저한 ‘하나님 신앙’이며 또한 ‘자유와 평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고난절입니다.


우리는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받으시던 그분의 신음소리를 흉내 낼 것입니다. 때로 몇몇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의 손에 못을 박으며 그분이 걸어가셨던 길을 닮은 언덕길을 잘 가꾸어진 나무를 쪼개어 만든 십자가를 지고 오를 것입니다. 때로는 노래로 구슬프게 그분의 고난을 설명할 것입니다. 혹자는 두툼한 헌금봉투로 나를 위하여 받으신 그분의 아픔에 감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또 우리는 열심히 전혀 그분이 아닌 그분, 우리의 습관과 선입관 속에서만 살고 있는 그분의 이미지 만들기에 급급할 것입니다. 그래서 또 편짜기와 편 가르기에 열중하며, 신앙이 좋고, 나쁘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그러네 하며 ‘예수의 포용’과는 정반대의 길을 열심히 달려갈 것입니다.


또 다시 고난의 절기입니다.


우리는 또 예수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짐짓 슬픔의 얼굴을 하고 사정없이 가슴 아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굳게 다시 한 번 동여매는 넥타이 속에 예수께서 함께 해주시기를 기도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타인과 같지 않고 오늘도 정해진 언어와 행위 속에 자신을 지켜 가는 멋진 솜씨에 감복할 것입니다. 짐짓 금식도 필요할 것입니다. 때로는 신중한 자세로 옷깃을 여미며 분위기 있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시 수난의 절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의 수난만을 고집한 채 그분이 우리에게 남긴 웃음의 의미를 잊어버려서도 안 됩니다. 고난 바로 뒤에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겼던 그분 예수의 유쾌한 모습 또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과도 같은 세상에 끈질긴 유머와 유쾌함으로 지친 세상의 영혼들을 위로한 ‘먹기를 탐하던 예수’가 당한 수난이 바로 고난절입니다.


유대인은 고난의 예수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가 초지일관 고난과 수난의 상징으로 그들 옆에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예수를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설사 경건의 극치를 달렸더라도 그들은 예수를 또 처단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사도 요한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요한을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 귀신이 들렸다 하면서 그를 처단했습니다. 이를 마태는 장터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곡조에 따라 춤추고 울어대는 아이들을 비유 삼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진중함 없이, 신중치 않게 그저 주변 환경의 변화와 옆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반성 없이 따라가는 사람들이 결국 요한과 예수님을 내치고 말았습니다. 앞에 서신 분의 참 모습을 살피며 따라가려하기 보다는 기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선입견에 끼워 맞춰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일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겉에만 충실하고 속에는 무감한 이들. 예수님의 참 모습보다는 포장되고 각색된 이미지에만 충실한 우리들의 모습도 저들 유대인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진지함도 받아내지 못하던 이들이 예수님의 유쾌함을 감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먹기를 탐하며 포도주를 즐기던 분이었고 그들이 생각하던 ‘경건’과는 너무도 큰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예수를 포기합니다.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예수를 처단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위한 구세주를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며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외치는 사이비 하나를 처단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만의 고집과 선입견 속에 구축한 신앙관에 의해 처단한 그분, 먹기를 탐하던 예수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을 줄이야!


또 다시 고난의 날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도 고정된 우리의 선입관으로 또 다시 예수를 다시 십자가, 고난의 길로 몰아세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또 다시 고난절입니다. 유쾌했던 예수의 참 의미가 우리 가슴에 진득이 묻어나길 기원합니다. 단지 고난만 남고 그의 오신 참 뜻은 실종되는 수난절이 아니라, 주께서 왜 우리와 함께 계셨고, 무엇을 위해 우리 곁에 계셨고,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의 모든 것을 내 몸과 심장 안에 새겨보는 속 찬 고난의 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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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7)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8 이 향유는 나의 눈물입니다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그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에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복음서 본문에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여인의 반응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피칸더와 바흐는 이 부분에 알토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그 여인의 마음을 남깁니다. 알토 솔로의 서창은 코멘트 역할을 하고 있고 이어지는 아리아는 ‘기도’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시인과 작곡가가 이루어낸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콜라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향유는 나의 눈물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레치타티보의 첫 부분 가사를 통해 예수와의 ‘Ich und du’의 관계를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이 레치타티보 가사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So lasse mir inzwischen zu,

Von meiner Augen Tränenflüssen

Ein Wasser auf dein Haupt zu gießen.


부디 나에게 허락하소서

나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당신의 머리에 뿌리게 하소서.


이 가사를 처음 본 순간 저는 완전 무방비상태에서 충격을 받고 왈칵 눈물을 쏟고야 말았습니다. 딱딱할 줄로만 알았던 바흐의 교회음악에 이토록 깊은 감성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인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인격적이고 감성적이고 표현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여인과 예수의 사랑의 관계를 몰랐기에 이 여인의 행위를 물질적으로만 해석했습니다. 우리들 역시 제자들처럼 여인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이니 뭐니 하면서 이 여인이 깨뜨린 향유를 돈으로 계산하지 않았던가요? 아니면 은근히 헌금을 독려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여인의 이야기를 사용하지 않았던가요? 이 여인의 향유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발단된 회개가 마음을 찢을 때 흘러내린 진심어린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뿌려 준 향유였고, 자신을 친구로 대해 주었던 단 한 사람 예수를 위해 모든 계산을 뛰어 넘어 내어준 사랑의 보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준 그 분의 사랑의 향기로 남기에 합당한 고귀한 희생이었습니다.


That’s why


문득, 자주 부르던 복음성가 한 자락이 떠오릅니다. ‘You gave me Love’라는 곡으로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라는 영화음악으로 유명한 미국의 팝 가수 B. J. Thomas의 곡입니다. 대중적 인기의 허무함을 느낀 그가 예수를 친구로 만난 은혜를 노래한 곡이지요. 이 베다니 여인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You gave me time when no one gave me time of day

당신은 내게 시간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 아무도 내게 시간을 주지 않을 때에


You looked deep inside while the rest of the world looked away

당신은 내 마음 깊은 곳을 보셨습니다 다른 이들이 나를 외면했을 때에


You smiled at me when there were just frowns everywhere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어주셨습니다 모든 이가 나를 행해 얼굴을 찡그릴 때에


You gave me love when nobody gave me a prayer

당신은 내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날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에


That's why I call You Saviour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신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That's why I call You Friend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You touched my heart

당신은 내 마음을 만지셨고


You touched my soul

당신은 내 영혼을 만지셨습니다


And helped me start all over again

그리곤 내가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셨죠


That's why I love You, Jesus

그것이 바로 내가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That's why I'll always care

그것이 바로 내가 항상 간직하는 이유입니다


You gave me love when nobody gave me a prayer

당신은 내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날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에


플롯이 흘리는 눈물방울 소리


이어지는 아리아는 두 대의 플롯이 시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바흐는 왜 이 아리아에서 플롯을 사용했을까요? 그 비밀은 가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아리아의 가사를 함께 보시겠습니다.


마태수난곡 1부 6번

6

기도

알토

아리아

Buß und Reu

Knirscht das Sündenherz entzwei,

Daß die Tropfen meiner Zähren

Angenehme Spezerei,

Treuer Jesu, dir gebären.

참회와 후회의 마음이

죄지은 이 마음을 짓이기고 찢을 때

그렇게 떨어진 나의 눈물방울이 고여

향기로운 향유가 되었습니다.

오 신실하신 예수여, 당신께 드립니다.


그 날, 베다니 시몬의 집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전주가 흐릅니다. 아름다움과 슬픔과 거룩함이 혼재된 그 방의 공기가 아리아의 전주에 스며있는 듯합니다. 노래 중간 부분에서 ‘그렇게 떨어진 나의 눈물방울이 고여 향기로운 향유가 되었습니다/Daß die Tropfen meiner Zähren Angenehme Spezerei,’라고 노래하는 부분의 기악파트를 유심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시인의 놀라운 영감에 바흐가 더 놀라운 음악적 영감으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두 대의 플롯이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향유와 여인의 눈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 마태수난곡 악보에는 이 페이지 위편에 ‘아, 지고한 아름다움이여!’라는 메모가 적혀 있습니다.


알토아리아 악보 중 ‘나의 눈물방울이 고여 향기로운 향유가 되었습니다‘라고 노래하는 부분. 맨 위 스타카토로 표현된 부분이 플롯 파트임.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이 부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분과의 인격적인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태수난곡을 재생시켜야 할 음악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노래의 멜로디가 아름답기 때문에 텍스트와의 조화를 생각하지 못하고 이 곡을 매우 빠른 템포로 끌고 갑니다. 성악가 입장에서도 이곡은 빠른 템포가 노래하기 좋습니다. 그러나 이 곡의 핵심은 눈물방울이 한 방울 씩 떨어지는 플롯 파트입니다. 예수와 이 여인만이 알고 있는 사랑과 용서와 은혜의 관계 속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함과 그 여인의 진지함과 아름다운 사랑의 동작에 압도되어 얼어 버린 제자들이 만들어 낸 적막 속에서 귀한 향유가, 회개의 눈물이 예수의 머리 위로 한 방울 한 방울 똑 똑 떨어집니다. 이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템포를 매우 늦게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표현한 것은 칼리히터의 58년 음반뿐입니다. 지휘자 칼 리히터가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이며 영적 메신저였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래에 소개해 드리는 카운터 테너 안드레아스 숄의 노래는 원전연주로서 이 곡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연주입니다. 원전 연주에서는 바흐시대의 전통을 따라 여성 알토 대신 남성 카운터 테너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아래에 링크한 칼 리히터의 58년 음반과 비교해서 들어보시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https://youtu.be/y5Xuc_Q4IW4 (안드레아스 숄이 노래하는 ‘Buß und Reu’)

https://youtu.be/8y6x1wj0bxM (칼리히터의 58년 음반, 17분27초에 시작)


첫 목회지에서 헌금 봉투를 만들어야 했을 때 마태수난곡의 이 구절을 빌렸습니다. 재생지로 만든 봉투였는데 그 앞면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이 향유는 나의 눈물 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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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6)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7 예수를 위한 대명사


지난 2월 14일, 재의 수요일 부터 2018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몇 년 뒤에 끝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매 년 사순절 기간 동안 마태수난곡 순례를 계속해서 연재 하도록 하겠습니다. 몇몇 분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조용히 따라 걸으며 마태수난곡을 묵상하려는 마음으로 이 연재를 시작했는데 올해에는 다소 갑작스레 평화교회연구소의 요청으로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40일간의 영적순례’라는 작은 사순절 묵상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40일 동안 마태수난곡 전 곡을 QR코드를 통해 들으며 묵상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나누는 것만큼의 이야기를 이 작은 묵상집에 다 담을 수는 없었지만 이 책을 통해서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마태수난곡의 전 곡을 만나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순례를 위한 작은 가이드북으로 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순례의 길로


그럼, 계속해서 순례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만나게 될 곡은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향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오늘은 이에 대한 코멘트 레치타티보를 만나보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설명 드렸듯이 마태수난곡은 내러티브, 대사, 코멘트, 기도라는 네 명의 화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며 오늘의 코멘트 레치타티보를 부르는 성부는 알토입니다.


알토의 목소리


여성 목소리의 저성부인 알토는 모성과 슬픔과 공감과 눈물을 상징합니다. 일반적인 오페라나 오라토리오에서 소프라노가 여성성과 기쁨과 사랑과 미소를 상징하고 테너가 열정을, 베이스가 남성다움과 진중함을 표한 것처럼 마태수난곡에서도 각 성부의 음색은 고유한 표현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녀에 대해 ‘한 여자’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인지 비슷한 별개의 사건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누가복음 7장 37절은 ‘그 동네에 사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좀 더 상세하게 그녀를 설명하고 있는데 사회적 약자로서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왔고 인간으로서 죄를 지으며 살 수 밖에 없었던 이 여인의 장면에 어울리는 목소리는 알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화자를 이 베다니 여인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노래를 부르는 이는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마태수난곡에서의 각 성부의 음색은 우리 안에 있는 감성적 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가사를 살펴보시겠습니다.


마태수난곡 1부 5번

5

코멘트

레치타티보

알토

Du lieber Heiland du,

Wenn deine Jünger töricht streiten,

Daß dieses fromme Weib

Mit Salben deinen Leib

Zum Grabe will bereiten,

So lasse mir inzwischen zu,

Von meiner Augen Tränenflüssen

Ein Wasser auf dein Haupt zu gießen.

사랑하는 구주여

당신의 제자들은 어리석게도

이 고귀한 여인이 향유를 가지고

당신 몸의 장례를 준비한 것을 막았지만

부디 제게는 허락하소서.

나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눈물방울들을

당신의 머리에 뿌리게 하소서.



‘du’의 시적의미와 관계적 의미


레치타티보의 시작 부분에서 노래하는 이는 예수를 ‘Du lieber Heiland du/사랑하는 구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시적 화자와 예수가 이미 구원을 통한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지요. 문자적인 우리말로는 이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습니다만 독일어 가사에는 ‘너/당신’에 해당하는 의미인 ‘du'가 두 번 반복됩니다. 이는 시적으로나 관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먼저, 시적인 면에서 화자는 ‘du’를 두 번 강조하여 표현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 나의 구원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 예수뿐이라는 표현이지요.


관계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예수를 대명사 ‘du’를 사용하여 칭했다는 것이 의미가 깊습니다. 영어에서는 2인칭 대명사가 ‘you’하나 뿐이지만 독일어에서는 우리말의 ‘너’와 ‘당신’의 차이처럼 2인칭 대명사로 ‘du/두’와 경어 ‘Sie/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노래 알토의 코멘트에서는 예수님께 경어체인 ‘Sie’ 대신 ‘du’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참으로 낯선 풍경입니다. 하지만 ‘du’라고 해서 우리말과 같은 반말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du’는 친근함의 표현, 관계가 맺어진 사이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어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면 ‘du'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사회의 권위주의와 그로 인한 경직성은 엄격한 존댓말 때문에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직위에 상관없이 서로를 닉네임이나 영어이름으로 편안하게 부르면서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회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 신앙의 맥락이 아님에도 예수라는 이름 뒤에 ‘님’을 붙이지 않았다며 시비를 거는 분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공경하여 높이기 위한 그 분들의 신앙과 정성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럴 때면 굳이 그분들을 설득하거나 항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 뒤에 무조건 ‘님’을 붙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예수와의 친밀함의 관계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간만큼은 이 부분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합니다. 실재로 ‘님’자에 집착하는 분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권위적인 모습을 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님’자에 대한 집착이 단지 ‘예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기독교의 가장 특별하고도 경탄스러운 부분은 신이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로 내려왔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신과 대결을 하든, 불교처럼 자기 수행을 통해서든, 무속신앙처럼 무엇을 바치거나 간절한 기도를 하든 이러한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인간이 신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노력 없이, 오직 은혜로 신이 인간을 향에 먼저 내려온 종교는 기독교 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과 인간이 이토록 가깝게 연결된 종교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 놀라운 사실을 믿고 영접하면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십자가의 수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과 육신의 고통, 배신, 홀로됨, 인간으로서 인간이 받아야할 극도의 고난을 주님께서는 다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헨리 나우엔의 표현대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기 위함이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친구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여러분과 공통분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 공통분모를 통한 공감이 우정으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부사이 보다 더 비밀이 없는 관계가 친구사이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말구유에 오신 이유도,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도, 부활하신 이유도 우리에게로 내려 오사 우리 안에 거하시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고 본디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기독교는 원래 이처럼 세상의 생각을 뒤집어 하나님의 뜻을 펼쳐내는 품격 있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창 18:17)과 모세(출 33:11)를 친구처럼 대하셨듯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도 그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시기 위해 먼저 우리와 친구 되어주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


시편 25편 14절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유진피터슨은 이 구절을 ‘God-friendship is for God-worshipers’ 라고 읽었습니다. ‘프렌드쉽/friendship’은 말 그대로 ‘우정’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정서상 ‘하나님과의 우정이 그를 예배하는 사람에게 있음이여‘라고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어 이름으로는 상사를 편하게 부를 수 있는데 한국 이름에는 그 뒤에 직함과 ‘님’자를 꼭 붙여야 하듯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프랜드쉽’은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도무지 깨닫기 힘들어하는 이 관계를 우리는 알고 체험해야합니다.


마르틴 부버는 그 유명한 ‘나와 너/Ich und du’라는 짧은 책을 통해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와 ‘나와 너/ich und du’라는 인격적인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부버는 ’만남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고 이야기했지요.


부버의 방식으로 생각 해 보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인지는 모르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이는 예수를 만났고 그 만남과 이어지는 만남의 연속을 통해 그와 ’나와 너/ich un du'의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의 시작에서 ‘Du lieber Heiland du’라고 ‘du’를 두 번 강조하여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님’이라는 글자에 집착하다보면 예수와의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저 멀리 있는 신’과 ‘하찮은 피조물’과의 관계인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이 베다니 여인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이 곡의 다음 장면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를 부를 때 ‘랍비’라고 부릅니다. 유다는 끝까지 예수를 ‘du'로 만나지 못했고 ‘es'로 대했던 것입니다. 유다의 잘못은 여기에서 시작했습니다. 예수와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와 어떤 관계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면 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만남이고 관계입니다. 예수는 여러분에게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인생과 삶을 위한 ‘es'입니까? 아니면 아직 친밀함의 관계에 이르지 못한 ‘Sie’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du’로 만나고 그렇게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조건 때문에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 친밀함의 관계를 맺어 나가야합니다. 'es'도 아니고 ‘Sie'도 아닌 ’du'로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만남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사실, 그 만남은 예수께서 먼저 다가오심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성육신 사건과 그 분의 말씀과 삶, 그리고 죽음의 과정까지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와 ‘ich und du'의 관계를 맺기 위한 선제적인 다가오심이었습니다. 이 수난곡 속에서 예수께서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를 친구, ‘du’로 만나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앞서 우정에 관해 말씀드렸듯이 당신과의 친밀함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시기 위해 예수는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것을 다 겪으셨던 것입니다.


‘고귀한 여인/fromme Weib’


이 레치타티보에서 한 가지 더 살펴 볼 것은 노래하는 이가 이 여인을 ‘고귀한 여인/fromme Weib’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7장 37절은 이 여인을 ‘그 동네에 사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마태수난곡에서는 ‘고귀한 여인’이 되어 있습니다. 죄 많은 한 여인을 고귀한 여인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기독교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는 예수를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로 만나 그것을 ‘프렌드쉽/friendship’이라 하건 ‘우정’이라 하건 ‘친밀함’이라 하건 간에 그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머무르면서 어떤 비밀도 서로 없는 대화를 나누고 공감대를 나누는 가운데 현실로 펼쳐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거하는 상태 말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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