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은 우리 둘을 무슨 관계로 볼까?” 


1968년에 결혼한 후 50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우리 부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둘만 있어도 깔깔대며 잘 웃는다. 우리 부부의 웃음 묻은 이야기를 가끔씩 이야기하면 재미있다고 글로 써서 책을 내라는 사람도 있고 나를 오랜만에 만난 사람은 그동안 『민영진 어록』을 발표하라고 한다. 이것이 언제 책이 출간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우리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어 독자 여러분에게 웃음을 드리고 싶다. 우리의 이런 꾸밈없는 적나라한 이야기들이 흠이 될지 욕이 될지도 모를 것 같아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나의 삶이요 나의 사랑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냥 웃음을 선사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44년생이고 그이는 40년생이니 나는 그이보다 네 살이나 더 어리다. 결혼 후, 첫 새해를 맞아 남편은 갓 결혼한 새댁을 어른들께 인사시키고 싶었나보다. 어른들께 세배를 간다기에 치마저고리에 두루마기까지 차려 입고 거기에 걸맞도록 머리를 위로 올리는 업스타일을 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자가용이 없어서 택시를 타고 다녔다. 그이는 동안이고 날씬해서 어리게 보였고 나는 살이 통통(?)해서인지 더 늙게 보였나 보다. 택시기사가 나보고 누나냐고 묻는 게 아닌가! 난 너무 당황하고 화나고 기분이 안 좋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에게 내가 간 빼 놓고 살아서 아마 늙어졌나보다며 이제부터는 당신이 간 빼 놓고 살라고 명령(?) 하였다. 그랬더니 그이 하는 말 “지금 누나 정도면 괜찮은 거지, 우리가 이 다음에 더 늙게 되면 제자들이 와서 “민 선생님, 어머님이 꽤 젊으시네요.” 할 때가 올 거란다. 그 후 20년이 지난 후부터 그이의 머리에는 은가루가 해를 더해갈수록 자꾸 자꾸 많이 뿌려진다. 난 너무 신이 나서 박수를 치며 절대 염색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당신은 머리가 희어갈수록 멋도 더해진다고 아주 근사하다고 속삭여준다. 바로 로맨스 그레이 그 자체라고.


그이는 한복 입기를 즐겨 해서 신정이면 두 주간을 거의 한복을 입는다. 교회 갈 때도 마찬가지고, 어느 주일날 그이가 한복을 입으니 나도 한복을 입었다. 예배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렇게 힘들게 한복 입었는데 그냥 집으로 가기는 아까우니 근사한데 가서 커피라도 마시자고 했다. 우리는 어느 고급 호텔의 커피숍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여기저기 사방을 보니 선보는 팀들이 많았다. 수상한 관계의 남녀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이에게 “다른 사람들은 우리 둘을 무슨 관계로 볼까?” 하고 물었다. 그이의 말 “목사와 여신도 사이로 보겠지.”


《지구별에서 노닐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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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의 느티나무처럼


대만신학자 송천성은 어머니를 가리켜 ‘하나님의 공동 창조자’라 말했다. 생명을 낳아 기르는 행위의 소중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날이 갈수록 그 말이 실감난다. 현대문명은 끝없이 욕망을 부추기고, 그 욕망의 폐쇄회로에 갇힌 이들은, 기쁨을 누릴 줄 모른다. 이웃은 신이 보내주신 선물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경쟁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합리성과 효율이 최상의 가치로 대접받는 세상에서 삶은 부박하고 공허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마음 내려놓을 곳을 몰라 방황한다. 고향 상실, 안식 없음이 지금 우리 삶의 실상이다. 괴테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한다”고 말했다. 여성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여성적인 것이 대체 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긴 하지만, 생명에 대한 감수성과 관계 지향적인 공감능력을 가리킨다는 말로 이해한다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시절 여성들은 주체로 살기보다는 남성 중심 사회의 객체처럼 살아왔다. <씨알의 소리> 1978년 5월호에 실린 함석헌 선생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제목은 “나야 뭐“였다. 함 선생은 아내 황득순의 죽음을 알리면서 그의 삶을 ‘나야 뭐’라는 말로 요약했다. “먹을거나, 입을거나, 뭣에서나, 자기는 늘 빼놓으면서 늘 하는 말의 첫 머리가 ‘나야 뭐……’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여인들의 삶이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를 지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삶 말이다. 지금은 세월이 달라졌다. 여성들은 더 이상 객체의 자리에 머물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그런데 주체가 된다는 것이 곧 외로운 단자로 살아간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주체는 다른 이들과의 창조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연한 존재가 아니던가.



김명현 선생님은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주체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공부한 신학을 자양분 삼아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지속해왔다. 교회갱신을 위한 헌신, 여성들의 권익과 지도력 개발을 위한 활동에서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긴장을 해소시키는 건강한 유머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가정생활을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가정생활이야말로 바깥에서의 활동을 가능케 한 생명의 묘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속성을 돌봄, 존경, 지식, 책임이라 했다. 김명현 선생님은 그러한 사랑의 좋은 예이다. 가끔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표정과 말 속에 배어있는 남편에 대한 아낌없는 신뢰와 사랑은 곁에 있는 이들을 가만히 미소 짓게 만든다. 부부는 서로 돕는 배필이어야 한다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분들이다. 두 아들에 대한 존중과 신뢰, 그리고 손자 손녀들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은 실답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며 사는 것은 어쩌면 이 가없는 사랑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어제도 오늘도 마을 어귀를 지키며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맞아주는 품 넓은 느티나무를 닮아가고 있다.


민영진 박사님과 함께 걸어온 50년의 세월을 회고하고 또 경축하기 위해 마련한 이 글 모음집에는 배꼽 빠지게 만드는 웃음, 아련한 아픔, 그리움,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가 넘실거린다. 글을 읽어 나가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비근한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장엄한 명분을 붙드는 것보다 거룩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께서도 일상의 일들 속에서 깃든 하늘나라의 광휘에 주목하시지 않았던가. 코헬렛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그렇다,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이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전도서 5:18).


우리의 영원한 중심이신 그분의 마음에 당도하기까지 몸 성히, 마음 성히, 잘 지내시기를 빌고 또 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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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다시 한 번 사람의 몸을 입고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1978년 서울 냉천동 감신대에 입학하여 신학의 걸음마를 배울 무렵, 저는 선생님께 구약을 배웠습니다. 과목의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몇 과목이나 되었는지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저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선생님께 배운 가장 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목회의 길을 걸으며 내내 마음에 두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수도원을 연상시킬 만큼 강의실 분위기는 진지했는데, 말씀 한 구절을 읽는 모습을 통해서도 말씀을 허투루가 아니라 공손하게 대하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을 대하는 가장 마땅한 자세가 경외심이라는 것을 저는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얼마 전 이야기입니다.

두어 해 전 감신대 동기들이 선생님 내외분을 모시고 남해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학생들의 머리에도 서리가 내려앉았지만, 그날은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과 다를 것이 없었지요. 그날 우리는 밤이 늦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살아갈수록 모르겠는 것과 마음을 지치게 하는 것들이 늘어나는데 딱히 물어볼 만한 분이 궁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진솔한 대답을 들려주셨고요. 경청과 진솔함이 가장 좋은 대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덤처럼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마감하며 드렸던 마지막 질문은 “그동안 가장 이기기 힘들었던 시험은 어떤 것이었나요?”였습니다. 선생님은 잠깐의 생각 끝에 대답을 하셨지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야기는 너무도 뜻밖이었습니다. “내가 가르치거나 전하는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인지, 지금도 고민을 합니다.” 세 번이라 하셨던가요, 말씀을 전하러 갔다가 쫓겨난 적이 ‘겨우’ ‘세 번밖에 없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와락 웃었지만 제게는 너무나도 큰 찔림이었습니다. 얍복 나루에서 동이 틀 때까지 천사와 씨름을 했던 야곱처럼 평생 말씀을 붙들고 씨름을 하셨구나, 나도 모르게 선생님의 어깨에 눈길이 갔습니다.



오늘 이야기입니다.

선생님이 쓴 시를 읽습니다. 식물과 곤충과 동물, 온갖 나물과 야생화, 나무와 물과 공기, 심지어는 방사능까지, 그 모든 것을 향해 건네는 언어의 수화(手話)를 지나, 가족들에게 전하는 사랑의 인사와 축원을 지나, 마침내 <초상(肖像)>에 이르렀을 때, 저의 글 읽기는 점점 더뎌지다가 굳어지다가 마침내는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텅 빈 여물통과 가득 찬 여물통’의 만남을 ‘즐거운 해후’(邂逅)(<범일동 아이>)라 했지만, 그 기가 막힌 역설에도 차마 웃을 수는 없었습니다. 피난 시절 먹을 것을 찾아 취사장 구정물이 쏟아지는 수챗구멍을 뒤지던 하얄리아 캠프, 기차에서 뛰어내릴 때를 놓쳐 결국은 군수품 도둑이 되고, 어쩔 수 없이 경험해야 했던 통역을 동반한 문초, 그 때 그 일을 성서 번역자로서의 첫 걸음으로 인식하는 모습 앞에서 말씀을 모시는 근원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 땅의 숱한 아픔과 상처와 모순을 말씀으로 품어 오신 이유를 짐작하게 됩니다. 마침내 그 마음은 말씀의 오지를 향하게 되고, 한국의 영진(泳珍)은 라오스의 영진(永珍), ‘아잔 비엔티나’(Mr. Vientiane)란 빛나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영진>).


‘무덤에서 돋는 연한 풀을 뜯어먹으려고 아무데나 주둥이를 박는’ ‘입이 말은 못해도 포식 기능은 완성한’ 눈 먼 짐승과 다를 것이 없는 <풀 뜯는 설교자>는 영락없는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 손사래를 치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아픈 초상이었습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직시하며 한 자 한 자 적는 설교가 얼마나 웅숭깊고 향기로울까 싶은데도 밀려오는 메시지를 도저히 언어로 바꾸지를 못한다며 ‘내 설교는 늘 모국어를 배반한다’(<날 건드리더라>)고 고백할 때, ‘스스로 실성하여 침묵한 덕분에 운 좋게도 도살만은 피한’(<볼모>) 제물(祭物)로 스스로를 자책할 때,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를 한 사람이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서 만나는’(<장수>) 즐거움을 누릴 때, 평생 연구하고 기록해 온 자료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을 텐데도 저울에 올려놓아도 아무런 무게 없는 입김과 속임수로 돌리며 ‘날 떠난 너 흙과 물에서 노닐다가 문득 바람 속에서 낯익은 먼지 하나 만나거든 옛날 옛적이었다고 해라’(<문패>) 하며 평생의 수고를 흔쾌하게 비울 때, ‘번역은 말씀의 빙산일각(氷山一角)’이어서 ‘의미의 바다를 표류’하지만 ‘이 작업도 힘겨울 때는 당신 품에 안기렵니다’(<생일유감>) 겸허하게 기도할 때, 시(詩) 속에 담긴 선생님은 다른 말로는 대체할 수가 없는 ‘말씀의 사람’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곁을 말씀으로 찾아오신 한 사람을 압니다. 그 분은 말씀이 곧 삶이었고, 삶이 곧 말씀이었습니다. 평생을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오신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통해 다시 한 번 사람의 몸을 입은 말씀을 봅니다. 사람의 몸을 입은 말씀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삶이 얼마나 지극하고 지순해야 비로소 말씀이 몸을 입는지를 배웁니다. 시(詩)와 삶이 얼마든지 말씀이 될 수 있음을, 아니 그리 되어야 함을 나직한 목소리로 일러주시는 선생님, 지구라는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과 고마움이 이리도 큽니다.


한희철/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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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의 말씀 안으로(9)


예수는 먹보요, 술꾼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태복음 11:18-19)


오래된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때는 저의 대학원 시절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그때 조교장이던 한 선배의 물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학기 초가 되면 조교장이 있는 방에서 새로운 학기를 준비하는 전체 조교 회의가 열립니다. 당시 막 대학원생이 된 저는 처음으로 학과 조교를 맡게 되었고, 당연히 조교장이 있던 연구실에 처음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조교 연구실은 5~6명 정도가 함께 사용하는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때 선배의 책상 앞에 걸려있던 예수님 초상화가 제 눈에 빨릴 듯 밀려들어왔습니다.


선배의 책상 앞 예수의 초상화는 제가 보아오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양이었습니다. 그림 속의 예수는 아끼던 송아지를 후한 값에 팔아넘기고 시원한 음료 한 잔 걸친 시골 아저씨처럼 호탕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다짜고짜 저는 선배에게 그림의 진원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선배가 말하기를, 그 예수님 초상화는 미술을 전공하는 동생이 연필로 그려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뒤늦게 신학을 시작하는 자신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 선배의 자리를 노려보고 있던 그 호탕한 예수의 모습은 제 뇌리에 강하게 자리 잡았고, 기존 예수의 대한 저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림이 제게 준 충격은 작지 않았습니다. 신자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 그림을 보기 전까지 제가 품고 있던 예수의 이미지는 언제나 근엄했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교양을 갖추신 분이고, 머리에는 언제나 빛나는 아우라가 자리하고 있어 뭍 시장잡배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분이며, 얼굴에는 모나리자의 뺨을 때릴 정도의 은은한 미소가 가득하며, 또한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인류를 향한 고귀한 슬픔마저 마다치 않는 납덩어리처럼 무겁고 쓸쓸한 모습의 사나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선배의 앞자리에 걸려있던 예수의 초상은 그런 기존 이미지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림 속 예수는 버스 정류장에서도 쉽게 만나는, 골목길 어귀에서 늘 마주치는, 공원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우리 이웃의 얼굴이었습니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회색빛 가득한 쉽게 범접하기 곤란한 심각한 분이 아니라, 언제나 쉽게 그리고 가벼이 스치듯 만날 수 있는 예수의 얼굴이 그 그림 속에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집으로 돌아와 복음서를 뒤적이며 그 안에 그려지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열심히 훑어보았습니다. 그러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의 한 구절 속에 너무도 생생한 그분의 얼굴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분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경건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언제나 예수의 주변엔 죄인이라 불리던 세리와 거리의 여인들이 끊이지 않았고, 또한 세례자 요한처럼 정기적으로 금식하기는커녕 신랑과 함께 있는 자의 즐거움으로 포도주와 음식을 즐겼던 바로 그 분, 예수를 복음서 기자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분의 타고난 질박한 심성은 언제나 주변에 아이들이 끊이질 않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소박하고 맑은 심성을 지닌 이들을 좋아합니다. 언제나 그늘진 모습으로 얼굴에 쌍 십자를 그리고 있는 이들에게 좀 채 아이들은 마음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은 저마다 한 목소리로 자신의 자녀에게 축복을 빌어주길 원하여 아이들을 예수에게로 데려오던 부모들의 극성을 절대로 막지 않았던 예수의 너그러움을 적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몰려드는 것을 싫어하기는커녕, 그들을 막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시는 그의 다정함을 성서는 증언합니다.


또한 그분은 유머와 재치가 넘쳐나던 분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에서 넘쳐흐르는 수많은 예화를 생각해 봅시다. 마치 시인처럼, 때론 연인처럼 그분은 수채화를 그리는 화가의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을 웃기고 또 울렸습니다.


세리와 죄인들 앞에서 그는 일장의 연설을 토해냅니다. 100마리의 양 중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때문에 고민하는 목자, 헌데 얼마 못가 그 잃은 양을 찾고 감격하는 기쁨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은화를 다시 찾고 행복해 하는 한 부인네의 심정을, 그리고 잃은 아들을 찾은 후 손가락의 가락지를 빼어 그의 손에 끼우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아버지의 모습을 비유로 던지시는 그 분의 감각!(누가복음 15:1-32)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의 처벌을 원하는 사람들의 험상궂은 원성을 앞에 두고도 몸을 굽혀 땅위에 천연덕스럽게 낙서를 하시는 그분의 여유! 그 밖에도 많은 곳에서 그는 웃고 마시고 즐길 줄 아는 여유 있는 사람의 얼굴로 우리 앞, 뒤, 옆에 와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어떤 예수의 이미지를 전해주건 간에 우리는 또 여전히 그늘진 예수를 고집하려 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들의 고집스러운 성향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 봅니다.


우리의 고정된 신앙관 속에 형성된 선입견이 오히려 생생한 예수의 모습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의 웃음 가득했던 즐거운 모습은 뒤로 한 채 오로지 ‘그에 대한 우리의 포장’만이 남아 납덩이처럼 무거운 그분의 겉모습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쩌면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모습이 사실 그렇기도 합니다.


저의 신학교 생활은 이러한 기억들의 확인으로 연속되었습니다. 신학교에 갓 들어온 신입생들은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갓 스물을 넘긴 풋풋한 청년들입니다. 그러나 신학교의 분위기가 그런 것인지, 혹은 교회에서 제공하는 신앙의 모범이 그러한 것인지… 너나 할 것 없이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사람들은 이내 목사가 되고 맙니다. 깔끔한 짙은 색 계통의 양복에 반짝이는 구두에 화려한 넥타이로 온 몸을 치장하고, 이미 음성은 하늘의 목소리인양 저음만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리고 사용하는 언어도 시정잡배들은 감히 다다를 수 없는 수준으로 ‘형제님, 자매님’을 연신 되 내이며 틀에 박힌 일정한 멜로디 섞인 음정으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신학교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일반 교회에서도 이와 동일한 모습은 비일비재합니다. 물론 저는 이 자리에서 그 분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폐지를 요청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형의 모습과 행위에만 집중되는 우리의 자세는 고쳐야 하지 않을까 반문하고는 있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정직한 고백에 기초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언어도, 어떤 행위도 그 정직한 고백 위에 서지 못하면 맹목적일 따름입니다. 저는 단지 근거를 알 수 없는 어설픈 선입관이 우리가 예수의 참된 모습을 읽는데 장애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상대방 군인의 부상당한 귀까지 치유해주는 넉넉한 분이셨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의 고민을 들으시고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심성을 어루만져 위로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위로는 가식 없는 순수한 이해에서 비롯되었지, 정형화된 행위의 형식이 제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우리에게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유와 평강은 하나님을 향한 굳은 신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최후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의지하는 그분의 곧고 분명한 신앙이 그분으로 하여금 자유와 평강의 설교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어설픈 형식이 아니라, 그분의 철저한 ‘하나님 신앙’이며 또한 ‘자유와 평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고난절입니다.


우리는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받으시던 그분의 신음소리를 흉내 낼 것입니다. 때로 몇몇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의 손에 못을 박으며 그분이 걸어가셨던 길을 닮은 언덕길을 잘 가꾸어진 나무를 쪼개어 만든 십자가를 지고 오를 것입니다. 때로는 노래로 구슬프게 그분의 고난을 설명할 것입니다. 혹자는 두툼한 헌금봉투로 나를 위하여 받으신 그분의 아픔에 감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또 우리는 열심히 전혀 그분이 아닌 그분, 우리의 습관과 선입관 속에서만 살고 있는 그분의 이미지 만들기에 급급할 것입니다. 그래서 또 편짜기와 편 가르기에 열중하며, 신앙이 좋고, 나쁘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그러네 하며 ‘예수의 포용’과는 정반대의 길을 열심히 달려갈 것입니다.


또 다시 고난의 절기입니다.


우리는 또 예수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짐짓 슬픔의 얼굴을 하고 사정없이 가슴 아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굳게 다시 한 번 동여매는 넥타이 속에 예수께서 함께 해주시기를 기도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타인과 같지 않고 오늘도 정해진 언어와 행위 속에 자신을 지켜 가는 멋진 솜씨에 감복할 것입니다. 짐짓 금식도 필요할 것입니다. 때로는 신중한 자세로 옷깃을 여미며 분위기 있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시 수난의 절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의 수난만을 고집한 채 그분이 우리에게 남긴 웃음의 의미를 잊어버려서도 안 됩니다. 고난 바로 뒤에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겼던 그분 예수의 유쾌한 모습 또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과도 같은 세상에 끈질긴 유머와 유쾌함으로 지친 세상의 영혼들을 위로한 ‘먹기를 탐하던 예수’가 당한 수난이 바로 고난절입니다.


유대인은 고난의 예수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가 초지일관 고난과 수난의 상징으로 그들 옆에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예수를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설사 경건의 극치를 달렸더라도 그들은 예수를 또 처단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사도 요한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요한을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 귀신이 들렸다 하면서 그를 처단했습니다. 이를 마태는 장터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곡조에 따라 춤추고 울어대는 아이들을 비유 삼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진중함 없이, 신중치 않게 그저 주변 환경의 변화와 옆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반성 없이 따라가는 사람들이 결국 요한과 예수님을 내치고 말았습니다. 앞에 서신 분의 참 모습을 살피며 따라가려하기 보다는 기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선입견에 끼워 맞춰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일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겉에만 충실하고 속에는 무감한 이들. 예수님의 참 모습보다는 포장되고 각색된 이미지에만 충실한 우리들의 모습도 저들 유대인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진지함도 받아내지 못하던 이들이 예수님의 유쾌함을 감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먹기를 탐하며 포도주를 즐기던 분이었고 그들이 생각하던 ‘경건’과는 너무도 큰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예수를 포기합니다.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예수를 처단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위한 구세주를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며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외치는 사이비 하나를 처단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만의 고집과 선입견 속에 구축한 신앙관에 의해 처단한 그분, 먹기를 탐하던 예수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을 줄이야!


또 다시 고난의 날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도 고정된 우리의 선입관으로 또 다시 예수를 다시 십자가, 고난의 길로 몰아세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또 다시 고난절입니다. 유쾌했던 예수의 참 의미가 우리 가슴에 진득이 묻어나길 기원합니다. 단지 고난만 남고 그의 오신 참 뜻은 실종되는 수난절이 아니라, 주께서 왜 우리와 함께 계셨고, 무엇을 위해 우리 곁에 계셨고,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의 모든 것을 내 몸과 심장 안에 새겨보는 속 찬 고난의 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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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7)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8 이 향유는 나의 눈물입니다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그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에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복음서 본문에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여인의 반응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피칸더와 바흐는 이 부분에 알토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그 여인의 마음을 남깁니다. 알토 솔로의 서창은 코멘트 역할을 하고 있고 이어지는 아리아는 ‘기도’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시인과 작곡가가 이루어낸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콜라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향유는 나의 눈물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레치타티보의 첫 부분 가사를 통해 예수와의 ‘Ich und du’의 관계를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이 레치타티보 가사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So lasse mir inzwischen zu,

Von meiner Augen Tränenflüssen

Ein Wasser auf dein Haupt zu gießen.


부디 나에게 허락하소서

나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당신의 머리에 뿌리게 하소서.


이 가사를 처음 본 순간 저는 완전 무방비상태에서 충격을 받고 왈칵 눈물을 쏟고야 말았습니다. 딱딱할 줄로만 알았던 바흐의 교회음악에 이토록 깊은 감성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인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인격적이고 감성적이고 표현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여인과 예수의 사랑의 관계를 몰랐기에 이 여인의 행위를 물질적으로만 해석했습니다. 우리들 역시 제자들처럼 여인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이니 뭐니 하면서 이 여인이 깨뜨린 향유를 돈으로 계산하지 않았던가요? 아니면 은근히 헌금을 독려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여인의 이야기를 사용하지 않았던가요? 이 여인의 향유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발단된 회개가 마음을 찢을 때 흘러내린 진심어린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뿌려 준 향유였고, 자신을 친구로 대해 주었던 단 한 사람 예수를 위해 모든 계산을 뛰어 넘어 내어준 사랑의 보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준 그 분의 사랑의 향기로 남기에 합당한 고귀한 희생이었습니다.


That’s why


문득, 자주 부르던 복음성가 한 자락이 떠오릅니다. ‘You gave me Love’라는 곡으로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라는 영화음악으로 유명한 미국의 팝 가수 B. J. Thomas의 곡입니다. 대중적 인기의 허무함을 느낀 그가 예수를 친구로 만난 은혜를 노래한 곡이지요. 이 베다니 여인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You gave me time when no one gave me time of day

당신은 내게 시간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 아무도 내게 시간을 주지 않을 때에


You looked deep inside while the rest of the world looked away

당신은 내 마음 깊은 곳을 보셨습니다 다른 이들이 나를 외면했을 때에


You smiled at me when there were just frowns everywhere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어주셨습니다 모든 이가 나를 행해 얼굴을 찡그릴 때에


You gave me love when nobody gave me a prayer

당신은 내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날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에


That's why I call You Saviour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신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That's why I call You Friend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You touched my heart

당신은 내 마음을 만지셨고


You touched my soul

당신은 내 영혼을 만지셨습니다


And helped me start all over again

그리곤 내가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셨죠


That's why I love You, Jesus

그것이 바로 내가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That's why I'll always care

그것이 바로 내가 항상 간직하는 이유입니다


You gave me love when nobody gave me a prayer

당신은 내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날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에


플롯이 흘리는 눈물방울 소리


이어지는 아리아는 두 대의 플롯이 시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바흐는 왜 이 아리아에서 플롯을 사용했을까요? 그 비밀은 가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아리아의 가사를 함께 보시겠습니다.


마태수난곡 1부 6번

6

기도

알토

아리아

Buß und Reu

Knirscht das Sündenherz entzwei,

Daß die Tropfen meiner Zähren

Angenehme Spezerei,

Treuer Jesu, dir gebären.

참회와 후회의 마음이

죄지은 이 마음을 짓이기고 찢을 때

그렇게 떨어진 나의 눈물방울이 고여

향기로운 향유가 되었습니다.

오 신실하신 예수여, 당신께 드립니다.


그 날, 베다니 시몬의 집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전주가 흐릅니다. 아름다움과 슬픔과 거룩함이 혼재된 그 방의 공기가 아리아의 전주에 스며있는 듯합니다. 노래 중간 부분에서 ‘그렇게 떨어진 나의 눈물방울이 고여 향기로운 향유가 되었습니다/Daß die Tropfen meiner Zähren Angenehme Spezerei,’라고 노래하는 부분의 기악파트를 유심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시인의 놀라운 영감에 바흐가 더 놀라운 음악적 영감으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두 대의 플롯이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향유와 여인의 눈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 마태수난곡 악보에는 이 페이지 위편에 ‘아, 지고한 아름다움이여!’라는 메모가 적혀 있습니다.


알토아리아 악보 중 ‘나의 눈물방울이 고여 향기로운 향유가 되었습니다‘라고 노래하는 부분. 맨 위 스타카토로 표현된 부분이 플롯 파트임.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이 부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분과의 인격적인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태수난곡을 재생시켜야 할 음악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노래의 멜로디가 아름답기 때문에 텍스트와의 조화를 생각하지 못하고 이 곡을 매우 빠른 템포로 끌고 갑니다. 성악가 입장에서도 이곡은 빠른 템포가 노래하기 좋습니다. 그러나 이 곡의 핵심은 눈물방울이 한 방울 씩 떨어지는 플롯 파트입니다. 예수와 이 여인만이 알고 있는 사랑과 용서와 은혜의 관계 속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함과 그 여인의 진지함과 아름다운 사랑의 동작에 압도되어 얼어 버린 제자들이 만들어 낸 적막 속에서 귀한 향유가, 회개의 눈물이 예수의 머리 위로 한 방울 한 방울 똑 똑 떨어집니다. 이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템포를 매우 늦게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표현한 것은 칼리히터의 58년 음반뿐입니다. 지휘자 칼 리히터가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이며 영적 메신저였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래에 소개해 드리는 카운터 테너 안드레아스 숄의 노래는 원전연주로서 이 곡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연주입니다. 원전 연주에서는 바흐시대의 전통을 따라 여성 알토 대신 남성 카운터 테너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아래에 링크한 칼 리히터의 58년 음반과 비교해서 들어보시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https://youtu.be/y5Xuc_Q4IW4 (안드레아스 숄이 노래하는 ‘Buß und Reu’)

https://youtu.be/8y6x1wj0bxM (칼리히터의 58년 음반, 17분27초에 시작)


첫 목회지에서 헌금 봉투를 만들어야 했을 때 마태수난곡의 이 구절을 빌렸습니다. 재생지로 만든 봉투였는데 그 앞면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이 향유는 나의 눈물 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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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6)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7 예수를 위한 대명사


지난 2월 14일, 재의 수요일 부터 2018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몇 년 뒤에 끝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매 년 사순절 기간 동안 마태수난곡 순례를 계속해서 연재 하도록 하겠습니다. 몇몇 분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조용히 따라 걸으며 마태수난곡을 묵상하려는 마음으로 이 연재를 시작했는데 올해에는 다소 갑작스레 평화교회연구소의 요청으로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40일간의 영적순례’라는 작은 사순절 묵상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40일 동안 마태수난곡 전 곡을 QR코드를 통해 들으며 묵상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나누는 것만큼의 이야기를 이 작은 묵상집에 다 담을 수는 없었지만 이 책을 통해서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마태수난곡의 전 곡을 만나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순례를 위한 작은 가이드북으로 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순례의 길로


그럼, 계속해서 순례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만나게 될 곡은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향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오늘은 이에 대한 코멘트 레치타티보를 만나보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설명 드렸듯이 마태수난곡은 내러티브, 대사, 코멘트, 기도라는 네 명의 화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며 오늘의 코멘트 레치타티보를 부르는 성부는 알토입니다.


알토의 목소리


여성 목소리의 저성부인 알토는 모성과 슬픔과 공감과 눈물을 상징합니다. 일반적인 오페라나 오라토리오에서 소프라노가 여성성과 기쁨과 사랑과 미소를 상징하고 테너가 열정을, 베이스가 남성다움과 진중함을 표한 것처럼 마태수난곡에서도 각 성부의 음색은 고유한 표현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녀에 대해 ‘한 여자’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인지 비슷한 별개의 사건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누가복음 7장 37절은 ‘그 동네에 사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좀 더 상세하게 그녀를 설명하고 있는데 사회적 약자로서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왔고 인간으로서 죄를 지으며 살 수 밖에 없었던 이 여인의 장면에 어울리는 목소리는 알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화자를 이 베다니 여인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노래를 부르는 이는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마태수난곡에서의 각 성부의 음색은 우리 안에 있는 감성적 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가사를 살펴보시겠습니다.


마태수난곡 1부 5번

5

코멘트

레치타티보

알토

Du lieber Heiland du,

Wenn deine Jünger töricht streiten,

Daß dieses fromme Weib

Mit Salben deinen Leib

Zum Grabe will bereiten,

So lasse mir inzwischen zu,

Von meiner Augen Tränenflüssen

Ein Wasser auf dein Haupt zu gießen.

사랑하는 구주여

당신의 제자들은 어리석게도

이 고귀한 여인이 향유를 가지고

당신 몸의 장례를 준비한 것을 막았지만

부디 제게는 허락하소서.

나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눈물방울들을

당신의 머리에 뿌리게 하소서.



‘du’의 시적의미와 관계적 의미


레치타티보의 시작 부분에서 노래하는 이는 예수를 ‘Du lieber Heiland du/사랑하는 구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시적 화자와 예수가 이미 구원을 통한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지요. 문자적인 우리말로는 이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습니다만 독일어 가사에는 ‘너/당신’에 해당하는 의미인 ‘du'가 두 번 반복됩니다. 이는 시적으로나 관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먼저, 시적인 면에서 화자는 ‘du’를 두 번 강조하여 표현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 나의 구원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 예수뿐이라는 표현이지요.


관계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예수를 대명사 ‘du’를 사용하여 칭했다는 것이 의미가 깊습니다. 영어에서는 2인칭 대명사가 ‘you’하나 뿐이지만 독일어에서는 우리말의 ‘너’와 ‘당신’의 차이처럼 2인칭 대명사로 ‘du/두’와 경어 ‘Sie/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노래 알토의 코멘트에서는 예수님께 경어체인 ‘Sie’ 대신 ‘du’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참으로 낯선 풍경입니다. 하지만 ‘du’라고 해서 우리말과 같은 반말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du’는 친근함의 표현, 관계가 맺어진 사이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어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면 ‘du'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사회의 권위주의와 그로 인한 경직성은 엄격한 존댓말 때문에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직위에 상관없이 서로를 닉네임이나 영어이름으로 편안하게 부르면서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회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 신앙의 맥락이 아님에도 예수라는 이름 뒤에 ‘님’을 붙이지 않았다며 시비를 거는 분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공경하여 높이기 위한 그 분들의 신앙과 정성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럴 때면 굳이 그분들을 설득하거나 항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 뒤에 무조건 ‘님’을 붙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예수와의 친밀함의 관계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간만큼은 이 부분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합니다. 실재로 ‘님’자에 집착하는 분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권위적인 모습을 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님’자에 대한 집착이 단지 ‘예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기독교의 가장 특별하고도 경탄스러운 부분은 신이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로 내려왔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신과 대결을 하든, 불교처럼 자기 수행을 통해서든, 무속신앙처럼 무엇을 바치거나 간절한 기도를 하든 이러한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인간이 신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노력 없이, 오직 은혜로 신이 인간을 향에 먼저 내려온 종교는 기독교 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과 인간이 이토록 가깝게 연결된 종교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 놀라운 사실을 믿고 영접하면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십자가의 수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과 육신의 고통, 배신, 홀로됨, 인간으로서 인간이 받아야할 극도의 고난을 주님께서는 다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헨리 나우엔의 표현대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기 위함이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친구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여러분과 공통분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 공통분모를 통한 공감이 우정으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부사이 보다 더 비밀이 없는 관계가 친구사이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말구유에 오신 이유도,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도, 부활하신 이유도 우리에게로 내려 오사 우리 안에 거하시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고 본디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기독교는 원래 이처럼 세상의 생각을 뒤집어 하나님의 뜻을 펼쳐내는 품격 있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창 18:17)과 모세(출 33:11)를 친구처럼 대하셨듯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도 그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시기 위해 먼저 우리와 친구 되어주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


시편 25편 14절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유진피터슨은 이 구절을 ‘God-friendship is for God-worshipers’ 라고 읽었습니다. ‘프렌드쉽/friendship’은 말 그대로 ‘우정’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정서상 ‘하나님과의 우정이 그를 예배하는 사람에게 있음이여‘라고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어 이름으로는 상사를 편하게 부를 수 있는데 한국 이름에는 그 뒤에 직함과 ‘님’자를 꼭 붙여야 하듯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프랜드쉽’은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도무지 깨닫기 힘들어하는 이 관계를 우리는 알고 체험해야합니다.


마르틴 부버는 그 유명한 ‘나와 너/Ich und du’라는 짧은 책을 통해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와 ‘나와 너/ich und du’라는 인격적인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부버는 ’만남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고 이야기했지요.


부버의 방식으로 생각 해 보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인지는 모르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이는 예수를 만났고 그 만남과 이어지는 만남의 연속을 통해 그와 ’나와 너/ich un du'의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의 시작에서 ‘Du lieber Heiland du’라고 ‘du’를 두 번 강조하여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님’이라는 글자에 집착하다보면 예수와의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저 멀리 있는 신’과 ‘하찮은 피조물’과의 관계인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이 베다니 여인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이 곡의 다음 장면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를 부를 때 ‘랍비’라고 부릅니다. 유다는 끝까지 예수를 ‘du'로 만나지 못했고 ‘es'로 대했던 것입니다. 유다의 잘못은 여기에서 시작했습니다. 예수와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와 어떤 관계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면 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만남이고 관계입니다. 예수는 여러분에게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인생과 삶을 위한 ‘es'입니까? 아니면 아직 친밀함의 관계에 이르지 못한 ‘Sie’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du’로 만나고 그렇게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조건 때문에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 친밀함의 관계를 맺어 나가야합니다. 'es'도 아니고 ‘Sie'도 아닌 ’du'로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만남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사실, 그 만남은 예수께서 먼저 다가오심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성육신 사건과 그 분의 말씀과 삶, 그리고 죽음의 과정까지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와 ‘ich und du'의 관계를 맺기 위한 선제적인 다가오심이었습니다. 이 수난곡 속에서 예수께서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를 친구, ‘du’로 만나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앞서 우정에 관해 말씀드렸듯이 당신과의 친밀함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시기 위해 예수는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것을 다 겪으셨던 것입니다.


‘고귀한 여인/fromme Weib’


이 레치타티보에서 한 가지 더 살펴 볼 것은 노래하는 이가 이 여인을 ‘고귀한 여인/fromme Weib’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7장 37절은 이 여인을 ‘그 동네에 사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마태수난곡에서는 ‘고귀한 여인’이 되어 있습니다. 죄 많은 한 여인을 고귀한 여인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기독교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는 예수를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로 만나 그것을 ‘프렌드쉽/friendship’이라 하건 ‘우정’이라 하건 ‘친밀함’이라 하건 간에 그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머무르면서 어떤 비밀도 서로 없는 대화를 나누고 공감대를 나누는 가운데 현실로 펼쳐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거하는 상태 말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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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삭개오의 계산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 19:1-10)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삭개오입니다. 누구나 신앙생활의 첫발을 디딜 때 한 번쯤은 꼭 들어보는 인물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입니다. 때로는 노래의 주인공으로, 때로는 예화의 단골손님으로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는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흔히 듣고 또 알고 있는 이 삭개오라는 사람에 대한 성서의 증언은 오직 한군데, 즉 오늘 본문으로 잡은 누가복음에만 실려 있습니다. 예수의 행적을 적은 4복음서의 많은 내용들이 서로 중복되고 반복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 주인공 삭개오는 아주 적은 부분에만 기록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삭개오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신앙의 세계에서는 매우 유명한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 아마도 키가 작고 세리라고 하는 그의 삶이 극적이고, 또 예화로 들기에도 좋은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오늘 우리의 주인공 삭개오는 세리의 장이고 부자이며, 키가 유난히 작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또 다른 한 축을 차지하고 계신 분은 예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구세주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가 구세주이신 이상 그 분이 가는 곳마다 구원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변함없이 예수는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하여 자신의 구원사업의 성공을 만 천하에 공언하고 계십니다. 이렇듯 저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 주어진 본문에 의지하여 예수께서 생각하시고 또 선포하신 ‘구원’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9절과 10절에 거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나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이러한 예수의 증언을 통해 볼 때 분명 삭개오의 구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떻게 삭개오가 구원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나 인격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만일 구원받았다 하면서도 그의 행실이나 인격이 과거의 모습 그대로라면 그의 구원은 가식이거나 위선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삭개오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뺏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고백 직후, 예수께서는 그에게 구원이 임하였음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이 삭개오의 고백이 그의 구원받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이 고백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 삭개오는 세리였고, 그것도 장급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이방인보다도 더 멀리하는 비난대상 1호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지배자 로마에 기대어 동포의 혈세를 뜯어낸 데에도 기인하지만, 그들이 비난을 받는 주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당시 세리들에게는 월급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할당된 세금을 주민들로부터 거두어들여 그 만큼만 총독부를 통해 로마로 보내면 그만입니다. 따라서 월급이 없던 세리들은 자신들이 거두어들여야 할 세금 그 이상을 추징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천원 낼 사람은 만원을, 천원 낼 사람은 십만원을 내야만 했습니다. 물론 세리들의 수고비로 어느 정도 더 받아내는 것은 수긍이 가긴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세리들은 항상 필요 이상의 돈을 동포로부터 뜯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족이면서도 비난과 질시의 대상 1호가 되었고, 로마군인의 도움이 없이는 폭행당할 우려 때문에 거리를 신나게 활보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는 그러한 세리들 중에서도 장급이며, 또 재산도 많았다 하니 그의 악랄함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삭개오의 모든 재산은 사실 그의 부정행위를 통해 얻어진 것이며, 따라서 모두 토색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공언한 약속은 지켜질 수 없는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토색한 것의 4배를 갚겠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가 자신의 약속을 모두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재산보다 4배 이상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산은 초등학교 정도의 산수실력이라도 금방 나올 수 있을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공약 이후에 예수는 엄청난 선포를 하십니다.


“드디어 이 집에도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의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그것이 잘못된 공약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그런 공언을 하게끔 만들었는가 하는 것, 바로 그것을 오늘 우리는 찾아내야만 합니다.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누가는 19장의 서두에 삭개오라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의 이야기를 통해보건대, 그는 부자이고 세리장이었으며 또 키가 유난히 작은 사람입니다. 누가의 이런 묘사를 통해 우리는 삭개오가 당시 유대인들 공동체에서는 철저히 소외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비정상적인 신체적 특징은 어릴 적부터 그로 하여금 심한 조롱을 당하게끔 하는 큰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체의 이상을 죄와 연결 지어 생각하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성으로 인하여 삭개오의 유소년 시절은 ‘어두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동족에 대한 증오감이 점점 깊어져 가장 악랄한 세리 중의 하나로 자기 자신을 키워갔고,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더욱더 돈에 대한 애착이 커갔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민 이스라엘의 혈통을 이어받은 삭개오는 불행하게도 ‘하나님 없는 삶’에 더 익숙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점점 더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없음’을 실감해 가며 또 묵인해 갔습니다.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친구들의 놀림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동포들의 눈길 속에서 점점 삭개오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끼워주지 않는, 그야말로 외로운 사나이 삭개오를 우리는 이 누가복음의 행간을 통하여 읽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외로운 사나이 삭개오의 가슴을 흥분시키는 소문이 유대 땅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나사렛 출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과도 잘 어울리며, 창녀와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까지 친구라 칭하며, 곳곳에서 기적을 행하며, 병든 자들 고쳐주며, 전하는 말씀도 힘이 있고,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그야말로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메시아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심지어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은 자신과도 같은 세리출신도 섞여있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을 접한 후 삭개오는 이전에는 느껴볼 수 없었던 흥분과 긴장으로 이전보다 더 많은 날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됩니다.


‘세리를 제자로!? 남들은 그렇게 비난하며 틈만 나면 잡아먹을 기세를 하고 있는 세리마저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고?’


삭개오는 계속 흥분합니다. 그 동안 동족에게 놀림을 당하고 또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동족을 괴롭히며 받아야했던 자신만의 고민을 기억하며 그는 예수라는 분으로 인해, 수 없는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그가 누구인가? 그가 누구인데 나를 이처럼 동요케 하는가?’


삭개오에게 있어서 예수란 존재는 ‘잊혔던 모든 것’을 회상하게끔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지금껏 하나님 없이 살아오던 삭개오의 심장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자의 이름이 다시 떠오르는 나날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까마득히 잊혔던 사랑이니, 가족, 친구, 이웃, 정, 그리고 민족 등과 같은 단어들이 새삼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그런 고민의 연속 중에 그는 예수가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보기 위해 삭개오는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당시 돈 많은 세리장이 군중들 사이에 낀다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죽음을 각오한 결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삭개오는 그의 신체적 특징으로 인하여 쉽게 사람들 눈에 뜨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수일 밤을 고민하다 결심합니다.


“그래도 난 예수를 만나야겠다!”


그리고 삭개오는 그 결심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러나 또 다른 난관이 그를 괴롭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키였습니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이웃들의 놀림의 대상이었던 이놈의 작은 키가 다시금 예수로 가는 자신의 발걸음을 무겁게 합니다. 건장한 장년들 틈바구니 속에서 삭개오는 더 이상 예수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내 자신을 발견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삭개오는 군중의 동요를 금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곧이어 쏟아질 자신에 대한 비난과 질시, 조롱 등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롱이 이내 성난 군중들의 폭력으로 자신을 위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또한 엄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도 이번은 거의 마지막입니다. 정말 예수가 죄인들의 친구이며 세리마저 제자로 삼은 사람인가를 확인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순간 그는 염치며 체면, 비난, 질시, 조롱 그리고 생명의 위험마저 모두 팽개치며 생애 최고의 도박을 감행합니다. 그는 예수를 보기 위해 옆에 있던 뽕나무를 탑니다.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무를 타자 동시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웅성거립니다.


“아니 저거 삭개오 아냐? 저 도적놈이 여기는 왜 나타나 가지고 기웃거리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때 세금이라도 거두려고 그러나? 아니 그런데 왜 나무는 타고 난리야…”


삭개오의 나무 타기는 뒤통수를 치는 군중들의 야유와 조롱과 더불어 이루어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아무도 자신을 인간이라, 자신들과 같은 동포라, 친구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사람으로서 대접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도…


단지 그는 눈으로 예수의 모습과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죄인의 친구로 불리는지, 단지 그것만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 후에 그가 받게 될 질책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을 끊은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그의 삶에 이번이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가 삭개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 씨, 어서 내려오십시오. 오늘은 당신 집에서 하루 묶고 싶군요.”


차분한 예수의 한마디가 삭개오를 비롯한 당시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예수의 말씀을 접한 삭개오의 심장은 정신없이 뛰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자신을 사람으로서, 이웃으로서, 친구로서, 가족으로서 인정해주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계속해서 공포합니다.


“이 집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왜냐하면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말하는 구원의 의미를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구원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그 동안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겠다고 예수를 만나기 위해 결심합니다. 바로 삭개오의 그 결심 안에 이미 구원의 싹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구원은 잃어버린 이웃을 돌려줍니다.


예수는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친구도, 이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있었다면 오로지 그에게는 맘몬, 즉 돈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는 선포하십니다.


“삭개오 당신도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잃어버린 친구와 이웃을 회복하십시오. 여기 당신의 가족이 있습니다.”


구원은 잃어버린 사람들 즉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가족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안다 하면서 여전히 혼자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는 그의 가족을 찾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이웃을 회복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가족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가 삭개오로 하여금 잘못된 계산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산의 잘, 잘못은 뒤로하고, 그의 고백이 말해주는 바는 곧 그가 잃어버렸던 가족을 찾았음을 보여줍니다. 돈이라 하는 것도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돈은 수단이지 가족과 이웃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가족이, 자신을 버렸던 이웃이 ‘자기에게 와 있음’ 그것뿐이었습니다.


오늘 신앙생활 하는 우리들도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계속 곱씹어보아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이 과연 건강한 것인가를… 삭개오에게 “당신 집에 구원이 임했습니다!”라고 선포하신 예수의 의미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

이웃 없이 살던 사람이 자신의 주변에서 이웃을 발견하는 일

가족 없이 살던 사람이 바로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한 가족임을 깨닫는 일


바로 그 속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외로움은 구원의 모습이 아닙니다. 외롭거나, 외롭다거나 혹은 외로움을 조장하는 모든 행위는 구원사역과는 너무도 먼 것들입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하나님, 이웃, 그리고 우리의 가족을 되찾으며 그들과 함께 어울려 ‘하나 됨’, 바로 그것이 구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도 잃어버린 자가 없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나로 인하여 혹은 나 때문에 소외받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낙오됨이 없이 우리의 공동체 안에 가족과 같이 지내며 그 안에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만끽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그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자리합니다. 바로 그 안에 우리가 구원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선물’이 함께 합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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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듣다 보면, 어느새

내 바구니에 풍요로운 결실이 가득하다


- 김기석의 <인생은 살만한가>를 읽고


믿음


김기석의 <인생은 살만한가>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오랫동안 묻기만 해온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 책의 저자에게서 대화의 상대가 되어, 혹은 편지의 수신자가 되어 해묵은 문제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찾을 수가 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혹은 ”믿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눅 18:8) 예수께서 그의 청중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리스어 본문은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하다. 당신이 올 때 이 세상에 과연 “믿는 사람”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나, 당신이 세상에 오실 때 이 세상에서 진정한 “믿음”을 보실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나 다 같은 말이다.


예수 당시는 이미 그가 살던 땅이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는 기독교라고 하는 새로운 믿음, 새로운 종교가 하나 더 늘어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와 유럽까지 퍼져 종교 인구는 더 많아졌다. 7세기에는 같은 뿌리에서 이슬람 종교까지 나와 아랍인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예수가 당신이 다시 이 땅에 올 때 이 땅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고 한 말은 종교 인구의 감소를 걱정하신 것이 아니고 종교의 풍요 속에 믿음의 부재를 걱정하신 말일 것이다.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걸어오는 저자의 주변 인물들, 저자의 편지를 읽는 폭넓은 수신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지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삶에 대한 반성이다. 이것을 한 말로 요약한다면, 이 땅에 다시 오신 예수가 그렇게 찾으려 했던 “믿음”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화

저자의 대화 상대자는 아버지와 인생문제 신앙문제를 논할 만큼 성장한 자식이거나,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신학대학 동기생 친구이거나, 교회 안에서 생각이 깊은 청년 교인들이거나, 이 땅, 이 세상에서 살면서 걱정이 점점 많아지는 일반 교인이거나, 세상 돌아가는 것과 기독교를 싸잡아 비판적으로 웅시하는 예리한 여성이거나 [이 책의 제목 “인생은 살만한가”는 바로 이 여성이 저자와 대화하다가 제기한 예정에 없던 질문이다. 고위공직자의 자살을 두고서 죽음과 살인과 그것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보면서 “인생은 살만한가”를 묻고 있다], 질문이 많은 한창 때의 학생이거나, 저자와 함께 살면서 저자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인 아내다. 대화 상대자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이 늘 당면한 문제를 숨기지 않고, 불편하지만 꺼내어 가지고 저자에게 접근하여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독자들이 대화에 끼어들어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살피고, 자신들의 믿음을 살피고, 당면한 다양한 문제를 더 넓고 깊게 파악하고, 우리 교회와 사회가 함께 겪고 있는 문제에 책임감을 가지고 접근하다보면,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단계로 스스로 승화하는 체험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대화 상대자가 누구이든, 거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느 누구도 상대를 억압하지 않는다.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서로 문제를 제기하고, 함께 고뇌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말하고,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같은 문제로 고심하던 작가들이나 신앙인들의 의견을 그들의 작품(시, 소설, 미술, 기타 장르)을 통해서 듣다가 보면 대화는 어느새 상상도 못한 차원으로 옮겨진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는 독자들도 이 대화에 스스로 참여하여 문제를 파악하고,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벧전 3:21)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확신까지 가지게 된다.


편지

이 책을 읽다보면 남의 대화를 엿듣고, 남의 편지를 엿본다는 어색한 부담은 금방 사라진다. 엿보라고 엿들으라고 내놓은 것이니까. 내게 그런 말을 했던 이가 정확히 누군지 잘 기억은 안 되지만, 내 확신으로는, 냉천동 신학대학의 어느 신약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내 연구실로 찾아 온 그는 내가 신약성서 중에서 로마서를 읽고 있는 것을 보더니, “왜 남의 편지를 읽어요?” “남의 편지라니?” “지금 읽고 계신 그 편지 수신자가 누군지 모르세요? 선생님께 온 것이 아니고, 바울이 로마에 살고 있던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잖아요?” “그러게, 정말. 내게 온 편지가 아니네.” 그는 웃자고 한 얘기였겠지만, 그 이후, 사도들의 서신을 읽을 때마다, 그 젊은 후배 교수의 말이 가끔 떠오르곤 한다. 우리의 저자 김기석은 이미 편지 문체의 기원과 기능을 잘 알고 있다. 자기의 독자 일반을 다 수신자로 보고, 그들에게 자기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그의 독자가 알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정보를 제공한다.


대화든 편지든 이 모든 과정에 평생 수많은 세계의 지성들과 지적 대화를 하면서 말씀 전달자 역할을 해 온 저자 김기석의 지혜나 관조는 대화에 참여한 이들의 시각을 바꾸고, 자숙과 참회와 자정의 경지로 이끄는 힘이 있다. 뿐만 아니라, 삶에 지친 이들이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나, 아예 모든 문제에는 감각이 없는 둔감한 이들도 위로와 격려를 받고, 각성과 책임의 도전을 함께 받게 된다.


결실

나는 이런 “대화” 속에서, 그리고 “편지”를 읽으면서,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믿음인 것”과 “믿음 아닌 것”을 가려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혹은 “믿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신 예수의 질문에 대답할 자료를 이 책에서 넉넉히 얻는다. 개인이나 한국교회의 믿음의 좌표를 그릴 수도 있다. “믿음”과 “믿음이 아닌 것”을 지적하거나 암시하는 것은 이 저작의 공헌이다.


이삭줍기

저자 서문 격인 “책을 열며”를 읽다가 보면, “울가망해지다” “묵새기다” “괴덕부리다” “깨단하다” “암암하다” “설면하다” “께느른하다” 등, 저자가 자유롭게 부리는 우리의 토박이말이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그의 풍성한 독서량이 그대로 노출되는 글 인용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네 쪽짜리 서문에 벌서 오르한 파묵의 글 내용이 요약되어 소개되고 있고, 나희덕의 시 단편이 인용되기도 한다. 나는 김기석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소식이나 메시지를 듣기 보다는 이번 작품에서도 또 어떤 새롭게 구사된 우리말 어휘들을 만날 수 있을지, 그가 인용하는 어떤 작가들을 얼마만큼 만날 수 있을 지부터 기대하며 읽게 된다. 그러다보면, 그것은 독서가 아니고, 저자와의 대화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만 채굴하여 장바구니에 담는 장보기에 불과할 때도 있어서 죄송하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수확도 외면할 수 없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엿듣고, 엿보다 보면, 이미 내 장바구니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대화자들이나 수신자들과 함께 거두는 풍요로운 결실이 가득 찬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편집자 주/ 이 글은 <기독교타임즈>에 실린 글입니다.


* 지강유철/ 긴기석을 계속 읽어야 할 이유 http://fzari.tistory.com/1053

* 천정근/ 아낌과 허비의 사이, 영혼이 따라올 시간 http://fzari.com/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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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15)


“음녀”도 “이방계집”도 아니에요


기존 언어에 동의하지 않고 말하는 것, 용기를 필요로 한다. 더군다나 그 언어가 소수의 목소리일 때는 비난 받을 각오까지 한다. 힘의 위계질서에서 약자의 말은 묵살당하기 쉽다. 약자의 말이 타당성을 얻으려면 설명과 증명이 필요하다. 연일 쏟아지는 ‘미투’(Me too)운동을 보며 마음이 무겁다. 용감히 나서 잘못된 사회를 고발하는 목소리를 응원하면서도, 돌덩이를 안고 있는 것처럼 무겁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느껴서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 문제는 우리 사회의 그릇된 성의식 문제만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할 공적인 자리가 여전히 권력사회의 강자인 남성중심의 편파적 권력구조가 빚어낸 불합리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최고 엘리트 집단인 검사 조직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집단 내부의 크고 작은 권력은 여성을 소외시킨 남성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그렇다. 다수가 여자 성도들로 구성된 한국교회지만 제도권 교회의 권력 상층부는 학벌이나 재력을 동원한 남자들을 위한 권력 재편의 자리다. 건전하고 건강한 교회를 위해 여기저기 교계의 변화와 개선을 외치는 소수의 남녀 목소리들이 있지만, 제도권 교회의 힘 있는 남자들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목소리들이 모아지고 또 모아지면, 더디더라도 변화의 새벽은 올 것이다.


말이 길어졌다. 본래 구약성경 〈잠언〉 본문 중에서 불편한 번역, 여성비하처럼 소비될만한 말이 발견되어 짚어보려 했다. 잠언은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하고 깨닫기 위해 지혜 추구를 목표하는 책이다. 잠언은 실용적이면서도 교육적이고 신앙적인 성격이 강하다. 무엇보다 ‘주님 경외’(잠언 1:7; 9:10)라는 신학화된 개념이 가장 센 억양이다. 지혜는 인간을 밝게 비추어 자신을 깨닫게 하는 것이어서 지혜 추구의 목소리가 잠언 전반부에서(1-9장) 유력하게 드러난다. 지혜가 진귀한 귀금속들보다 귀하고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고, 장수와 부귀, 즐거움, 행복, 그리고 ‘샬롬’, 곧 완전한 복지를 약속하기 때문이다(3:13-17). 더군다나 지혜는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를 조성하실 때, 최고의 조력자였다(3:19-20; 8:22-31). 이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의 부모(또는 지혜 선생)는 아들에게 지혜 추구를 촉구한다.



그런데 지혜 추구와 그 유익을 말하는 본문에서 불편한 낱말이 포착된다. “음녀”와 “이방계집”(2:16; 5:20 개역개정)이라는 말이다. 이 둘은 본래의 히브리말 뜻을 과도하게 해석한 번역자의 통념이 반영되었다. 한국기독교가 가장 많이 애독하는 성경을 비교해봤다.


지혜가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2:16, 개역개정)


지혜가 너를 음란한 여자에게서 건져주고

너를 꿰는 부정한 여자에게서 건져줄 것이다

(2:16, 새번역)


또 슬기는 너를 낯선 여자에게서,

매끄러운 말을 하는 낯모르는 여자에게서 구해준다.

(한국천주교 성경, 2:16)


개역개정과 새번역 성경은 다른 듯 비슷하지만, 천주교 성경은 많이 다르다. 그러면 “음녀”와 “이방계집”(개역개정), “음란한 여자”와 “부정한 여자”(새번역), “낯선 여자”와 “낯모르는 여자”(천주교 성경)가 어떻게 다른가? 사전적인 뜻을 따지기 전에 번역어의 뉘앙스 차이가 마음에 먼저 도착한다. 개역개정과 새번역의 공통점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성향의 여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강의 중에 학생들에게도 “음녀”의 뜻을 질문했다. 음란하고 부정한 여자나 창녀 또는 매춘부라는 답이 돌아왔다. “음녀”라는 말은 이미 음탕한 여자 정도의 성적인 의미로 수용되었기에 도덕적인 판단이 내려진 답변이다.


그러면 자기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창녀가 “음녀”인가? 아니다. “음녀”로 번역된 ‘잇샤 자라’는 ‘낯선(생소한) 여자’, ‘이방 여자’, ‘다른 여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여자’를 뜻한다. 천주교 성경이 히브리말을 그대로 번역한 셈이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또는 ‘타국의’, ‘다른’, ‘불법의, ‘금지된’ 이라는 히브리말 여성 형용사 ‘자라’가 구약 다른 본문에서 성적인 모티프로 사용된 예는 없다. 그럼에도 성적인 부도덕성을 함축한 말로 번역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후 17절에서 ‘낯선 여자’를 설명할 때,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2:17)라는 말에 근거한 것일까? 그렇다면 젊은 시절의 남편과 이혼한 모든 여자는 부정하고 음란하고, 음탕한 여자인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음녀”라는 번역은 여성을 대상화하는 성적인 모티프에 강세를 준 셈인데, “음녀의 입술”(5:3), “음녀”, “이방계집”(5:20), “음녀의 골목”(7:8)으로 반복된다. ‘창녀’를 언급하는 히브리말 ‘잇샤 조나’(6:26)라는 말이 있지만, 똑같이 “음녀”(개역개정)로 번역하여 ‘낯선 여자’(‘잇샤 자라’)와의 구별을 없앴다. 더군다나 단지 ‘한 남자의 아내’ 그러니까 ‘다른 남자의 아내’(6:26)를 뜻하는 ‘에쉐트 이쉬’를 “음란한 여자”(새번역), “음란한 여인”(개역개정)으로 번역했다. 설령 이것이 시행 첫 소절의 “창녀”와 동의적인 평행관계를 고려한 것이라 해도, 본래 언어의 뜻을 삭제한 번역자의 해석이 강하게 적용된 셈이다.


그러나 “음녀”로 번역된 본문의 맥락은 지혜를 추구하고, 여호와 경외를 요청하면서(2:1-11), ‘악한 길’에 있는 남자와 패역을 말하는 남자에게서 지혜가 보호해 줄 것이라는(2:12-15) 조언의 문맥을 이어간다. “음녀”로 번역된 ‘잇샤 자라’(낯선 여자‘)는 합법적인 관계 밖에 있는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허락되지 않은 금지된 관계로서, 다른 남자의 아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또는 ‘금지된’ 이라는 말의 위험성이 레위기 본문에서도 발견된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성막에서 여호와가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여호와의 불이 나와 죽었다(레위기10:1). 금지된 “다른” 불은 생명을 앗아갈 정도였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부모(또는 지혜 선생)가 아들을 교훈하며 “남의 아내와 통간 하는 자”(7:29), “여인과 간음하는 자”(7:32)를 언급한 것처럼, 합법적인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와의 관계가 가져올 위험성을 언급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음녀”로 번역하면, 조언을 듣는 아들, 혹은 남자는 여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개념화시키기 쉽다. 또 신앙의 독자가 “음녀”를 창녀로 이해하면, 이 구절을 돈으로 거래되는 성관계 금지 교훈으로만 축소시켜 오해할 수 있다.


“이방계집”(2:16; 5:20, 개역개정)의 번역도 문제다. 여성비하적인 표현이다. “계집”은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그러면 본래 히브리말도 여자를 낮추는 저속한 말로 기록되었나? 아니다. “음녀”라고 번역된 말이 본래 자기 아내를 제외한 합법적인 관계 밖의 여자, 낯선 여자, 혹은 생소한 타국인 여자를 일컫는 것처럼, “이방계집”은 히브리말 ‘노흐리야’라는 말로서 ‘낯선’, ‘이방의’, ‘타국의’라는 뜻의 여성 형용사다. 첫 소절의 ‘여자’(‘잇샤’)가 생략되었지만, 단지 ‘낯선 여자’, 또는 ‘이방 여자’라는 말이다. 이방 여자를 낮잡아 보는 속어, “계집”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방계집”이라는 말은 타국인 여자를 낮추어 대해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되지 않겠는가? 언어 사용과 표현에는 통념이나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어서 암암리에 권력관계로 묶이거나 폭력이 되기도 한다. 언어 선택의 신중함과 적실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음녀”와 “이방계집”이라는 말이 이후 개정작업에서 논의되길 바란다. 단지 이 두 개의 낱말 이외에도 다양한 고대 사본들과 역본들의 장구한 역사를 거쳐 우리말 성경에 이르기까지 번역의 과정에서 말 못할 사정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구약의 오경이 기록되었을 시점부터 지금까지 350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최초의 기록 언어와 지금 언어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 지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그 간격을 번역으로 메꾸는 것은 간단치 않다. 성경을 현재의 수용 언어로 번역하는 기술적이고 예술적인 문제는 다양한 간격과 무게를 아는 학자들의 치밀한 연구뿐만 아니라 남녀학자들의 동등한 협업을 통해 좀 더 섬세하고 세심한 성경번역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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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를 홀로 걷는 한 마리 벌레에게


벌레 한 마리,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걷는다. 강원도 고성에서 임진각까지 약 380km의 길을 열하루 동안 걷는다. 병상에 눕는 대신 걷는 것을 택한다. 걸어야 그 상처가 아물고 새로운 지혜를 얻겠기에….


길거리와 광장에서 사람을 부르던 그 “지혜”(호크모트, 잠언 1:20)가 이번에는 잘린 허리 상처 난 길에서 그를 부른다. 최선을 다하고도 배신과 절망과 좌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영혼을 지혜는 인적 드문 비무장지대로 불러낸다. 지혜는 하나님의 현신이다(욥기 28:27). 성지교회에서 가까운 인천에도 불러낼 곳이 많은데, 가까이 서울에도, 경기도 인근에 도 불러낼 곳이 없지 않은데, 지혜는 행정구역이 아닌, 여전히 긴장이 감도는 분단을 실감하게 하는 현장으로 그를 불러낸다.


그는 늘 어떤 어려움도 잘 참고 이겨내고 오히려 더 잘 선용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 사람들의 비방거리, 백성의 모욕거리 일 뿐”(시편 22:6)이라고 하는 시편 시인의 한탄을 그에게서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늙은 시므온이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를 가리켜 “장차 이 아기는 성장한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마리아에게 “당신의 아들이 비방 받는 표징이 될 때 당신은 가슴이 칼에 찔리듯 할 것”(누가복음 2:35)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면서, 오히려 큰 위로가 이상하게 물밀 듯 밀려오기도 한다.


한희철 목사는 DMZ를 따라 걸으며 기도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했다고 하지만, 그 DMZ의 열하루는 그가 뭘 간구하는 “기도”의 시공(時空)이었기보다는 분단의 역사 현장에서 그분과 만나 인간 역사와 하나님의 통치를 명상한 대화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열하루 동안 DMZ를 걸으며 그에게 수납(受納)된 말씀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치환(置換)되기까지의 그 시간은 누구도 계산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받은 말씀을 그는 두고두고 음미하여 끝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우리의 문법으로 그 말씀을 전달해주기까지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열하루 동안의 DMZ 380km 도보횡단은 그의 말대로 “무탈”(頉)로 끝나긴 했지만 “무리”(無理)한 시도였음이 틀림없다. 굴곡된 쾌락에 자신을 내맡기는 자학(自虐)으로, 혹은 무모한 반항(反抗)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계획이었는데, 그를 인도하시는 분께서는 당신의 종을 위해 한 천사를 시켜 로드맵을 준비시키신다. 한 마리 벌레와 동행하며 그 피조물을 지켜주시려는 그분의 첫 번째 배려는 바로 이 로드맵 작성으로 시작된다.


“지혜”가 보낸 이 로드맵 천사는 걷는 이가 걷기를 마칠 때까지 원격조정을 하며 지켜보고 있다. “걸어서 휴전선”이란 로드맵을 작성하여 걷는 이에게 주고 줄곧 교신하는 그는 걷는 이에게 자기를 “컨트롤 타워”로 생각하라고 한다. “걸어서 휴전선”이란 로드맵을 보고 있으면, 별도의 지도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 같다. 누구나 이것 하나 만으로도 휴전선 따라 도보 동서횡단을 시도해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각자가 자기의 한계를 고려하여 횡단기간을 20일 혹은 30일로 늘려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걷기 체험기를 읽으면서 나는 휴전선 동서횡단 도상실습을 함께 한다.


한 마리 벌레처럼 기어가는 길, 부디 그분이 불쌍히 여기시기를 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길, 그럴수록 그분이 동행하시기를 바란다. 길에서 만나게 될 모든 한계상황들, 길 끝에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만나기를 기대한다(「한 마리 벌레처럼」에서).


이 말을 듣고 나니, 안심이 된다.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돕겠다. 나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 너를 속량한다’고 하셨다”(이사야 41:14).


그는 이사야의 이 신탁을 확신하고 있다. 그가 DMZ를 걸으면서, 이사야의 이 신탁 말고, 호세아의 비전도 공유했을까?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꺾어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 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호세아 2:18).




아직 나는 이 책의 첫 부분을 읽고 있을 뿐이다. 그와 함께 걸어 본다. 그의 배낭에는 필기를 할 수 있는 세 권의 노트가 들어 있다. 들리는 말씀을 받아 적어야 하니까 노트는 넉넉해야 안심이 될 터. 가벼운 휴대용 노트북 생각은 안 했을까? 간단한 메모는 휴대폰의 노트패드를 이용할 생각도 안 하고? 하지만 더 편한 것이 수기노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도 걱정도 하던데, 민통선이나 비무장지대 근방에서는 휴대폰에 여러 지도가 뜨지 않는가? 민통선 부근에서 내비게이션 작동이 멈춘 경험은 내게도 있다. 그가 열하루 길을 걸으면서 같은 기간 동안 머물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다는 것은, 길을 떠나서 숙소를 찾는 것이 시간 낭비뿐 아니라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를 알기에, 숙소를 예약하지 않는 여정이 나로서는 가장 긴장되는 대목이었다. 아마도 도보여행이었기에 어떤 변수를 미리 예상한 조치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다행히 그는 열하루 동안 혼자 걷는 길에서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고린도후서 11:26). 그러나 우리의 보행자는 “길을 떠나니 길 떠난 자를 만나고”,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었다며, 그들을 만나 도움과 위로와 격려를 받은 이야기를 군데군데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혼자 보낸 어머니와 아내, 자식들과 성도들이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 하는 것을 우리의 보행자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낯선 길을 걷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 중 하나는 뜻밖의 만남이 허락된다는 것임을 배운 날이었다. 농막에서 물을 마시며 나눈 이야기나 정자에 앉아 심마니와 나눈 이야기는 분명 내 마음속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었다.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내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다”(「심마니의 자존심」)라고 말하면서 한껏 여유를 부린다.


나의 경우, 늙은 어머니가 혼자서 바깥출입을 하거나 먼 기차여행을 할 때는 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지금 내 나이보다도 더 젊은 어머니였는데…. “어머니, 길을 나서시면 늘 조심하세요. 차도 조심, 사람도 조심….” “얘야 걱정마라. 밖에 나가면, 니 아나? 좋은 사람들뿐이 대이. 차는 비키 가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친절하고, 바깥에 좋은 사람 들 숱하게 많은 거, 니 모르제? 걱정하지 마라. 내 잘 다녀 올끼구만.” 어머니가 목사 아들을 위로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한희철 목사의 글을 읽으니, 지금도 길을 나서면 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특히 DMZ 부근에서는.아마도 그의 도보행군의 첫 번째 위협은 진부령에서 만난 폭우와 우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는 나로서는 힘겹게 고개를 넘는 한 나그네를 환영하시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축제행사로 보이기도 한다. 그 이유에 대해 내가 겪은 경험을 통해 말해본다. IMF 이후 중단되었던 대한항공 서울-텔아비브 노선이 10년 만인 2008년 9월에 재취항 하던 날, 나는 그 첫 비행기 시승에 초대받았고, 마침내 그 비행기는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에 착륙했다. 그때 살수차(撒水車)들이 우리가 타고 간 비행기를 뺑 둘러싸고 물 폭탄을 퍼붓던 것이 기억난다. 그것은 비행기 재취항과 첫 승객을 환영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항 환영행사였다. 기내 방송이 미리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우리가 탑승했던 비행기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것을 진압하려 소방차 가 출동한 줄 알고 놀랐을 것이다. 그 생각이 나면서 한희철 목사가 진부령에서 겪은 폭우, 우박, 천둥, 번개는 얼마나 화려한 환영식이었을 까! 생각해본다. 출발부터 느낌이 좋다.


그는 걸으면서 땅을 발견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하늘과 땅 을]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세기 1:1-2). 진부령을 오를 때는 폭우와 우박과 천둥과 번개가 동반하는 물을 체험하고, 다음 날 이른 아침 진부령에서 용대리로 내려가는 길에서는, 위로 하늘을 바라보고, 아래로 땅을 딛고, 하나님에게서 불어오는 바람을[‘루악흐 엘로힘’ “하나님의 바람” “강한 바람”] 가르며 걷는다. 걷는 길 앞, 뒤, 왼쪽, 오른쪽으로 각종 열매가 달린 야생 식물, 각종 날짐승, 이미 그는 저 아득한 태초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다.



그가 혼자서 DMZ 길을 한 마리 벌레처럼 외롭게 기어가는 고행(苦行)을 하는 동안, 그를 아끼고 염려하는 교회 성도들의 마음도 그들의 목사와 함께 DMZ 위를 걷고 있다. 더러는 시간이나 장소 등 만날 곳을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고, 미리 행선지를 알려 준 것도 아닌데, 목사가 걷는 길 위에 성지교회 성도들은 불쑥 불쑥 나타났다. 목사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만남이었을 것이다. 장로들이, 권사들이 새벽 일찍 길을 떠나 그가 걷고 있을 것 같은 길을 짐작하며 역(逆)으로 달려오기도 한다. 그 모습에 순례자는 감격하고 만다.


벌써 몇 번째인가, 열하루 길을 걷는 동안 장로님은 여러 번 먼 길을 달려왔다. 폭우에 젖은 발을 위해 신발을 사가지고, 행여 쓰러질까 고기를 사주시려, 물집이 잡힌 발을 감싼 인민군식 발싸개를 보고는 안쓰러워, 그리고 마지막 날 저녁 숙소까지(「마지막 걸음」에서).


이렇게 고마울수가! 한 권사가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왔기 때문에 잠시 동안의 동행자들은 길가 바닥에 앉아 그들의 목사와 함께 “드문 만남이 주는 은총”을 마음껏 누리기도 한다. 뭉클한 장면이다. 목사 의 배터리가 100퍼센트 충전되는 순간이기도 했으리라! 이렇게 듬뿍 사랑을 받게 해주시면서도 같은 목회 현장에서 동시에 아물지 않는 상처까지 함께 받게 하시는 그분의 뜻은 무엇일까? 어느 교회나 목사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푸는 성도도 있고, 본인들은 몰라도 자신들의 의도하지 않은 언행이 목사에게 상처를 주는 역할을 하는 성도도 있기 마련이다. 이 모든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니, 목사는 그들을 차별할 수가 없다. 그들을 진정으로 다 가슴에 품으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꼬!


DMZ 횡단 도중 “평화의 댐”을 지나면서는 역대 한 정권의 위장된 안보를 회고하면서도, 세계 30여 개의 분쟁지역에서 수거한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는 “평화의 종” 앞에서 우리의 순례자는 “평화의 댐” 일대를 내려다보며 “한 줌의 기도”를 바친다.


이 평화의 종 제작에 당시 정갑철 화천군수의 참여가 크게 기여했다는 말을 현지에서 들었다. 우연한 기회에 우리 내외는 한희철 목사의 감신대 동기 목회자들과 함께 화천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일행은 화천 교외의 한 리조트에서 1박을 했는데, 그 펜션 거실에는 소비에트연방 마지막 대통령, 냉전을 종식시킨 인물로서 1990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고르바초프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2009년 5월 그는 평화의 종 제막식에 귀빈으로 참석했었다고 한다. 그가 한국 중앙 정부의 초청이 아닌, 한 군수의 초청을 받고 평화의 종 제막식에 참석했다는 것이나, 이 행사에 참석하는 동안 화천의 한 평범한 펜션에서 숙박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다음날 정갑철 군수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에게 평화의 종 공원을 조성한 일을 격려하면서, 한편 평화의 종 제막식에 고르바초프 같은 인물을 초청하여 동네 펜션에서 재우는 등 그런 중요한 인연이 있는데도, 화천군 안에 왜 ‘고르바초프 거리’ 혹은 ‘고르비 거리’ 하나 만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던 것이 기억난다.


비무장지대 부근에는 순교자들이 있다. 순례자는 남북 분단과 순교 이야기, 그러나 망각된 이야기, 기억해 주는 이들마저 없어진 이야기를 안타깝게 찾는다. 1950년 6월 24일, 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 북한엔 기독교 목사들에 대한 마지막 일대 검거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기독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북한 정권이 볼 때 그들은 아주 위험한 집단이었을 것이다. 순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선 우익 엘리트들이 다 월남했는데도 그들은 가지 않았다. 그들은 공산정치를 방해하면서도 주민들의 정신적 지도자 노릇을 하 는 자가 많았다. 유사시 그들은 반공전선에 뛰어들 가능성이 있었 다. 북한은 이 ‘잠재적 적’을 전쟁을 전개하기 전 대청소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았다. 연천, 철원, 김화, 금성 일대에서 목사, 전도사 장로들이 줄줄이 묶여갔다. 그리고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그날 주일 종은 울리지 않았다」에서).


상세한 역사가 망각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음을 우리의 순례자는 안타까워한다. 순례가 거의 끝날 무렵 순례자는 길 위에 나타난 구십 세의 노모를 만난다. 수고한 아들을 안아주려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장한 아들의 개선을 축하하려고 길을 나선 아들의 어머니다. 당신이 남편 따라 단신으로 월남했던 그 길 위에서의 모자상봉은 우리 독자들에게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순례자는 인적이 드문 길가 논 옆에서, 피사리를 하는 할머니들을 만난다. 순례자는 반가워서 먼저 말을 건다. 몰골이 말이 아닌 키다리 가 강원도 고성에서 걷기를 시작해서 임진각까지 가는 길이란 말을 들은 할머니들은 깜짝 놀란다. 그 중 한 할머니가 묻는다. “어디 아파요?” 그렇지! 아프지, 아프니까 집 떠나 걷고 있지. 피살이 하던 할머니는 걷는 이의 정곡을 찔렀다.


우리의 순례자가 순례의 끝에서 받은 마지막 질문은 “아직도 아프니?”라는 주님의 질문이다. 걷기를 끝낸 그에게 나도 묻고 싶다. 그 아픔이 어디 치유되라고 있는 것인가? 그 아픔 그대로 지니고 견디라는 아픔 아닌가! 여러 성도들이 그렇게 큰 사랑을 베푼 것은, 아니, 그보다도 주님께서 친히 열 하룻길을 특별히 동행해 주신 것은, 그 아픔 그대로 지니고 이 역사에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라는 격려가 아니던가!


마지막 날은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와 아들의 마중을 받는다. 아내는 장모의 사랑도 함께 운반한다. 순례자에게 제일 약한 부분이 가족이다. 가족 때문에 떳떳할 수 있고, 가족 때문에 비굴할 수도 있다. 가족 때문에 부르심을 거절할 수도 있다. 동시에 제일 강한 부분이 가족이기도 하다. 한희철 목사는 평생 아픔과 상처를 지닌 채 단강에서,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천에서 부름 받은 삶에 헌신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아내를 비롯한 가족의 힘이 뒷받침 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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